〈 14화 〉 연구부서 제안
* * *
새하얗던 돌바닥은 빨갛게 물들었다. 대리석 사이의 틈은 월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가득했다.
“허.”
가르텔은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거기 둘, 의무실로 이 아이를 데려다줄 수 있겠나. 이동식 침상은 저기 탁자 구석에 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같은 반 생도를 시켜 월프를 호송시킬 때까지도 황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엄청나군. 월프가 이리 끔찍한 몰골로 남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예나의 본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의도로 맞춘 대진이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격차로 승부의 마침표를 찍을 줄 몰랐다.
「피, 핏자국 봐.」
「월프면 저번 능력 검사에서 반 2위한 얘 아니었어? 이게 뭐야…….」
비단 자신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월프와 예나의 사투를 눈앞에서 바라본 대부분의 후보생도 눈빛이 멍한 것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도대체 그 움직임은 뭐였지?’
툭, 투욱─
가르텔은 손바닥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예나가 월프보다 강하다, 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분명 월프의 육체 능력은 예나를 압도했어, 그런데 졌다는 건?
‘숙련도의 차이가 심하다는 거지.’
전투술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그 수준이 격차가 있음을 의미했다.
확실히 예나가 선보였던 움직임은 1학년 후보생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졸업생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은 절제되고도 위력적이었으니까.
아니, 완성도로 따지면 제국의 공식적인 마도 교리에 못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그런 기술력을 어떻게 얻었냐는 건데.
“흐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는걸까.
단련장 주위를 거닐던 중, 때마침 예나가 다가왔다. 언제 씻었는지 덕지덕지 묻어있는 피딱지는 사라졌고, 셔츠도 말끔히 갈아입은 외형이었다.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얘가 그토록 잔혹했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예나의 면모를 볼수록 괴리감이 들었다.
치익, 프으으─
가르텔은 소녀를 무심히 바라보다, 소매에서 파이프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이 연기를 마시면 조금이라도 심신이 안정되었으니까.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행하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예나 프로이드, 어디서 따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가르텔은 파이프를 두어 번 빨아들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너무 완벽했어.’
예나가 보여줫던 전투술 중에서는 기나긴 장교 생활을 한 자신조차 보지 못한 종류의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출처가 어딘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만약 예나가 직접 만든 거라면…….’
보호구로 제한된 마나를 사용했을 리도 없으니, 남 주기 아까운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소리겠지.
“훈련 말씀입니까?”
“그래, 네가 보여준 기예들이 평범하지 않은 건 잘 알 텐데.”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걸까. 가르텔은 허공에 연기를 내뿜으며 예나의 답변이 들려오기만을 고대했다.
“그게…….”
그리고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꿀꺽─!
가르텔은 머리를 내빼며 예나를 매섭게 바라봤다.
* * *
“예, 예나! 괜찮아?”
“응. 문제없어.”
에리카는 곧장 달려와 내 몸에 묻은 핏물과 먼지들을 닦아줬다. 글썽거리는 눈빛이 그녀의 여린 마음을 잘 나타냈다.
착하네.
모든 생도가 공포 섞인 얼굴로 내게 멀어지려 할 때, 홀로 다가왔다. 더러운 외면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나 걱정해주니 무척 고마웠다.
“그, 그래도 피가…….”
“이거 내 꺼 아니야.”
나중가서 보답이라도 해야겠군. 이처럼 사랑스러운 동료는 처음이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친구니까! 예나도 날 도와줬고!”
“그래도.”
난 쑥스러운지 뺨을 긁적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스윽, 슥─
이 정도면 됐겠지. 치덕거리는 물질을 대강 닦아내니 한 층 상쾌해졌다. 얼마나 더러웠는지, 에리카의 하얀 손수건이 검붉게 물들었다.
「쟤가 월프를 이겼다고?」
「이상한 편법 같은 거 사용한 거 아니야?」
바닥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자, 가장 먼저 날 맞이한 건 생도들의 수군거림이었다. 그들은 싸움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전과는 달랐다.
월프가 의무실로 떠난 이후, 과거에는 나를 낮잡아봤다면, 지금은 경계심이 짙은 눈동자로 대체되었다.
「히, 히이익!」
「으, 으흐흠…….」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칠 때면, 녀석들은 능청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하.”
이런 형국에 조소를 금치 못했다.
고작 십 분도 채 안 되는 대련에 모든 이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간간이 들려왔던 평민을 빌미로 한 모욕적인 언사마저 어느새 쏙 들어갔다.
매우 이중적이지 않은가. 난 주변에서 꽂히는 관심들에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야.
결국 리나와 에리카와 같이 특별한 인물을 제외한 학급원들은, 월프라는 놈 하나만 휘어잡으면 자연스레 딸려오는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굳이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기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가르텔 교관이겠지.
또각─! 또각─!
그렇다면 이 타이밍을 이용하여 교관과 안면을 튼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옷가지의 정돈을 끝낸 나는 곧바로 가르텔에게 다가섰다. 그의 복잡다난한 기색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이야말로 날 그의 머리에 각인시킬 기회였다.
“아, 예나인가.”
잠깐의 인사 후, 소매춤에 파이프를 꺼내 담뱃재를 넣는 교관의 행동에 더욱 확신이 섰다.
가르텔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허구한 날, 파이프를 피웠으니까. 결국 내 강함에 혼란스러워 하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예나 프로이드.”
“예.”
“어디서 따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연기를 몇 모금 빨아들인 그는 예상대로 대련에 관해 물었다.
“훈련 말씀입니까?”
“그래, 네가 보여준 기예들이 평범하지 않은 건 잘 알 텐데.”
가르텔은 군인 특유의 예기가 서린 카리스마가 있는 어조로 압박했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냐에 따라 처우가 결정되겠지. 허무맹랑한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의 성질을 긁는 발언도 안 된다.
앞뒤가 맞고 납득이 가능하도록 해야 했다.
“프로이센 마도술입니다.”
그렇게 고심 끝에 답변을 내놓았다.
“그건 기초 훈련소에서 가르치는 건데, 네가 보인 움직임들이 그거라고? 내가 프로이센 마도술을 교육시킨 생도만 수 천이야, 나를 우롱하는 건가?”
“전혀 아닙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개량 마도술입니다.”
예상된 수순이었던 가르텔의 분노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후,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거짓이라곤 한 치도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 마도술도 맞았고, 개량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그는 모를 셀 수 없이 반복되었던 과거의 세계에서 이 전투술을 개량했을 뿐이지.
“……네가 수정한 건가?”
“아뇨, 저희 아버지께서 완성하셨습니다.”
“아, 아버지?”
하지만 전부를 사실대로 털어놓을 순 없는 판국이었다.
그리 말하다간 미친놈, 아니 미친년 취급을 받을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예나 프로이드의 설정, 즉 내 가정사를 조금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예, 마도병이셨거든요.”
“그럼 네가 구사했던 게…….”
“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설정이라는 건 이용하라고 있는 거잖아?
난 아버지가 전쟁에서 활약한 마도 장교라는 걸 약간 꼬아, 콧수염을 매만지는 가르텔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어차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뜻하지 않은 업적을 얻고, 난 인과관계를 얻는데, 손해 보는 이가 없잖는가.
뭐, 싫다고 말할 사람도 없는데 어쩌겠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전쟁이라는 폭풍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이 주장을 부정할 누군가는 세상에 없다.
“그, 그렇군.”
거기까지 말하자, 가르텔은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되려 예상치 못한 발언들에 당황한 성싶었다.
“그래서 그런 거였나…….”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으니까.
됐나, 확실히 대전쟁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대단하긴 한 건지, 아버지의 능력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비로소 그의 의심 섞인 눈초리가 지워졌다.
그래서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건만…….
터억─
“그렇단 말이지!”
“네, 네?”
가르텔이 갑작스레 두 손을 잡음으로써, 난 다시금 긴장의 끈을 잡아야 했다.
뭐지?
앙다문 입술, 그리고 굳세게 자리 잡은 콧수염 등, 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표정은 뭐냔 말인가. 돌발적인 상황에 뻣뻣이 몸을 굳히고 가르텔을 응시했다.
꿀꺽─
차갑게 정신을 갈무리하곤, 묵묵히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예나, 혹시 연구부서에 갈 생각은 없는가?”
“……네?”
그리고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가르텔의 입밖으로 나온 건 선물과 같은 제의였다.
연구 부서 가입이라.
대학으로 치자면 일종의 동아리, 즉 학술 연구집단과 같았다 그런데 저 단어가 여기서 등장할 줄이야.
“내가 추천하는 곳에.”
“연구 부서 추천, 입니까.”
“네 능력이면 충분한 활약을 보여줄 거 같거든.”
가르텔의 제안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무려 교관이 추천서를 써준다는 건, 많은 생도가 꿈으로 삼을 정도로 흔치 않은 기회였으니까.
“어디를 말입니까?”
“마도공학 계획부라는 곳에 말이야."
심지어 그 부서라는 곳이 사관학교 제일의 조직인데, 어찌 설렘에 가득 차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언급한 마도공학 계획부는,
힌츠 폰 데리안.
오프레트 루츠.
훗날 ‘기갑의 천재’라 불리우며, 대전쟁에서 막대한 공적을 세우고, 제국의 군사 교리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킬 장교진이 담당하는 부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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