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정규 수업
* * *
터벅─! 터벅─! 터벅─!
신경질적인 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찌나 세차게 발을 구르는지, 바닥에 흙먼지가 일렁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리나는 주먹을 꽉 쥐며 어깨를 떨었다.
예나의 얼굴에 만연히 피었던 미소가 아직도 생생했다. 평민이라면 황녀를 역임했던 나의 질문을 맞받아칠 리가 없을 텐데, 그녀는 태연자약했다.
등급을 숨겼다는 것에 대해, 예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망상이길 바랐는데…….”
처음엔 괜한 의심을 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눈은 똘똘하고 피부는 새하얀 모습이 어두운 이면이라곤 하나 없는 순수한 소녀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오산이었다.
보통의 평민은 월프를 그렇게 대할 수 없었다, 하물며 내 물음에 어떠한 두려움 없이 답할 수 없었다.
말하긴 뭐하지만, 난 평민에게 있어 귀족 그 자체였다. 그런데 건성으로 답변을 하고 긴장하지 않는다라?
‘불가능해.’
딱히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고 싶진 않았으나, 이게 제국의 현실이었다. 물론 대전쟁 이후 귀족과 평민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고 하다만은…….
정도가 있잖는가. 엘프와 인간이 서로 평등하기로 유명한 갈리아 공화국도 황녀와 평민을 동일시하진 않는다.
으직─!
그녀는 바닥의 나뭇가지를 지르밟으며 까득 입술을 씹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 없었다.
‘역시 누군가가 뒤에 있음이 분명해.’
이젠 강하게 확신이 들었다. 예나는 단순한 평민이 아니라, 이름 모를 귀족의 지원을 받는 아이라고. 이러면 귀족을 대수롭지 않게 대했던 특이함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느냐는 건데…….’
그녀는 백색의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꼬아보며 인상을 썼다.
군사기밀을 빼내기 위해서? 으음, 아니야. 어떤 귀족이라도 그따위 미친 짓을 할 리는 없어.
첩자라는 가정 하라면 성립할 순 있겠으나,
제국 그따위 위장 생도 하나 걸러내지 못하고, 가장 엄중하게 다루는 마도 각성자 교육학교에 합격시켰을 가능성은 작음을 넘어, 없다.
결국 답은 하나다.
‘다른 귀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물론 이 가정 또한 마찬가지로 실현성이 매우 떨어졌다. 혹여 발각되기라도 하면, 군부와 적대 관계가 형성될 텐데 어느 누가 시도할까.
“…….”
하지만, 리나는 그런 짓을 할만한 이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아서 탈이었다.
과거 제국의 최정상에서 군림했던 통치자이자, 현재는 폐위되어 이웃 국가 홀란드 왕국으로 망명한 남성.
‘황제.’
아니, 아버지.
그 노인네라면 하고도 남았다.
당위성 또한 충분했다.
넌 황가의 유일한 각성자다, 다시금 가문을 부흥시키도록 노력해라, 비록 몸은 홀란드에 있더라도 네가 제대로 명을 따르는지 지켜볼 것이다…….
히스테리를 유발할 수준의 강요와 핍박으로 날마다 몰아붙였던 황제의 성격이라면, 내가 헛된 짓을 하고 있는지 수족을 보내 감시하고도 남았다.
‘난 그에게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저 황위를 계승받지 못하는 딸이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 난 슈트레만 가문과 정략결혼을 할 여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는 당해줄 생각은 없어.”
리나는 핏방울이 맺히도록 입술을 씹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명에 사관학교에 입학하긴 하였으나, 여기서까지 그에게 붙들려 살긴 싫었다.
사실 여기 온 것도 그 지옥같은 감시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렇기에 리나는 더욱더 마음을 차갑게 갈무리했다.
‘그 아이, 지켜봐야겠어.’
절대 예나에게 등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녀가 숨기고 있을 비밀을 밝혀내겠다고.
그리고 그 증거를 바탕으로, 아버지에게 한 방 먹이겠노라고.
혹여나 예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황제에게 시달렸던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는 지금, 다른 판단을 하기에는 이미 많은 길을 지났다.
더는 돌이킬 수 없었다.
단지 의심이 확신이 되고, 확신이 현실이 되기를 기원할 뿐.
‘아버지가 틀렸음을, 내가 황제가 되기에 충분히 유능했음을 보여줄 거야.’
꼭.
터벅─! 터벅─!
리나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쥐며 몸을 움직였다.
* * *
햇빛이 쨍쨍하게 들어오는 아침.
“흐으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부스스한 머리와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비몽사몽한 정신을 일깨웠다.
베개 자국이 난 얼굴. 어깨춤으로 흐른 잠옷의 목 부분,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까지. 얼마나 편히 잠을 잤는지를 외관이 전부 말해줬다.
덕분인지 피로했던 몸은 어느샌가 쌩쌩함을 되찾았다.
“으그그극.”
확실히 기숙사 침대가 훨씬 편안하네. 임시 숙소의 것보다 몇 배는 더 푸근한 거 같아.
“읏차.”
난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하며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터벅─ 터벅─
발에 씌웠던 수면 양말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단결과 자유, 우리 조국을 위해─!』
그 힘찬 걸음을 반기는 듯, 때마침 경쾌한 음악이 재생됐다.
제국의 국가(國?)였다.
대전쟁의 마도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숱하게 듣던 노랫소리를 벌써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오랜만에 들으니 좋은걸.
난 괜히 신나는 기분에 얕게 미소를 짓고선 화장실 내부에 들어서고, 문 앞에 잠옷을 가지런히 정돈했다.
쏴아아─!
이내 새하얀 나신으로 물줄기를 맞았다.
마침내 몽롱하기만 하던 정신이 깨어나, 두 눈이 선명하게 떠졌다.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뽀드득─
하얗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니, 흑발의 여자아이가 맞이했다.
현실이었다. 기억이 망상이 아니었다. 결국 이 세계도 멀쩡하다는 의미, 앞으로 다양한 일들을 맞닥뜨릴 거라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다면 어제 못했던 정리를 해놓는 게 우선일 터.
샤워를 빠르게 끝마치고, 와이셔츠 하나를 걸친 뒤 책상으로 움직였다.
사각, 사가각─!
전날 챙겨뒀던 만년필과 종이 한 장을 이용하여 이후에 벌어질 사관학교 내부, 혹은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각종 정치적 사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만년필을 끄적이며 빈칸을 검은색으로 채워나가자, 어느새 종이는 활자들로 가득 채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타악!
난 거칠게 펜을 내려놓으며 종이를 허공 위로 들었다. 앞뒷면이 글씨들로 얼마나 빽빽한지, 전등에 가까이해도 잘 투과되지조차 않았다.
완벽하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탄생했다.
[제국 국내외 사건 종합 요약문]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제목 아래,
[제국력 133년 노동자당 다수당 등극]
[제국력 136년 베른 제국 재군비 선언]
[제국력 138년 오스트란트 통합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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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들이 일정한 문체로 나열된 모습, 세간에 공개되면 끔찍한 파문을 불러올 문서가 탄생했다.
“개판이겠군.”
난 종이를 내림차순으로 읽어가며 피식 웃었다.
단순한 문자 몇 마디만으로 제국의 얼마나 난장판인지 한눈에 보였다.
대전쟁에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에 더해, 공화국이 수립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은 만큼, 제국은 각종 정치 세력이 난립하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렇기에 권력을 얻어 고위층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을 써서든, 앞으로 위상이 높아질 집단에 소속돼야 한다.
역시 노동자당에 입당해야 하겠지.
스윽, 스으윽─
난 와이셔츠 이외의 옷자락을 걸치면서도, 종이 윗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시야에 들어오는 수많은 사건명 속에서, 유독 ‘노동자당’이라는 단어가 활자 중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훗날 노동자를 표방하는 정당이 곧 제국에, 아니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됨을 뜻했다.
그러니 이들과 협력해야만 해.
내겐 금으로 치장된 동아줄과 다름없었다. 뒷배경 하나 없이 아버지의 이름값으로 학교에 입학한 나로선, 노동자당만이 유일한 구원책이었다.
앞으로 교관과 친분을 쌓으려는 계획도 이 때문이었다.
군부는 막강한 힘을 가짐과 동시에 정치권과 밀접하다 할 수 있었으니까. 관계를 잘 유지하면 언젠가 노동자당에 입당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잖아?
물론 필요한 건 노동자당의 권력일 뿐, 충성할 생각은 한 치도 없었다.
“……오히려 치워버려야지.”
그 우매한 족속들을 말이야.
아직도 노동자당이라는 이름값만으로 능력도 없이, 자리를 꿰찬 놈들이 벌였던 행동을 상기하면 치가 떨렸다.
사실상 녀석들이 대전쟁을 승리하기 어려웠던 주범들이었다.
총통을 역임한 당수는 결정적인 시기마다 제국을 수렁으로 빠뜨렸고, 하수인들은 그와 더불어 어리석은 짓거리를 했다.
과거에는 어차피 게임이니 기회는 많다, 라는 생각으로 노동자당의 얼빠진 놈들한테 애써 충성하며 대전쟁을 끌고 나갔지만, 이번에는 같이하고 싶지 않았다.
뭐, 일단은 개처럼 굴러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겠지만 말이지.
“흐으음.”
겉옷을 다 껴입고, 어깨 너머까지 흘러내린 머리를 묶었다. 그렇게 정리를 끝낸 뒤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을 신었다.
아직도 옷차림이 생소하긴 했으나,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달칵─!
마지막으로 소매의 단추를 여밈으로써 장교복의 착용을 끝마치자, 거울 앞에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닌 카리스마를 풍기는 한 군인이 자리했다.
후보생 계급을 나타내는 견장에 찬란 금빛의 벨트가 그 분위기를 더했다.
난 거울 앞의 자신을 몇 초간 바라보고선 뒤로 돌았다. 딱히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찌이잉─!
밝은 불꽃을 시작으로 서리가 휘날리는 얼음 조각, 소용돌이치는 자그마한 물길 등, 곧바로 형형색색의 마법이 나타났다.
일단은 숨기는 게 좋겠지.
다양한 원소를 다룰 수 있다는 걸 알려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물론, 이를 가르텔에게 밝힌다면 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사관학교 교장의 주목까지 받을 수도 있겠지. 혹은 이를 넘어, 희귀한 능력을 보러 많은 정치가와 교관들과 오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능력이다. 그만큼 위기가 닥쳐온다면, 내 몸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서의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한다.
먼저 내가 나를 지킬 힘을 기르고 난 뒤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7등급 따위의 허접한 마나량을 벗어난 뒤에 교관에게 말해도 주목을 받을 텐데 괜히 조급해할 필요가 없잖는가. 어차피 시간은 많다.
파스스─
그전까지만 참자, 난 하얀 연기가 잔존한 손바닥을 털며 현관으로 향했다.
할 일이 많아.
마력과 신체 능력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에 이어 전날부터 이어진 리나와의 악연을 친밀감으로 뒤바꾸는 것까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다.
“……재밌겠는걸.”
그만큼 생도 생활에 있어 기대감이 컸다.
과연 어느 사건사고가 내게 닥칠까? 눈을 감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난 그 상쾌함을 떠안으며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철컥─!
기숙사 문밖.
사관학교 첫 수업을 듣기 위해서.
* * *
칠판을 중심으로 둥글게 계단식으로 위치한 책상들. 그리고 자리마다 놓여 있는 두꺼운 교본까지.
마치 현대의 대학교가 생각나는 시설이었다.
공을 얼마나 들인 걸까. 분명 시대적 배경이 근대일 텐데도 불구하고, 사관학교의 시설만큼은 과거 삶에서 맛보았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드디어 첫날이다…….」
「이 책으로 공부하는 건가본데?」
와중에는 생도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찌릿─
“리나?”
“…….”
무슨 우연인지는 몰라도, 리나와 함께 능력 검사를 받은 것도 모자라 같은 학급으로 배정되었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저릿함을 선사했다.
「저년도 여기 있네?」
「흐음, 잘됐네. 심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악연이 짙은 월프도 함께였다. 전날 검사를 같이 진행했던 조가 그대로 같은 학급으로 결성되는지, 녀석의 패거리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건 기회다.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 한꺼번에 모였다. 최대한 리나와 사이가 가까워져야 하거나 월프의 뒷배경을 알아내야 하는 나로서는 뜻밖의 소득이었다.
“교관도 나쁘지 않은 인물인 거…….”
뚜벅─ 뚜벅─
“같고.”
나무 바닥의 끼익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생도들은 하나둘씩 강의실 입구로 눈을 모았다.
「야, 야 온다!」
「저 교관님은 어제?」
어지러웠던 공간이 순식간에 질서를 맞췄다.
“다들 주목.”
공동이 조용해지자, 비로소 나타난 익숙한 형상의 중년의 남성.
전날 능력 검사를 주관했던 가르텔이 뒷짐을 진 채 등장했다.
「제국을 위하여.」
「제, 제국을 위하여──!」
그는 간단히 제국식 인사를 마치고선, 칠판 가운데에 있는 교탁으로 향했다.
“그럼 만나서 반갑다. 오늘부터 적격 심사와 1학년 과정을 통틀어 맡게 되었다. 어제 봤다만은 그건 임시였고, 이번엔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지.”
그리고 생도들을 휩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1학년 담당이자 사관학교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가르텔 교관이라고 한다.”
“안녕하십니까!”
가르텔의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생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군기가 바싹 든 모습이었다.
제국 최고의 마도 장교 양성 학교에서 받는 최초의 수업,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베테랑 선배와의 첫 정식 대면이라는 긴장감에 생도들은 경직된 채 대답했다.
명망 높은 리나도, 월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학식의 순간이 재연되는 듯, 두 팔로 교탁을 잡고 예리한 눈빛을 뽐내는 남성의 입 모양에 집중했다.
나도 크게 차이는 없었다.
비록 여타 아이들처럼 떨진 않았다만, 과연 어떤 수업을 진행할까, 라는 두근거림에 두 귀를 활짝 열고 수업에 집중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그럼 지금부터 교육을 시작하도록 하지. 그럼 모두 교본 첫 페이지를 피도록.」
난 그의 말을 따라,
사락─
입술을 달싹이며 책 표지를 넘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