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미상의 물건
* * *
성스럽게 빛나는 백색의 머릿결.반짝이는 금화만큼이나 고귀하며 아름다운 형상의 금안(??).
또각─ 또각─
귀족적임을 넘어 고귀한 기품을 지닌 소녀가 강당을 거닐었다. 생도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화, 황녀다.」
「진짜 사관학교에 입학했구나.」
황제의 여식.
제국의 마지막 남은 황녀 등.
주위에서 많은 그녀를 칭하는 다양한 수식언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그 호칭의 주인은 주변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눈매로 오로지 강당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표정이 얼마나 차가운지, 발자국 뒤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어딜 가나 황녀 소리야.’
소녀는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란에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우아하다니 뭐니 하며 칭찬하는 말조차 듣기 싫었다. 이젠 황녀가 아닐뿐더러, 결국 내 혈통과 외관을 보고 저리 품평하는 것임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젠 진절머리나.’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어. 순식간에 정문 앞에 다다른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익─!
평화로운 야외의 풍경을 감상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리라.
“아?”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소녀는 얼빠진 얼굴로 정면의 광경을 응시했다.
끝내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자신이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산뜻한 새들의 지저귐도, 나풀거리는 잔디도 아닌, 둥글게 모여있는 수많은 인파였으니까.
‘뭐야?’
그리고 그 둥글게 모인 사람들 중심에 다름 아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생도가 서 있었으니까.
“월프?”
* * *
잠깐의 정적.
“하, 하하하…….”
월프는 실없이 웃음을 내뱉었다.
타악─!
이내 붙잡았던 내 멱살을 더욱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거 생각보다 더 미친 년이었네.”
그의 형형한 눈빛이 코앞에서 빛났다.
도발이 완벽하게 먹혔다. 월프는 다른 귀족들보다 더욱 권위주의적 태도가 심했던만큼, 격렬한 분노를 내비쳤다.
「쟤네 싸우는 거야?」
「딱 봐도 약해 보이는 얘를 데리고…….」
「무슨 저리 가녀린 아이를…….」
그 때문에 주위는 어느새 생도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야, 야 월프. 진정하는 게 어때?」
「교관님 오시면 우리 망해 인마!」
실실거리며 웃던 월프의 친구들은 그제야 표정을 굳히며 싸움을 말렸다. 여기서 더 분란을 일으켜 교관이 개입한다면, 좋은 꼴을 못볼 게 뻔했으니까.
그래선 안 되지.
하지만 난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리 재미없게 끝낼 순 없었다.
정말로 놈과 심하게 다툰다고 해도, 이 자그마한 체구와 가녀린 팔과 같은 약해빠진 모습 덕에 처벌도 덜 받을 터, 나로선 두려울 게 없었다.
이럴 땐 몸이 바뀐 게 도움이 되는군.
판은 완전히 깔린 상태,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기만 하면 됐다.
“멍청한 사람이 보이면 참을 수 없어서.”
“……진짜 죽고 싶구나.”
재차 조롱의 말을 건넸다.
그럴수록 월프는 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옷자락을 비틀었다. 당장 저 덩치로 날 깔아뭉개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재밌는 걸 어떻게 참아.
이 상황이 몹시 흥미진진했다. 피로감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난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과 함께 월프의 기세를 맞받아쳤다.
스으으─
동시에 체내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단순히 신체 능력만으로 맞붙으면 질 게 뻔하다. 이처럼 허약한 몸이라면 나라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힘을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나』
모든 생물체가 지닌 미지의 힘, 이 능력은 전방위적인 활용성을 자랑함과 동시에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력을 보이는 특징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을 다루는 데에선,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고 자신했다.
사실 이걸 확인하려고 의도해서 싸움을 건 거기도 하고 말이지.
적을 알기 전에 나부터 알아라, 유명한 격언이 아닌가. 몸이 바뀜으로 인해 어느 정도로 능력이 약해졌고,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확실히 파악해야 했다.
제일의 방법은 다른 각성자와 한 번 싸워보는 것이었다.
난 힘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심장에서부터 손가락 끝으로, 월프에게 선사할 마나를 응집해나갔다.
「지금 저 아이 때리려는 거야?」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슈트레만 가문인데 누가 막게?」
생도들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심지어 코앞에서 눈을 부릅뜬 월프마저도 내가 마나를 끌어 올리고 있음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알았으면 이렇게 무시하진 않았겠지.
생도가 교관의 허가 없이 마나를 발산하는 건 중죄, 엄벌에 처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모르는데 어떻게 잡을 수 있겠어? 마나 운용에 통달한 나로선, 교관과 생도들이 전혀 모르게 은밀히 힘을 끌어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록 전보다 약해진 거 같다만은…….
예상대로 마나량도 감소했는지 힘이 많이 모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나는 마나, 아직 초짜인 월프를 경악시킬 수준의 초월적인 힘 정돈 충분히 발휘했다.
“하하, 그렇게 원한다면…….”
마침내 녀석의 웃음이 멎었다.
주변 생도를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차 살기를 키워나갔다.
그렇게, 놈과 맞붙으려나 싶었건만.
타악!
“월프, 뭐 하는 거야!”
“리, 리나?”
갑작스레 저 득실거리는 군중을 뚫고 달려온 여인이 녀석 앞을 가로막아, 아쉽게도 그 기회는 사라졌다.
“네 아버지가 했던 말 잊었어?”
“…….”
“애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너 이럴 때 아니잖아. 이러다간 징계 먹고 적격 심사도 못 해.”
그녀는 머뭇거리기만 하던 여타 아이들과 달랐다. 쏘아붙이는 어투로 월프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러자 눈가에 살기가 그득그득했던 월프가, 점차 주먹을 내리고 있었다.
쯧.
난 그 변화에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만 더 도발했더라 분명 월프가 더욱 격한 행동을 보였을 텐데.
정말로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저 여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호기심이 들었다.
생도들도 함부로 말리기 어려운 귀족을 이렇게 다룰 수 있다고? 심지어 저 아이와 월프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누가 봐도 저 아이잖아.
도대체 정체가 뭘까.
내가 깊은 번뇌에 잠길 동안, 그녀는 월프를 지나치고, 냉담한 표정과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
곧이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죠, 당신?”
“예나 프로이드.”
“……평민이시군요.”
어수선한 분위기 속의 대화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싸움 구경이 진리라는 관념이 이 세계에서도 통하는지, 온갖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들을 향해 있었으니까. 이 소녀는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물론 나는 아니지만.
수많은 기자 앞에 서 공략 영상을 발표하던 게 과거의 일상이었다. 이런 대중들의 관심은 익숙할 따름이었다.
이 여자는 분명?
되려 내 관심은 다른 데에 가 있었다.
이처럼 고결한 백발에 거룩한 금빛의 눈을 지닌 입학생은 이 학교에 단 한 명뿐임과 동시에, 아카데미 1945의 스토리를 이루는 주 캐릭터였으니까.
“어찌 됐든, 이런 소란을 일으킨 책임에 대해서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혹시나 다친 곳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딱히 없어.”
“그럼 가보도록 할게요. 월프 너는 더 난동 피우지 말고 따라와.”
그런 나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그녀는 짧은 언사와 함께 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뒤이어 주변의 인파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너, 조심해라.”
월프를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광장을 떠났다. 몇 여분이 흐르자,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뒷모습마저 사라졌다.
모였던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에이 뭐야, 싱겁게 끝났네」
「싱겁게 끝나야 정상이야 인마」
이들 중에선, 내가 평민이었음이 밝혀진 이후에는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며 돌아서는 남녀들도 보였다.
그렇게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다시금 평화를 되찾은 광장 속, 나는 홀로 월프와 소녀가 사라진 방면을 바라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아이를 여기서 마주쳤다라.”
그녀의 이름은 리나 빌헬름 빅토어 호엔촐레른, 이야기 중반부나 중후반부가 돼서야 만날 인물을 지금 마주쳤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는데.
변화 없는 표정만큼이나 차가운 성격, 제국의 마지막 남은 황가 직계 각성자가 바로 리나였다.
그녀는 재능도 뛰어났고 학문적 능력도 출중했다. 고귀한 혈통에 걸맞은 완벽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좀 자연스럽게 대할 걸 그랬나.
난 별다른 대화없이 대답만 했던 직전을 돌이켜봤다.
솔직히 순간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본래라면 나중에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을 오프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면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젠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이런 상황도 생기는 거겠지.
“조금 아쉽네…….”
리나가 약간만 더 늦게 왔더라면 즐거운 일이 벌어졌을 텐데. 난 월프의 움켜쥠으로 인해 빨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건 그렇고 월프와 리나가 아는 사이였다라.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새롭게 생겨난 등장인물이 거대한 뒷배경이 있는 것에서 모자라, 황가의 딸과도 아는 사이라니.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겠군.
난 피식 웃으며 월프의 압박으로 욱신거리는 팔뚝을 주물렀다.
『지지직!』
이어 때마침 들리는 전파음에 귀를 기울였다.
『아, 아아. 사관생도 후보생 여러분은 강당에 집결해주시기 바랍니다. 임시 숙소 배치 안내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 벌써인가.
“끄으으…….”
난 방송이 끝나는 순간, 힘껏 기지개를 켜며 강당으로 향했다.
생각해보니 이런 절차도 있었지. 월프와의 사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입학식 이후엔 임시로 묵을 숙소를 배정받는 게 다음 일정이었다.
기억에 따르면 그랬다.
결국 이 세계의 줄거리는 본판과 큰 차이가 없구나.
아스트라한 사관학교의 존재에 모자라 루스테트가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점, 입학식에 이어 임시 숙소를 배정하는 것까지. 이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과거 플레이했던 본판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제국의 미래도 그대로겠지.
“패전이라.”
까드득!
난 입 밖으로 튀어나온 두 글자의 단어를 상기하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형성했다.
본래 스토리대로 진행된다고 한다면 제국의 최후는 철저한 패배였다.
이대로라면 장교이며 각성자인 난 그리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리라.
마도 장교는 인간보다 병기로 치부하는 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으니 대우도 그만큼 처참할 것이다.
하지만 난 좋은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고문 속에서 느껴질 끔찍한 고통, 피부 껍질이 뜯길 정도의 강한 추위, 그런 끔찍한 환경이 만연한 수용소에서 인생을 마감할 마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젠 현실인 만큼 고통도 생생할 테니까.
더구나 이참에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셈인데, 평범한 인생을 넘어 제국의 최상위층에서 군림해봐야지.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목표가 필요했다.
『제국의 승리』
지금은 대전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이니, 최대한 준비를 한다면 불가능하지 않았다. 승리한다면 찬란한 앞날이 기다리리라.
전쟁의 참혹함? 이면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폐해? 충분히 납득한다마는 나에겐 유희가 제일 중요했다.
그러니 월프랑 싸우려 했지.
냉철히 조금 전의 상황을 돌아본다면, 그가 날 모욕해도 자존심을 굽히며 들어가는 선택이 더 좋았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면 그 관계가 동지로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라 함은 자고로 가치관에 따라 움직여야 생기가 넘치는 법.
난 단지 물질적 이득만이 아닌, 삶에 대한 충분한 만족감을 얻길 윈했다. 월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는 선택보다 놈의 안면에 주먹을 꽃아넣어 기쁨을 느끼는 것이 훨씬 나았다.
터억─
“다 왔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금세 강당에 도착했다.
끼익──!
난 망설임 없이 건물 안으로 향했다.
* * *
시끄러워서 바람을 쐬러 나왔는데. 산뜻한 잔디들에 심신을 안정시키려 강당 문을 열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리나는 까칠하게 월프를 째려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한 눈에 봐도 덩치 차이가 어마어마했던 그 아이를, 월프는 원수 취급하듯 멱살을 부여잡았다.
자신보다도 작은 키, 새하얀 피부와 똘망똘망한 눈매를 지녔던, 순수해 보이기만 하던 생도를 괴롭혔다.
“그 아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 그냥 친해지려고 말을 걸었던 거뿐이야.”
“예뻐서 그런 건 아니고?”
“하하하, 질투라도 하는 거야?”
“하아.”
리나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눈을 뗐다.
저런 능청스러운 태도가 싫었다.
아니 월프라는 놈 자체가 좋지 않았다.
황녀였던 자신보다 더한 평민을 깔보기를 시작으로, 상대가 어떤 재능을 지니든 계급이 낮으면 무조건 무시하질 않나.
마음 같아선 그만 아는 척하라 싶지만…….
뜻대로 되면 그게 인생인가.
황가의 녀석의 가문인 슈트레만과 워낙 가까운 사이에다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보니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미 저 놈과 정략혼에 중하는 관계를 유지 중이었다.
대전쟁의 패전 책임으로 폐위된 황가의 입장으로선 슈트레만 가문과 친선을 유지해야만 했다.
놈의 말에 화내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방편이 최선이었다.
“근데 그년 뭔가 이상했다니까?”
“그년이라고 부르지 말고.”
“하하, 그래 미안. 예나라고 했나? 그 아이, 진짜 성격 하나 이상했어. 가면 갈수록 날 의도적으로 노렸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하지만 고장 난 시계라도 한 번은 맞는 법, 난 이따금 들려오는 그의 말은 내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예나 프로이드라고 했지?’
월프와 십 년을 넘게 지냈던 만큼 저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뭘 믿길래 평민이 귀족 중에서도 껄끄러운 월프를 도발한 거지?
'일단 그 아이 기억해야겠어.'
전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가녀린 체구 등, 위협 하나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방심할 순 없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라.’
그동안 아버지, 아니 과거 황제였던 그의 곁에서 끝없이 행해졌던 암투를 직접 지켜보며 몸소 배운 점 중 하나였다.
눈빛도 일반적인 신입생의 눈빛이 아니었기도 했고.
보통의 생도들은 과거 황녀였던 자신의 신분을 의식해 눈 하나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으나, 예나는 달랐다.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었을뿐더러, 꼿꼿이 세우며 나를 응시했으니 절대 일반적인 평민이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리라.
‘조심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데에 한눈팔 여유는 없잖아? 최대한 변수를 제어해야지.
리나는 험난하리라 예상되는 앞날을 상상하며 입술을 앙 다물었다.
황가의 유일한 각성자로서 가문의 재건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도맡은 채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기에 티끌같은 위화감 하나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게 곧 계획의 성공 여부와 직결될 수 있으니.
“아무튼 그런 이상한 얘가 나타나면 나한테 바로 말해.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나만 믿어, 하하.”
리나는 자만에 가득 찬 월프의 대답을 듣곤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지만 우선 벗어나고 싶었다, 보기 싫은 월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니.
눈치 하나 없는 월프는,
“이제 숙소 안내한다고 하는데? 그럼 자주 못 보겠네.”
밀당의 일환이라 착각하며 리나를 귀엽게 여길 뿐이었다.
* * *
숙소 열쇠를 받자마자 빠르게 건물을 올랐다.
뚜벅─ 뚜벅─
너저분한 쓰레기 하나 없는 청결한 복도.
반짝 광이 나는 바닥의 대리석.
근대 수준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국가에서 관리해서 그런지 건물이 청결함을 유지했다.
“꽤 좋네.”
예상대로 내부도 괜찮았다.
복도에서 보았듯 깨끗함은 물론이거니와, 제국 전통 양식으로 제조되어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다양한 목제 가구들과 고급스러운 실크 소재의 커튼이 맞이했다.
비록 기숙사 배치 전까지 임시로 있는 곳뿐임에도 만족스러웠다.
난 전등이 놓인 서랍에 정모를 벗어 내려놓았다. 몸에 걸친 코트는 주변 옷걸이에 걸었다.
풀썩!
그리곤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흑빛의 머릿결이 매트리스 위에 부채꼴로 펼쳐졌다.
편안하다…….
난 피곤함에 절은 근육을 손으로 풀며 두 눈을 감았다. 몸이 허약해짐에 따라 벌써부터 체력이 바닥을 쳤다.
“최대한 계획적으로 움직여야겠지.”
부드러운 모피 이불을 껴안아 온몸을 감싸며 읊조렸다.
합중국과 브리튼을 시작으로 자신이 밟고 있는 영토의 주인인 연방까지, 저들 모두가 제국의 잠재적 적국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였다.
그럼 미리미리 작전을 수립해놔야지.
“읏차.”
난 상체를 일으켜 바로 옆에 있던 개인 책상으로 향했다.
스륵, 스르륵─
수납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머리끈으로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어 정리하며, 탁상 앞에 몸을 앉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정리해보기 위해서.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나만의 특권이자 막강한 권력이다. 곧 발생할 여러 정치적 및 군사적 사건을 알맞게 이용한다면, 갖은 이익을 챙기는 건 당연지사였다.
따라 시간순에 따라 국내외에서 발생할 큼지막한 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앞날을 대비할 예정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펜 없나?
얼떨결에 수납장에서 종이는 찾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필기구가 보이지 않았다.
“게임 시작 시에 기본으로 주는 만년필이 있을 텐데.”
코트 주머니에 있으려나?
난 과거 기억을 더듬으며 코트 하단의 주머니로 손을 옮겼다.
“음?”
그리고 손가락에 치이는 이물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주머니에 무언가가 들어있던 건 정답이었다.
하지만 그 물체가 한 가지가 아닌 이물감이었다. 만년필로 추정되는 기다란 물체 하나와 넓적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난 머리를 갸우뚱하며 그 미상의 물건들을 빼냈다.
“…….”
그리고 그것들의 정체에 경악을 금치 못해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뭐냐는 말인가.
길었던 무언가는 만년필이 맞았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딸려 나온 한 가지는 내게 거대한 충격을 선사했다. 보통 어떤 일에 잘 놀라지 않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될 당신을 위해]
멋들어진 글씨체로 제목이 쓰여 있는 편지지가 있었으니까.
그것도 제국어가 아닌 한글,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단어의 조합들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