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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그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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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 의해 살아 숨쉬고, 국민에 의해 기개를 핀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마땅히 선언하겠소. 국가를 좀먹는 악의 무리를 뿌리 뽑으리라고!』
한 남성의 짤막한 외침은 세계를 암흑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이처럼 ‘세계가 개벽했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광경이 어디 있을까.
광기는 학교에 가 지식을 습득해야 할 아이에겐 총탄을, 파릇파릇한 연애나 산뜻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청년에겐 목숨을 짊어지도록 종용했다.
산짐승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갔을 숲과 들판은 새빨간 액체와 매캐한 화약 냄새로 점철되었다.
「씨, 씨발 죽어!」
「끄아아악!」
더 이상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 더러운 파쇼들의 궁둥짝을 한 대 쳐주도록 해라!」
「우라──!」
세상을 전장에 내몬 대전쟁은 그저 광기의 도가니만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전쟁이란 없는 법 아니겠는가? 개전이 있다면 그것을 끝맺는 종전 또한 필연적일 따름,
“드디어 도착했나.”
난 마침내 다다른 목적지를 내다보며 살가운 미소를 띠었다.
여기가…….
[모스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연방 수도구나.
몇 걸음을 더 다가서자 안내 표지판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 뒤로는 환영 문구가 거짓이 아니라는 듯, 한 국가의 수도라는 위상에 걸맞게 수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폐허 그 자체군.
폭격을 얼마나 많이 맞은 건지, 건축물 대부분이 철근만 앙상히 남긴 채였지만 말이다.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강대국의 수도라기엔 처참한 광경이야. 난 가죽 장갑을 꽉 옭아매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연방의 대도시가 이런 꼴이라니.
반으로 찢긴 전차나 머리를 처박은 채 불타는 전투기는 약과요, 마침 지금 시기가 겨울이었기에 연방군 시체 수만구가 땅바닥과 함께 얼어붙어 있었다.
과거 수많은 인파와 밝은 등불과 함께 줄지어있던 상점가는 더는 보이지 없었다.
「지옥」
그저 위의 명칭에 걸맞은 모습만이 펼쳐져 있었다.
「드, 드디어 끝난 거야?」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갈 수 있다고!」
그렇기에 제국군은 환호했다.
연방의 국민 입장에선 이 잔악무도한 광경이 끔찍하게 다가올진 몰라도, 제국군에겐 그저 종전을 알리는 장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와, 와아아! 제국 만세!」
「대전쟁이 끝났다!」
「씨, 씨발! 드디어 빌어먹을 난장판이 막을 내렸어!」
희열에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이, 허탈함과 허무함에 벽에 기대어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이, 지금껏 참았던 서러움을 터뜨리며 엎드리는 이 등.
수 만 명의 제국군은 각각 다른 반응을 내보이며 자신만의 감정을 표출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하아…….”
한숨을 쉬자 몸속에서 강렬하게 요동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싶었다. 살인적인 추위가 느껴져야 할 겨울임에도 흥분감에 온몸이 뜨거웠다.
대전쟁의 굴레를 끊음과 동시에 온갖 고생에 대해 보상받는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던 거구나.
“하, 하하하!”
난 바닥에 짙게 쌓인 눈들을 움켜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즐겁다!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이었다. 제국에 비해 영토가 수십 배는 넓은 게 연방이었는지라 미친 듯이 싸워 점령해야만 했고, 개미떼같은 연방군을 처치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지금, 이 순간에 와서야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감도는 희열을 누가 알 수나 있을까. 난 움켜쥔 눈덩이를 허공에 흩뿌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하, 꽤 기분 좋은가 보군?”
불현듯 중년의 남성이 찾아오기 전까지.
“아, 오셨습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중저음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친근한 말투, 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곧바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후, 자세를 갖춰 경례했다.
“사령관님.”
이번 대전쟁 승리의 주역 중 하나이자 모스코 수도 공방전을 주도했다고 봐도 좋을 데리안 사령관이었다.
[기갑 운용의 천재]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이러한 수식언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그저 그런 아부성 어투가 아니었다. 데리안의 기갑 운용 전술은 정말 시대를 앞서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령관이라는 고위 직책까지 역임하지.
되려 데리안과 친근하게 소통하는 내가 특별한 거다.
“자네 덕분에 이길 수 있었네.”
“전부 사령관님의 획기적인 기갑 운용술 덕분 아니겠습니까.”
“크흐흐, 입바른 소리라도 기분이 좋군.”
어느 누가 사령관과 최소한의 격식만 차리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나도 대전쟁 중에 만만찮은 공적을 쌓아왔음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서기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장 뒤편에 가보니 시체가 놓여있더군."
“놈에게 적합한 최후군요.”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난 왠지 모를 흐뭇함으로 데리안을 응시하며 농담 섞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국신문 기자 어딨어!」
「 여, 여기 있습니다!」
「빨리 사령관님과 마도 중대 지휘관, 저 두 분이 만나는 장면 찍게! 승전을 장식하는 사진으로!」
「예, 예!」
찰칵! 찰카악─!
추후 프로파간다 자료로 활용이 될는지, 의도치 않은 카메라 셔터 세례도 함께했다.
「빨리빨리 움직이도록!」
「부상자는 여기로 집결해라!」
후위로 쭉 늘어선 장교단을 시작으로, 혹시 모를 연방군의 습격에 대비해 건물마다 배치된 제국군까지.
사람 하나는 참 많네.
시체와 망가진 군용기기로 난장판이 된 거리를 거닐며 읊조렸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눈에 채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전부 생김새가 달랐다.
옷차림도 다양했다.
「사령관님이시다!」
「마, 마도 장교 지휘관님도 있어.」
「일동 차렷하고 경례!」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행복’이라는 동일한 감정이 나타나 있었다.
때문인지 그런 밝은 군인들의 표정에 더욱 산뜻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으직, 으지직─!
바람에 실려 날아온 매캐한 탄약 냄새가 가득한 전장 속, 바닥에 비산한 건물의 파편들과 치득거리는 핏자국을 지나…….
“여깁니까?”
"그래."
거대한 건물 앞으로.
“이게, 붉은 궁전이라네.”
“검은 궁전이라고 부르는 게 올바를 거 같은데 말입니다."
데리안은 손을 치켜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는, 연방의 상징이라 불렸던 붉은 궁전이 존재했다.
물론 연방의 상징 따위의 수식언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궁전은 이름에 맞지 않게 까맣게 전소된 지 오래였으니까.
안에 있었던 연방군은 전부 잿더미로 변했겠어.
파스스─
허리를 굽혀 두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자, 외벽에서 떨어져 나왔을 흑색 가루가 잔뜩 묻어나왔다.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자랑스럽군,
덕분에 이 공간을 지키는 제국군에게, 여태껏 전투를 지휘했던 장교들에 대한 정이 더더욱 깊어졌다.
건축물이 통째로 박살이 나고, 수십만에 달하는 연방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주위에 총탄이 빗발치고, 당장 전우들이 픽픽 쓰러지는 상황 속에서도 제국을 지킨다는 그 긍지! 승리를 쟁취하리란 강렬한 투지!
그 마음만으로 꿋꿋이 버텨냈다는 거 아닌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주는 군인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이 없기에, 속으로 그들을 향해서 고마움의 찬사를 보냈다.
“그럼 이쪽으로 오지.”
“예.”
이어서 드문드문 들리는 함성을 배경음악 삼아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
「오, 오신다.」
그리고 내가 까맣게 변해버린 궁전에 가까이 걸음을 옮길수록,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던 광장은 침묵에 찾아갔다.
‘조용하군.’
옷자락에 잔뜩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부턴가 장교며 지휘관이며 그 모두가 입을 꾹 다문 채 내 눈을 마주했다. 반짝이는 눈망울들이 마치 무언가를 원하는 듯 해보였다.
그리고 난, 그들이 어떤 걸 바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입구였던 곳이죠?"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마지막 일은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제국을 위해서 힘써줘서 고마웠네.”
데리안은 천이 묶인 가느다란 봉을 건넸다.
“영광입니다.”
그가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했기에 공손히 물건을 받아들였다.
국기(國?)
제국의 깃발이었다.
쉬이익─!
난 능숙하게 다음 할 일을 하기 위해, 어깨에 제국기를 들쳐메고는 땅을 박차 허공을 날았다.
찌잉!
발바닥을 감싼 마도 장교용 군화에선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이제 저기 위에 가면…….」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르면 날아오를수록 군인들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허나 그들이 이 위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쉬이익!
눈높이에 구름이 위치할 정도까지 다다라서야 궁전 꼭대기가 보였다.
폭격을 맞았음에도 다행히 옥상만큼은 온전했다, 그렇다는 건 깃발을 꽂기에도 안성맞춤이란 의미, 이 폐허의 광경을 진정으로 완성 시키는 데엔 여기가 제격이리라.
난 함께 들고 왔던 제국기를 움켜쥐었다.
푹!
그리곤 외벽이 뚫릴 정도의 강한 힘으로 박아넣었다.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연방의 항복을 완전히 받아냈습니다!]
그러자 축포음과 함께 알림창이 떠올랐다.
마침내 점령의 상징적 의미까지 연방 수도에 세워졌다. 이 폐허의 풍경을 장식하는 마지막 붓 터치까지 끝냈다.
「망할 전쟁이 끝났다고, 흐윽!」
「진짜, 끝난건가.」
전보다 우렁찬 외침에 이 드높은 곳에도 함성이 들려왔다.
지상으로 복귀하니 어느 한 군인은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마저 흘리고 있었다.
걸작이군.
감동적인 광경에 코가 찡해왔다.
이들의 손에 굳은 피딱지마저도 장미의 꽃잎만 같았다. 그저 프로그램의 상호 작용이겠지만, 괜스레 가슴이 아릴 정도의 아련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끝은 내야겠지.’
아쉽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었기에.
“시스템 종료.”
짧디짧은 발언을 끝으로,
지이잉─
순식간에 시야가 암전되었다.
수 초간의 시간이 흐르자 깜깜했던 눈앞이 점차 밝아졌다. 어느샌가 거리를 점령한 군인들과 깃발은 사라졌고, 익숙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횡으로 열리는 뚜껑 같은 생김새의 문, 난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푹신한 매트릭스와 복잡한 기계 장치가 공존하는 이건, 꽤 많은 돈을 주고 샀던 가상현실 기기였다.
“……물.”
목이 탔다, 갈증이 느껴졌다. 난 깨어나는 즉시 거실로 향했다.
“이제 이 게임도 끝났나.”
마침내 다다른 거실 속에서 읊조렸다.
허망함을 품은 눈빛으로 잔에 물을 따랐다.
꿀꺽─ 꿀꺽─
몸속을 감도는 청량감으로 애써 머리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자꾸만 드는 아쉬움은 지울 수 없었다.
아카데미 1945.
직전까지 플레이한 이 게임은 마법이 존재하는 20세기라든지 실제 역사를 모티브로 한 스토리 등의 다양한 매력들이 있었다.
심지어 클리어한 이가 아무도 없었기에 크나큰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지잉, 지이잉─!
덕분인지 무척 바빴다.
[○○신문 이한울 기자입니다. 취재 요……]
[△△언론사입니다. 한 번 집에 찾아……]
휴대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울리는 알림, 편지함에 급속도로 불어나는 메일 등, 클리어 소식을 알린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관심이 극에 달했다.
툭.
하지만 난 이 모든 메시지를 전부 무시하며 화면을 껐다.
먼저 메일을 보낸 건 나였음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벌써 나설 필요는 없으니.’
게임 평론가라는 직업으로 살아간 인생, 와중에 맺은 인맥들인 이 사람들이라면 내 실력을 알 터였다. 그렇기에 굳이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가치가 올라가면 올라가지, 내려가진 않을 테니까.
이미 검증된 실력과 인지도, 어차피 속이 타는 건 이들이었으니 애가 타든 어쩌든 알 바가 아니었다.
스윽, 슥
그저 하품하며 알림을 지울 뿐이었다.
그런 생각만을 품었다,
"음?"
위화감이 드는 주소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신 : Acadamy1945@zmail.com]
이건?
많고 많은 신문사 중 하나이리라 생각하며 넘기려 했었지만, 특별한 메일이 화면 가운데서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메일이 오는 건 처음인데.”
아니, 듣도보도 못했다. 아카데미 1945 제작사의 공식 주소에서 답장이 오는 게 가능한 거라고?
기업의 대표도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주의, 그 타이틀에 걸맞게 편지를 보내도 답변 하나 오지 않는 게 통상적인데,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여기 떡하니 있지 않은가?
최초 클리어 선물, 편지인가.
난 들고 있던 컵조차 내려놓고, 곧바로 내용을 확인했다.
제목 : 유저님의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아카데미 1945의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언제나 본 게임을 소중히 해주신 유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의미로 저희 개발사에서 소정의 상품을 준비했습니다. 첨부 파일을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당신에게 새로운 희열을 선사해드릴 수 있습니다]
길었지만, 순식간에 읽어버린 내용.
“하.”
그 장문에 대한 감상평은 외마디의 탄성이었다. 실제로 화면 최하단으로 스크롤을 내리니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신경이 쏠렸다.
희열이라.
길었던 글 중 유독 눈에 띄는 문구, 갑자기 이렇게 연락을 한 것도 모자라 얼토당토 없이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으나,
……확인해볼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동했다.
마치 제작사가 이번 작품을 갈고닦아 준비했다고 이야기하는 거 같지 않나?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송을 시작합니다]
난 망설임 없이 휴대폰과 가상현실 기기를 연결하여 파일을 내리받았다.
본판만큼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자그마한 소망을 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클리어로 인한 허무함을 이 개정판이 채워주길 바랬다, 거진 십 년에 한 번 나올 대작을 이렇게 떠나보내는 건 굉장히 아쉬웠다.
날 이렇게 즐겁게 해줬던 건 이번 작품이 처음이기도 하고.
여태까지 플레이했던 가상현실 게임은 둘 중 하나였다.
너무 쉽거나,
혹은 비현실적이거나.
하지만 아카데미 1945만큼은 달랐다.
이처럼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착각을 주는 감각은 처음 겪었으며, 스토리 또한 부실하지 않다 못해 실제 역사에 부족하지 않은 완벽한 서사를 안겨줬다.
게임을 클리어하고, 공략 영상을 기계적으로 촬영하여 언론사에 건넸던 지루한 삶을 벗어나게 해준,
“완벽한 작품이니.”
고대하게 되는 거지.
띠링!
[전송 완료]
드디어. 난 다운로드가 끝나자마자 기기 내부에 몸을 눕힌 후, 구석의 전원 버튼을 찾아 눌렀다.
[한 번 플레이하면 나오기 힘드시며 난이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암전되는 시야와 함께 그 빈 곳을 가득 채우는 반투명의 창.
‘그래.’
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부유하는 빛줄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끄, 끄으으…….”
얼마 안 가 메스꺼움이 동반된 두통이 몰려왔다. 평소보다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오류인가?
다행히 고통이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더 이상의 부작용은 없었고, 눈꺼풀 사이로 따스한 빛이 들어오며 주변이 선명해져 갔다.
마침내 시야를 되찾자 주위를 둘러봤다.
부르릉!
무엇 하나 없는 황야 속, 휘날리는 모래 먼지와 사람들을 태우고 거칠한 흙길을 달리는 트럭이 만연한 광경.
아카데미 1945의 오프닝 장면이었다.
‘딱히 변화는 없나.’
난 머리를 숙여 몸을 뒤덮는 옷을 살폈다.
검은색의 제복을 시작으로 독수리가 장식된 정모. 어깨에서 허리를 지나는 가죽끈과 허리에 감싼 벨트와 옷깃에 그려진 자그마한 작대기의 금장.
사관학교 제복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음?”
그나마 바뀐 게 있다면, 지금 내 움직이고 있는 이 신체 정도. 분명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 제복임에도 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작아졌어?
본래의 신체와 현저하게 차이 나는 크기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팔다리에 선명히 돋아났던 핏줄과 근육은 어디 가고 말랑한 살집이 인사했다.
“아, 아아─.”
목소리마저도 여려진 통상적인 여자의 음성으로 바뀌었고.
달라진 외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장발이 보였다.
흑요석처럼 어둡게 빛나는 머릿결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어깨를 뒤덮었으며, 일부는 목덜미를 넘어 무거워진 가슴에까지 내리 앉았다.
"쯧."
난 그 모습들을 보며 혀를 찼다.
어려워진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신체를 변화시켜 난이도를 상향시키는 거였어?
얼굴을 매만지자 손가락에 만져지는 올곧은 콧대나 눈꺼풀을 점멸할수록 느껴지는 가느다란 쌍꺼풀까지.
기존 주인공에서 아예 성별이 뒤바뀐 성싶었다.
‘그럼 이름도 바뀌었으려나.’
예상은 정확했다.
[예나 프로이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명찰, 정확히는 신원 파악을 위해 입학 첫날에만 사용할 이름표엔 이름만이 바뀌어 있었다, 기존의 설정인 프로이드라는 성은 그대로인 채.
확실히 기존의 몸이 아니라 다른 신체, 그것도 성별 자체가 달라 기이한 감각마저 드는 인물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조금은 애를 먹긴 하겠지.
그런데 변경점이 단지 이것뿐이라면 조금 실망스러운데?
이러면 게임의 게임 설정의 대한 변화는 없다는 거 아니겠는가. 이 정도로는 내게 즐거움을 안겨줄 수 없었다.
정말 이게 끝이라면 이미 한번 스토리의 끝을 본 나로서는 약간의 시간만이 소요되는 게 전부였다.
‘더 달라진 점이 있었으면 좋겠군.’
이젠 무거워진 상체마저 익숙해지는 찰나였기에 난 간절히 기도했다. 이 개정판이 제발 재미있기를.
리뷰어로서 삶을 살며 점차 무료해져 가는 인생에서 삶의 즐거움을 끌어내고 심장을 다시금 뛰게 했던 게 바로 이 아카데미 1945다.
그렇기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리뷰어가 아닌 플레이어로서 이 게임과 끈끈한 우정이 생겼다.
게임이 재밌기만 하다면 성별이 바뀌든 생김새가 바뀌든,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지루하지만 않았으면…….’
그저 이 기대감이 처참하게 박살 나 실망감으로 바뀌지만 않기를 염원했다.
"에으."
동시에 계속해서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재채기를 유발하는 이 머리카락은 어떻게든 묶던가, 자르든가 하기로 다짐했다.
『곧 있으면 도착이니 다들 짐 챙기도록!』
때마침 들려오는 경쾌한 음성에 머리를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함께 트럭에 탄 여러 사람, 아니 여러 생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곤 그 구령에 맞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슬슬 도착인가.
난 게임을 여러 차례 플레이했던 만큼 곧 맞닥뜨릴 상황을 짐작했다.
생도들이 입을 열었다는 건, 곧 사관학교에 도착한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것은 결국 아카데미 1945의 오프닝이 종료되었음을 뜻했다.
“진정 달리 바뀐 게 없는 건가…….”
끼익─
난 덜컹거리는 트럭의 벽면에 기대여 입술을 잘근 씹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여태껏 로그아웃하지 않았지만, 성별을 제외하고 눈에 띄는 변경점은 없었다. 적어도 오프닝 장면까지는 이전 버전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할 일부터 하는 게 우선이겠지.
적어도 오늘 인터뷰 하나는 마쳐야 했다. 지금이면 수십 통의 메일이 더 쌓였을 것이 분명하고, 대충 높은 보수를 제시하는 곳에 답장을 보내면 될 터,
난 가느다란 머리칼을 꼬아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시스템 종료.”
다시 반복했다.
“……시스템 종료.”
뭐지?
반응하지 않았다. 강제 종료 명령을 내렸을 텐데 알림음은 고사하고, 프로그램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휘이잉─!
오로지 이 황야를 지나는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로그아웃이 안 된다고?`
그제야 드는 위화감.
아까부터 귀를 간지럽히던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피부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 몸 안의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차량의 덜컹거림, 마지막으로 폐를 지나는 차가운 공기.
‘아니, 가능할 리가 없다.’
커지는 불안함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이따위의, 현실이라 생각될 법한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저놈 왜 이래? 」
「혼자서 이상한 말을 내뱉는데?」
생도들은 그런 내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그리고 난, 그들의 반응에 더욱 입술을 꽉 물었다.
‘뭔가 잘못됐어.’
게임 속 등장인물들이 로그아웃에 대해 이야기할 리가 없는데? 게임 외적인 시스템을 이용할 때 응하지 않도록 하는 건 기본 소양이라고.
그런데 이들은 수군거렸다.
심지어 같은 트럭에 타 있던 이들은 날 이상하다시피 쳐다보곤, 자리를 옮겨 거리를 벌리기까지 하였다.
‘아니, 이게……?’
온몸이 알싸한 감각에 휩싸였다.
피부엔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다 못해 축축해졌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난 가빠오는 숨과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상한선이 있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게임이었던 세상이, 갑자기 현실이 됐다는 걸 어떻게 믿어.
“도착이다! 다들 하차해라!”
그런 내 상태를 신경 쓸 리 없는 교관은 트럭을 멈춰 세웠다.
『예, 알겠습니다!』
생도들은 일사불란하게 땅으로 착지한 뒤, 정면에 있는 사관학교를 향해 움직였다.
덜컹!
난 입술을 짓이기면서도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아무리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죽치고 있을 순 없었으니까.
작아진 신체로 인해 내려오는 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트럭을 빠져나왔다.
[아스트라한 사관학교]
그렇게 몸을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서는 현대의 대학교만 한 수준의 거대한 부지가 맞이하고 있었다.
게임을 해봤다면 모를 수 없는 곳이었다.
눈앞의 건물이 바로 생도들을 마도 장교로 육성하고자 건립한 각성자 장교 사관학교이자, 게임의 모든 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설이었으니까.
물론 지금 그러한 설정 따위는 내 안중에 없었다.
`이게 현실이라고?`
믿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 들이닥친다면 머릿속이 백지가 된다는 게 사실이었던 걸까, 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땅바닥으로 머리를 숙였다.
"하하, 미치겠네."
언제나 한글로 번역되어 나타났던 사관학교의 팻말마저도 제국어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걸 내가 자연스럽게 읽고 있다.
“…….”
이젠 더 놀랄 힘도 없었다.
아니 얼이 빠졌다.
털썩─!
난 얼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평생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뭐냐는 말인가.
허탈함에 몰려오는 한숨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깜깜한 시야가 현재 내 정신 상태만 같았다.
"……."
잠깐의 침묵.
그 자세로 얼마나 있었을까, 바람마저 잦아들어 모래 알갱이가 군화를 스치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가 돼서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후우.”
전보다 침착해진 심정으로 심호흡했다.
‘진정하자.’
보통 사람이라면 패닉에 빠졌겠지만 수많은 게임으로 다져진 멘탈이 정신을 부여잡도록 도왔다.
애초에 기본적인 성격 자체가 냉철했기에 빠르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굳이 두려워해야만 하나?`
난 눈매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넘기며 천천히 입술을 곱씹었다.
‘오히려 이런 인생을 원했잖아?’
게임이 현실이 되었다, 목각 인형처럼 정해진 대로 삶을 살아갔던 현대에서 벗어난 거 아닌가?
내 머리가 뛰어나다 자신했다, 자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행복함을 얻기는 어려웠다. 현실에서는 마음껏 내가 원하는 바를 이륙하기란 제한적이었으니까.
그나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각종 게임들을 섭렵해나간 게 그래서였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가상 세계로 인생을 도피했다.
직전의 아카데미 1945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거잖아?
적들과의 전투와 정치인들과의 암적인 사투와 빗발치는 포탄의 전장, 그 모든 걸 생생히 경험하는 게 가능한 거잖아.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난 거잖아?
`……나쁘지 않아.`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성별이 달라진 점이 약간의 흠이지만, 내가 원하던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데 무슨 상관인가.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절망할 수준의 일까지는 아니었다.
스윽─
난 두 손을 펼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득했던 공포심이나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이 있기라도 한 건가.
이 세계로 날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이는 하나뿐이었다. 제작사 건넨 개정판을 플레이하자마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난 생도들의 말소리와 트럭의 배기음이 잦아들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본래의 무뚝뚝함을 되찾았다, 순식간에 감정을 냉철하게 다스리고는 조금씩 발을 움직였다.
뚜벅─ 뚜벅─
새하얀 피부를 밝히는 햇살을 맞으며 조금씩 사관학교 정문으로 이동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완벽하게 남들을 압도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리라.
어떻게 보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삶의 기회가 찾아온 거니, 이참에 이 인생을 후회 없이 보내봐야지.
‘일단 가볼까.’
그렇다면 사관생도 신입생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게 우선, 망설임 없이 사관학교의 교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아스트라한 사관학교
생도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