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내 잘못이야 3
* * *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
막내란 놈은 자기 마음대로 튀어나가서는 박 터지게 싸우고 있고, 그거 말려야 할 부사수는 가만히 주저앉아서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질 듯이 떨고 있고.
"이제 준비 됐냐?"
다행인 점은 조금씩 예림이의 눈빛에 결의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 손이 많이 가는 후배다.
그와 동시에 잠시 중지되었던 싸움이 재개될 조짐이 보였다. 성필이 저 놈도 기력을 차리고 다시 불꽃을 온몸에 두르고 있으니.
제발 이 전투가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아닌, 성공적인 체포 작전으로 끝나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리며 왼손 손가락 3개를 꺾었다.
뒤로 젖혀진 손가락은 그대로 3문의 총신이 되어 성필이를 겨누었다. 그리고 쏘아낸다.
통, 쇄액, 치익.
3박자만에 차갑게 장전 되어있던 쇠구슬이 뜨거움 한 줌 쇳물로 변해버렸다. 이것으로 확인했다. 저렇게 불꽃을 두른 채로는 답이 없다.
최대한 방열 성능이 우수한 소재로 곤봉을 만들어 쥔 후 혜은이에게 물었다.
"혜은아, 방금 했던 거 다시 할 수 있냐? 불꽃 싹 벗기는 거."
"아까는 어쩌다가 성공한 거지만……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
"3초 정도는 침묵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왜 꼬아서 말하는 걸까. 저 문장 말하는데 3초는 넘겼겠다.
아무튼 그 정도면 상처 없이 기절 시킬 수는 있겠는데, 그 다음이 문제다. 구속구를 채워 놔도 깨어나서 저렇게 인간 횃불이 되어버리면 끝인데.
"그, 완전히 너랑 똑같은 능력이냐? 그러면 뭐 능력을 빼앗거나 봉인하거나, 그런 거 못해?"
혹시 몰라 질문을 던졌다. 계약 능력은 워낙에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각성이란 그런 것이니까.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은 역시 실망스러운 대답으로 돌아왔다.
"땅으로 잡아 끌 수는 있어도 날개를 부러뜨릴 수는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알면서도 해봤다. 아직까지도 제대로 각성자의 능력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별 소득없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성필이는 가만히 숨을 씩씩거리며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자신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상대. 그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려니 제정신이 아닌 머리로도 셈이 맞지 않음을 직감한 듯 하다.
순간 냅다 도망가려는 것을 무릎을 내리쳐 저지했다. 그 한순간에 곤봉이 무르게 변하여 타격은 예상한 이상으로 약했다.
그럼에도 무릎같이 섬세한 부위는 망가뜨릴 수 있다. 기동력을 빼앗았다 판단하고 다시 물러나 상황을 보려 했다.
"끄륵, 컥."
충혈된 눈을 희번뜩 뜨면서 신음을 뱉어내더니 금세 망가진 무릎이 회복되었다.
"생긴 게 도깨비 같아서 그런가 재주도 많네."
당장 기억나는 것만 신체 강화에 약한 염동, 가속,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게 저기 저 불꽃에다가 재생 능력까지.
거기다 커트 실력도 괜찮았다.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재주 많고 싹싹한 동생이 생겼다며 주변에 꽤 자랑하고 다녔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을 썩이냐. 어?"
탄식을 내뱉으면서 다시 곤봉을 치켜 들었다.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계속해서 하체를 노리면서 움직임을 빼앗고 도망칠 수 없게 붙잡는다. 최악의 경우 사살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곤봉은 바스라지고 복구되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터지듯 박살나는 무기를 휘두르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짧은 스텝을 연속으로 밟아 측면을 차지했을 때, 곤봉이 깨져 나간 파편이 하필 눈으로 날아왔다. 아주 잠깐, 눈을 깜빡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혜은이가 불꽃을 벗겨내 텅 비어버린 복부를 내 발이 걷어찼다.
"타이밍 좋았다."
짧게 혜은이를 칭찬하고 성필이의 사태를 확인했다. 붕 떠서 날아간 몸뚱이가 이리저리 구르더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도 않았다. 기절한 것이다.
순간 손이 굳었지만 이를 악물고 파우치를 열어 주사기를 꺼냈다. 이것만 목덜미에 박아 넣으면 그것으로 체포 작전은 끝이 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끝이라는 말은 이름 뿐, 여러 불쾌한 단어들은 정지신호를 무시한 채 계속해서 쓰여질 것이다.
치명적 부작용, 후유증, 중독과 금단 증상. 미래를 앗아가는 단어들.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이 일의 끝이 아름다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다시 한번 움직이며 각오를 다졌다. 알고 지낸 시간은 짧으나 정든 동생에게 불행을 안겨다 줄 각오.
마지막 한 발짝을 앞두고 있던 그 순간, 차가운 공기가 피부 위로 미끄러졌다.
"뭐하냐. 예림아."
냉기의 정수가 담긴 바람은 그대로 얼음 뭉치가 되어 성필이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고 이내 지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그의 몸을 묶어 두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간 벌이 밖에 되지 않는 일이다.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얼음은 쉽사리 녹아버릴 것이니, 약을 투여하여 호송팀이 올 때까지 깊은 수면에 빠트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림이도 분명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선배."
하지만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투명하고 밝은 목소리에 저절로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방법이 있어요."
예림이의 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흔들리는 것은 나였다.
해야 할 일이라면 단호하고 빠르게, 더 아프기 전에 끝마치고자 했던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방법?"
생각보다 먼저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에 못지 않은 속도로 대답이 돌아왔다.
예림이의 대답이 뇌리에 스며드는 동시에 울컥 울분이 터져나왔다.
"지금 그런 이야기 하려고 붙잡았냐?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지금 여기서 불가능한 방법을 입에 담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의미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덕분에 속이 아주 터질 것 같으니까.
하지만 예림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단언했다.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뒤에 몇 개의 단어를 덧붙인다.
작은 동요로 시작했던 떨림이 심장을 떨어트릴 듯이 커지기 시작했다.
"네가, 예림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프로젝트 극초반에 예림이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커넥션은 진작에 파악한 지 오래였다. 애초에 그 내용은 극비리에 교묘히 위장되어 추측 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전부 말해줄게요. 전부."
예림이는 그저 아쉽다는 듯, 후련하다는 듯이 조용히 웃었다.
"그때 믿어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한 자루의 검을 넘겼다. 반사적으로 받아 들여다보자 그 특이하고 효율적인 구조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혜가 만드는 물건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검. 질문하는 것보다 깨닫는 것이 더 빨랐다.
"이게 너한테 왜 있냐. 헤비박스 쪽 양식이잖아."
"맞아요. 그래서 공명 발현 장치도 내장되어 있고요."
뻔뻔한 대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내용은 아닌데. 얘가 미쳤지.
허, 하고 헛웃음과 함께 토해낸 공기에 속이 한결 후련해졌다.
"몇 분 만들어줄 건데?"
"필요한 만큼요."
그동안 벌어줬던 시간 지금 갚아야죠, 그렇게 말하는 예림이의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흘러나왔다. 얘가 농담도 할 줄 알았나.
주변이 조금씩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얼음에 파묻히다시피 한 성필이 내뿜는 보라색 빛이 눈꽃 결정에 여기저기 산란하여 넓게 퍼져간다.
얼음이 녹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폭발하듯 불꽃이 높이 치솟음과 동시에 두 명의 후배가 달려갔다.
불꽃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혜은이 전담하여 정면을 마크한다. 주먹에 망설임이 사라진다. 땅을 딛는 발이 더욱 거침없다.
당연한 일이다. 믿음직한 그녀의 선배가 등 뒤를 지켜주니까.
강력한 열기에도 견딜 수 있도록 극한의 냉기로 벼려진 투창. 광인의 빈틈도, 후배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정확히 쏘아낸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움직임에는 거치적거리는 부분이 없었다.
이 정도면 문제 없을 것이다. 중간에 지치지만 않는다면 충분하다.
"체력 분배 잘 해라!"
상황을 충분히 살폈다는 판단 하에 작업에 들어갔다. 나머지는 믿고 맡겨야 했다.
우선 망설임 없이 예림이의 검을 부러뜨렸다. 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상적으로는 분해가 되지 않는 안쪽에 숨겨진 공명 장치, 그것을 분리하여 손질한다.
팔꿈치를 조작하여 소켓을 개방했다. 결합부를 억지로 뜯어 고쳐 장치를 연결하고 강제로 기동하니 호환되지 않는 규격에 회로가 비명을 지른다.
"혜은아!"
순간 들려오는 비명에 주의가 흐트러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날려간 혜은이가 겨우 자세를 바로 잡고 있고 예림이 혼자 창을 던지며 성필이를 견제하고 있었다.
일의 전말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예림이가 던진 창이 기묘한 궤도를 그리며 빗나가 벽에 박히는 모습, 거센 기류의 떨림과 거기에 휩쓸려 굴러다니는 먼지가 능력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날카롭지는 못하지만 폭풍처럼 거세기 짝이 없는 바람의 흐름. 민하가 사용하는 능력의 투박한 버전이었다.
전세가 뒤집혔지만 예림이는 도리어 한걸음 다가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비장한 목소리는 괜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걱정하던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
"누가 걱정한대?"
그 단호한 각오에 그냥 짧게 대꾸했다. 이제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으니까.
곧이어 바람의 결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듯한 돌풍은 가라앉고, 주변을 감싸는 잔잔하지만 묵직한 바람.
"빨리도 왔다."
"제가 좀 빠르긴 하죠."
주변 기류의 통제권을 빼앗은 것은 바람에 불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어떻게든 수습하며 등장한 지각생이었다.
"죽이지 말고,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두기만 해. 할 수 있지?"
"알아요. 저도 아는 사람 다치게 만들기 싫으니까 걱정 마세요."
민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더니 예림이 옆에 서더니 슬쩍 단검을 뽑아들었다.
"적당히 망치처럼, 부탁 드려도 되죠?"
예림이는 대답 없이 손을 뻗어 단검의 날에 손을 댔다. 쩌저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끝에 주먹 만한 추가 붙은 팔뚝 길이의 얼음 망치가 완성되었다.
민하는 느닷없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예림이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 있었죠? 이거 끝나고 말해주세요. 그럴 수 있죠?"
결국 민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주변 바람을 다룰 수 없음에 당황하던 성필이 결국 다시 육탄전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주먹과 무기, 능력과 능력이 교차한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후배들에게 맡겨두어도 될 테니까.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이 볼썽사나운 싸움의 결말을 지을 열쇠였다.
잠시 정지되었던 회로를 재가동한다. 중간에 멈춘 탓에 일시적으로 마비된 방열판을 강제로 손으로 열어 놓고 짧게 여유가 생긴 연산 장치에 또 한번 작업을 강요하며 내부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는 설계안의 원형, 오리지널을 불러온다. 완벽을 목전에 두고 있는 높은 완성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수정하고 덮어 씌운다. 일부 기능은 폐기하고 결점은 극대화 시키며 한 가지 기능 만을 위해 전체적인 조형을 뒤튼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자원을 체크하고, 확신했다.
"2초만 묶어."
내 말을 신호로 혜은이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남은 체력을 모조리 쏟아붓겠다는 듯이 몰아붙이는 연격. 거기에 뒤따르는 민하와 예림이의 보조가 날아온다. 치명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단순한 공격들의 연속.
하지만 단순한 반복이 정신없이 몰아닥칠 때, 사람의 생각과 반응은 단순하게 변한다.
막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단순히 시야에 닿는 모든 공격을 일일이 막아내면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제 자리에 서 있는 지금.
잡는다.
첫 발동은 예림이에게서 받은 공명 장치. 헤비박스의 전유물.
각성자의 능력 발동 범위를 넓혀주는 이 물건은 능력의 작용점이 아닌 발동 구역 자체를 확장시킨다. 따라서 붙잡거나 맞잡지 않아도 내 능력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다.
성필이의 발밑에서 검은 입자가 타고 올라가 온몸을 뒤덮는다.
잠시 후, 한 벌의 슈트가 완성된다. 머리까지 뒤덮은 슈트에 시야가 가려진 성필이는 자신의 몸을 마구잡이로 두드리고 쥐어뜯으며 어떻게 해서든 피부를 뒤덮은 이물질을 떼어내려 애쓴다.
소용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기능만을 구현했을 뿐이지만, 실전 투입 단계 직전에 들어선 슈트의 방어력은 각성자가 맨손으로 두드려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은 슈트의 핵심 기능.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도달점.
천성적으로 약한 능력을 타고난 각성자도 헌터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보조 강화 슈트. 그 진가는 순식간에 착용자의 능력을 해석하고 증폭할 수 있는 고성능의 연산, 구현 기능에 있었다.
그리고 그 기능은 조금 뒤틀어주기만 해도 쉽사리 그 반대 목적으로 작용한다.
자기 몸을 두드리던 성필이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손을 마구 내저으면서 무언가를 했다.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휘젓고 버둥거렸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실시간으로 슈트는 능력이 발동하는 것을 파악하여 역으로 작용 시키고 있었다. 바람도, 불꽃도, 외부에서 작용하는 모든 능력들은 실시간으로 상쇄되고 있었다.
마지막은 VP전류파. 전류 충격으로 일순간에 의식을 꺼트리는 대인 제압 장비.
이전에 병원에서 성필이 소란을 피웠을 때에도 이것을 사용했다. 이 물건이 아니었다면 성필이는 더 큰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갔을 터였다.
하지만 차라리 그랬다면 살인범이 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내가 성필이의 상태를 살폈어야 했다. 내가 챙겨주는 일에 취하여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후회나 반성 같은 게 아니라, 적어도 이 모든 사태가 최대한 평화적으로 끝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외부가 아닌 내부를 향해, 번개가 쏘아진다. 처음부터 구속복이자, 감옥이자, 죄수복으로 만든 슈트. 착용자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슈트.
"성필아."
팔다리를 파들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져 쓰러진 성필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가서 조사 받고 형량 받고…… 유족들한테 사과하러 가자. 그리고 치료도 받고, 다음부터 이런 일 안 생기게 진단도 받고."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삶은 이어질 것이다.
삶은 보다 고달파질 것이고 스스로가 더욱 증오스러울 것이다. 때로는 원망을 세상에 돌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고 죄책감에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인생이 망가졌다고 좌절하는 순간은 필연처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누구 한 명은 옆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누구 한 명이 되고 싶었다. 성필이의, 그리고 후배들의, 주변 사람들의 누구 한 명.
손아귀에서 흘러내린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자기 꿈에 좌절한 친구도 있고 괴물에게 죽어나간 동료들도 있다. 바로 얼마 전에 잃은 것처럼 3년 전에도 잃었고 5년 전에도 잃어왔다. 그래서 떨어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놓아버리지는 않기로 했다. 지나간 일도, 다가올 일도 모두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일부분이었으니까.
저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