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내 잘못이야 2
* * *
천재라는 말은 편리한 가면이었다.
모두가 김성필을 천재라고 불렀다. 수많은 능력을, 그것도 희귀하고 쓸모 있는 능력만을 골라 잡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런 능력을 어른에 못지 않은 위력으로 사용하는 것도, 모두 그가 가진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한 단어로 정리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천성이다. 기적, 축복, 천재, 신화라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정리한다. 그 덕분이었다. 김성필이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진짜 능력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머리카락을 먹으면 그 원래 주인의 능력을 손에 넣는다. 계속 먹으면 더욱 강해지며, 동시에 여러 종류를 먹는다고 해서 아무런 제약이 없다.
김성필은 각성과 함께 손에 넣은 그 능력을 철저히 숨겼다. 다른 사람들이 그 능력을 불쾌하다 여길까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천재라는 평판이 내심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나날이 성장해갔다. 필요한 능력을 선별하고 집중적으로 강화시켰다. 몸에 부담이 가지 않고 주변의 의심을 사지 않을 임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켜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를 칭송하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존엄한 위치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룰 것이라고. 빛나는 세월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씨는 언젠가 꺼지기 마련이다.
흘러 들어오는 것은 힘 뿐만이 아니었다. 기억, 감정, 영혼과 닮은 어떤 것들.
김성필의 수확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졌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는 강하고 화려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힘을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존재했던 공통 분모가 조금씩 그의 정신을 잠식해나갔다.
그리고 쌓인 눈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김성필의 의지는 꺾이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김성필은 평범한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높은 지위, 화려한 인기, 막대한 재산, 그런 것들은 아무리 값비쌀지언정 접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화려한 접시에 담긴 삶이라는 본질은 항상 목 마르며 애달프고 부끄러웠다.
강한 헌터일수록,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속으로는 평범한 삶에 동경을 품고 있었다. 제각기 삶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 마음의 형태는 비슷했다. 이윽고 그 동경심은 조금씩 소년의 마음을 물들여갔다.
그때부터 재능이라는 말은 덫이 되었다. 김성필은 자신이 세워둔 천재라는 신전에서 좀처럼 탈출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김성필을 위대한 궤적에 올려 태양처럼 소비하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김성필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온 힘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행동으로.
그에게 머리카락은 더 이상 일용할 양식이 아닌 가능성을 품은 평원이었다. 김성필은 멧돼지처럼 잡초를 파 먹는 대신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기를 원했다.
많은 고난이 있었다. 헤어 디자이너를 꿈꿨기 때문에 계속 능력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분노로 변질된 질투심이 쏟아지고 찬사는 비난으로 탈바꿈했다. 정기적으로 머리카락을 먹지 않으면 몸이 붕괴해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미치광이의 머리카락을 잘못 먹어 정신이 진창처럼 망가졌다.
작은 행운도 있었다. 그 행운은 큰 인연으로 이어지고, 당황스러울 정도의 호의와 친절로 이어졌다. 그는 기뻤다. 동시에 감사했다. 그가 받은 것이 단순한 기회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였기 때문에.
어느 날 은인은 자신의 후배라면서 두 명의 여자를 데려왔다. 김성필은 기쁜 마음으로 둘의 머리를 다듬었다. 일찍이 느껴본 적 없는 보람찬 작업이었다.
은인과 일행을 떠나보낸 후 그는 갈증을 느꼈다. 으레 있는 일이라며 익숙하게 손님들이 남기고 간 머리카락을 뒤적거렸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몸을 달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줌을 집어 입안에 넣고 잠시 우물거린 후 삼킨다.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려 일말의 거부감도 일지 않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뜨거운 통증이 온몸을 달렸다.
얼얼한 열기가 머리를 가득 채운다. 나누지 못하니 언어가 아니나 이해할 수 있기에 언어가 될 수 있는 문장이 머리에 새겨졌다.
[언제나 항상 너답게 행동하라. 너 자신에 맞게. 스스로를 증명하라.]
알 수 없는 명령에 반문을 할 틈도 없이, 내면의 아우성이 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가 삼켰던 수많은 감정의 편린들이 제각기 들고 일어나 아우성 쳤다. 그러겠노라고, 명령에 따르겠노라고.
그 속에서 김성필은 끝없이 쪼개지고 빻아지며 나눠지고.
그렇게 작별했다.
*
"설명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서혜은은 짧게 중얼거린 후 주먹을 내뻗었다. 불꽃을 두른 정권은 김성필의 몸을 둘러싼 화염은 단지 흉내일 뿐이라는 듯 가볍게 흩어버렸다.
주먹이 호쾌한 궤적을 그리자 김성필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짐승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기가 죽어 있었다. 온몸을 둘러싼 불꽃의 기세도 어딘가 약해져 있었다.
왜 혜은 씨가 여기에, 김예림이 물을 틈도 없이 통신기가 켜졌다.
예림아! 혜은이 설마 거기 있냐?
통신기 너머 윤현수의 다급한 질문에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것은 서혜은이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왜!
절규하는 듯한 질문에도 서혜은의 주먹과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적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운명이 저를 이곳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니! 개소리 하지 말고! 예림아. 얘 언제부터 있었냐? 아니, 아니다. 기다려라. 가면 죽는다. 가면, 간다 지금. 가고 있다. 기다려라.
숨에 벅찬 듯 윤현수의 목소리는 점점 알아들을 수 없는 헐떡임으로 변했지만 서혜은은 이미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림 씨."
서혜은은 당장이라도 주먹과 발을 내지를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킨 채로 말했다.
"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일어나주세요."
"전……."
짧은 웅얼거림은 변명이 되기도 전에 가로 막혔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책임을 지세요."
책임. 그 두 글자가 무겁다. 서혜은은 그런 김예림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헌터란 모습은 저런 것이라고, 예림 씨의 모습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그 책임을 지십시요."
그 말을 끝으로 서혜은은 땅을 박찼다.
말릴 틈도 없이 주먹과 발이 사정 없이 교차한다.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 왜 상대가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쓰는지도 관심 없었다. 다만 그녀의 선배가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에 최선이라 생각하는 행동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김예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의 행동들이 너를 여기까지 이끌었듯이 어쩌면 네가 저 사람을 망가뜨렸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 말은 책임 전가에 불과했다.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다. 김예림은 회귀자였으니까 당연히 알아야 했고, 막아야 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했다.
극독처럼 치명적인 색의 불꽃이 이리저리 뒤엉켜 싸우는 모습은 그녀 자신의 행동의 결과였다.
"미안해요."
일어나서 검을 쥐고 달려간다는, 수백번 수천번 반복한 일이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졌다. 발을 디디는 순간 땅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무심코 내뱉은 숨에 하늘이 깨져나갈 것 같았다.
"전부 제가, 저 때문에, 저는, 저 아니었으면."
분명히 하자. 막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원인이었다. 그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김예림은 끊임없이 그 사실을 되새기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었다.
예림아.
아직 꺼지지 않은 통신기 너머로 윤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불행들을 막을 수는 없다. 원래 헌터가 그런 거잖아. 무슨 일 막는 게 아니라 터지고 나서 처리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그러니까 일일이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아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수 있는 거 하는 거니까. 할 수 있으면 일단 전부 해보는 거지 할 수 없는 거까지 욕심 내다보면 금방 망가져.
그렇지 않다. 그녀는 뭐든 할 수 있어야 했다. 무한한 기회가 있었으니까. 거기서 얻은 것이 있었으니까.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반적인 말은 김예림처럼 예외적인 존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런 말에서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듣기 싫지? 나도 그래.
하지만 사실, 그것은 윤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이런 말들 듣는다고 뭐가 편해지냐. 그냥 그래.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안 되나 봐. 이런 말 백날 들어봤자 속으로는 '아닌데?', '그래도 나는' 같은 생각이나 들지.
모든 일에 책임감을 느끼지 말라고, 몇번을 되뇌여도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윤현수는 잠시 무언가를 추스리듯이 침묵하더니 뒤이어 말했다.
책임감 느낄 필요 없다고 생각해봤자 소용은 없고…… 그럴 거면 분명히 하자. 뭘 책임질 건지, 어떻게 책임질 건지.
또다시 서로의 불꽃이 교차하며 상대방을 덮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화염은 서로를 해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전투는 육탄전으로 넘어갔다. 서혜은이 그동안 단련한 권각술이 빛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했다.
가속 능력, 신체 강화, 전열을 담당하는 헌터들이 모두들 꿈꾸는 갖가지 강력한 능력들.
그것이 김성필의 팔다리를 흉기로 만들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책임져야 할 게 이미 저질러 버린 과오냐?
서혜은으로서는 맨손으로 곰을 상대하는 꼴이었다.
한걸음씩 뒤로 물러나면서, 조금씩 타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옆에 있는 동료들 목숨이냐?
삐걱이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구겨진 폐로 호흡하면서도 서혜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 그녀는 기회를 받았다. 물러날 줄 모르는 남자의 등이 그녀의 앞을 지켰다. 굳은 눈빛의 여인이 그녀의 앞길을 이끌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혜은은 검은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동료들이 준비될 때까지.
김성필이 피워내던 불꽃을, 전부 포용했다.
서혜은이 뻗어낸 장악력이 남자의 불꽃을 탈취했고 쉽사리 섞여버린 두 줄기 화염이 한 떨기 검은 장미를 피워냈다.
되돌릴 수도 없는 일 가지고 책임지겠다고 끙끙거리고 있는 거면, 당장 집어치우고.
"일어나."
김성필의 몸이 무방비해진 순간, 윤현수의 철권이 작렬했다.
폭주하며 맷집이 더욱 강건해진 듯, 김성필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 대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엉망이 된 몰골로 도착한 윤현수는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서혜은을 찾았다.
만신창이가 된 서혜은이 검은 불꽃을 허공에 흩어버리며 멋쩍게 웃었다.
"잘 버텼다."
그래도 나중에 혼날 줄 알아라, 그렇게 덧붙이면서 윤현수의 시선은 김예림에게 돌아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위로의 말과 함께 손을 내미는 대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뭘 잘못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당장 일어나. 다 끝난 것처럼 굴지 말고."
그 사이에 타격에서 회복한 김성필이 다시 온몸을 보라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중간을 조져먹었으면 마무리라도 잘 해야지."
그렇게 말한 윤현수는 결국 답답하다는 듯 손을 뻗어 못난 후배를 직접 잡아 일으켜 세웠다.
후배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마땅한 의무라는 듯이.
"마무리……."
김예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어 손에 남은 온기를 되새겼다.
그녀의 행동이 김성필의 폭주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가 아니다. 결과란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김예림의 시선이 드디어 주변을 향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자세를 바로 잡고 있는 서혜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녀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윤현수.
그들 또한, 그들이 이렇게 함께 있는 모습 또한 그녀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원래라면 무기를 맞대어야 할 그들이 어깨를 맞대고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김예림은 마침내 결심을 마치고 검을 뽑았다.
더 이상의 좌절도, 비밀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