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내 잘못이야 1
* * *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임시대응반 팀장 고태식의 첫 마디였다. 그 직함만큼이나 무겁고 굵은 목소리였다.
실버볼은 철저한 위계 구조를 갖춘 조직이면서, 동시에 여러 이변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 즉각적으로 새로운 팀을 편성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팀을 통솔하기 위해서 오랜 경험과 실적을 쌓아온 베테랑이 차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런 일로 찾아뵈어 유감이네요."
그 말은 곧 어느 정도 면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괜찮습니다."
고태식은 기억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뚝뚝하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먼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되도록 상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는 나와 혜은이, 민하가 함께 성필이의 실습 모델을 위해 그의 헤어샵에 갔던 날이었다고.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났고, 언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민하와 혜은이를 차에 태운 것은 언제인지. 점심을 먹은 후 그의 헤어샵을 찾았던 것이 몇 시였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그리고 저는 거기서 그대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얘들 머리 끝나자마자 일어났습니다. 그대로 저희들은 저녁 먹으러 가고, 성필이가 뒷정리를 한다면서 헤어샵에 남았고요."
그렇게 우리가 나가고 약 2시간 뒤, 김성필은 인근 골목에서 지나가던 행인을 습격했다.
피해자와의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무관계한 타인으로 추정된다. 대로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김성필이 피해자에게 달려들었고, 피해자는 그를 피해 도망치며 골목길로 향했다. 첫 습격과 도주하는 모습은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골목길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살해 수법이 참혹하고 잔인했다는 것이다. 김성필은 쓰러진 피해자 위에 올라타 피해자를 마구잡이로 내리친 것으로 보인다.
범행에 도구가 확인된 흔적은 없었다. 살해는 순전히 맨주먹과 능력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 뒤에 일어난 일도 맨손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머릿가죽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입이 다물어졌다. 불쾌하며, 동시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잔학 행위였다.
다음으로 민하까지 간단한 교차 심문을 마친 후 대화 구도는 뒤집어져 우리가 설명을 들을 차례가 되었다.
고태식은 굵고 낮은 목소리로 수사 상황에 대해 브리핑을 시작했다.
"일단 혐의는 확정적이라고 보며, 우발적인 범죄로 보이지만 본부에서는 오히려 그런 만큼 더더욱 긴급을 요하는 사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타이탄즈 쪽에 협조 공문을 보낸 것이고요."
긴급 사태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가장 각광 받고 있는 길드이니 말입니다, 고태식을 그렇게 덧붙였지만 공치사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러니 따로 감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각성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수사 권한은 실버볼에게 있다. 그러나 흉악범이나 강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라면 체포를 위해 인근 길드에 협조를 요청한다. 그럼으로써 실버볼은 만약에 사태에 대해 대응력을 높이고 길드는 이를 빌미로 헌터들의 권리를 보다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물론 요즘 헌터들도 대인전에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드들보다는 뛰어난 기동력과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각성자 제압용 장비만 충분히 갖추면 체포에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전력으로 운용된다.
"장비 배급은 넘어가고, 바로 지부로 향하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제압 장비를 신청하고 불출 받기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민하의 능력이면 추적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예림이가 합류하면 별 문제 없이 제압할 수 있을 테고, 정 안되면 내 능력으로 바로 장비를 찍어낼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건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태식은 짧게 침묵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현수야.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걱정이 안되겠냐. 너 잔정 많은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대응반 팀장이 아닌 옆집 아저씨로서 하는 말이었다. 과묵한 것과 공사 구분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고태식이 어렵사리 꺼낸 말을 가볍게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정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지인이라고 봐주고 그럴 사람 아닌 거 잘 아시잖아요."
"잘 아니까 더……. 아니다. 네가 괜찮다면 됐다."
고태식은 결국 짧은 한숨만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에 걱정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기분이 착잡했다.
하지만 지인의 잘못인 만큼, 오히려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더 잘 살피고 전조를 알아차렸다면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었는데, 심지어는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니……
"선배, 괜찮은 것 맞죠?"
"어? 어. 괜찮지."
민하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더 피해가 커지고 죄목이 더해지기 전에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우리도 가자. 호출기 가져왔지?"
민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호출기를 보이기에 함께 좌표를 확인했다.
예림이는 굳이 사정 청취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먼저 현장 인근 지부로 출발해 있었다. 지금쯤이면 성필이가, 용의자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지들을 간추려 보내주었을 것이다.
"어? 위치가 이상한데요? 고장났나?"
"이게 왜 고장 나."
저도 모르게 타박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상태가 이상했다. 예림이의 위치는 현장도 아니고 인근 지부도 아니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상한 장소였다.
"다른 길로 샜나? 우리 위치는 맞게 나오는데."
"저, 선배. 그것보다 이거……."
조심스럽게 뻗은 손가락 끝이 어느 움직이는 점을 가리켰다.
선명하게 보라색으로 빛나는 점이 빠르게 깜빡이면서 그 위치를 시시각각 옮겨가고 있었다.
그 방향은 수수한 하얀색 점을 향해 곧게 뻗어있다.
서혜은이, 예림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
*
다시 만난 그는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나간 하룻밤이 그에게는 몇 십 년의 세월이었다는 양,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어째서인지 잔뜩 해진 옷은 검은 얼룩을 땟국물처럼 새겨 놓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집어삼켰으니 당연한 응보일까, 김성필은 일평생을 방황하는 광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저 때문일까요."
돌아올 대답이 없으니 혼잣말이었다. 생각으로만 해도 될 이야기를 입에 올린 것은, 누구 하나라도 대답을 주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좀 더 주의했다면, 미리 전조를 알아챘다면, 그랬으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까요."
김성필이 살인자가 되는 미래. 그녀는 그것을 이미 피했노라고 생각했다. 윤현수가 지켜보고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애당초 김예림이 알고 있던 것은 이름과 얼굴, 몇몇 범죄 경위가 전부였다. 김예림이 일일이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하고 작은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서, 끝내 김성필의 손목을 꺾어버리지 않았다. 일부러 빌미를 붙여 감옥에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막연히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그의 미래를 믿었다.
그토록 그녀는 나태하고 안일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여기에 있다.
김예림을 결국 그녀가 끝내 막지 못한 불행과 마주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마지막 보험이라며 붙여 놓았던 추적칩이 제 몫을 했다고,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김성필이 그녀를 덮쳤다.
달리는 품은 짐승과 같다. 손은 잡기 위해, 발은 걷기 위해 사용한다는 상식을 잃었다.
인간의 이하의 지성으로 인간 이상의 괴력을 휘두른다.
김성필의 맨손이 콘크리트를 두부처럼 으깨 놓았다. 그와 그녀가 대면했던 골목이 단숨에 먼지로 가득 찬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김예림은 차가운 결정을 뿌려 그의 발 밑을 얼렸다. 가벼운 몸부림에 가볍게 부숴지고 말지만, 김예림은 조금씩 조금씩 김성필의 발을 늦추고 팔을 옭아맸다.
김예림은 책임을 져야 했다. 그의 광증이 무고한 피해자를 늘리기 전에.
다시 한번 아까보다 단단해진 얼음 덫이 김성필의 발등에 얽혀 들었다. 분노에 차 휘두르는 주먹은 얼음 방패를 산산이 부수지만, 그 파편이 손목에 달라붙어 도리어 엉겨붙는다.
얼음이 만들어지고 다시 깨질 때마다 공기는 담금질 되듯 더욱 얼어붙는다. 그 안에서 김예림은 보다 더 자유롭다.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얼음 결정을 맺어내며 쏘아낸다.
용도가 명확한 자유였다.
냉기가 층층이 쌓아올린 공간은 보이지 않는 얼음 감옥이 되어 두 사람을 구속했다.
완성되었다. 이제 한번이면 그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호송팀이 오면 아무런 피해 없이, 정말 아무런 피해 없이 깔끔하게 모든 일이 마무리될 거라고.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믿음은 녹아내려 사라졌다.
"어떻게……."
불꽃이 날름 혀를 내두르면 얼음 기둥 하나가 무너진다.
"그게…… 왜……."
김예림의 무릎도 후들거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처음으로 김성필의 입이 열리며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흩어진다.
"너… 답게… 자신……"
너무나 익숙한 불꽃의 색깔. 선명하고, 불길하며, 매혹적인 색채.
자주색 불꽃이 김성필의 몸에 뿌리를 내린 꽃처럼 피어올랐다.
"증명."
서혜은의 불꽃, 그리고 그녀의 계약 조건.
'착란증이 있고 공격적 행동을 벌인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병증이 김성필의 괴력과 결합되어 재앙과 같은 참사를 일으킨다.'
김예림은 비극의 원인을 그렇게 생각했다. 저번 병원 때와 같이 단순히 김성필의 착란증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면?
가령 그녀가 무관심했던 김성필의 진짜 능력에, 그녀가 저질러왔던 변수가 하나씩, 둘씩 쌓여서, 결국 지금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면?
김성필이 살인마가 된 것이 중첩된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녀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필연이라면.
김예림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참회하듯이 무릎을 꿇고 김성필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결과가 될 까봐,
수없이 경험한 무수히 많은 비극과 불행, 참극들이 자신의 결정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소심한 회귀자가 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흐름에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눈을 돌리면서.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주먹을 마주 보면서 김예림은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녀의 선택이 초래한 결과를 보고 싶지 않다고.
지겹다고.
김예림은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 너머 보라색 빛이 투과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화감을 눈치 챈 김예림이 눈을 뜨자 그녀의 바로 앞 우뚝 멈춰 있는 보라색 불꽃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선명하고 불길하고 매혹적인,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누구나 시선을 뺏길 수 밖에 없는 악마적인 색채.
서혜은이 온몸을 불태우며 김성필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