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다시 시작, 약속, 책임 2
* * *
요즘 좀 기특한 후배.
그것은 바로 서혜은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어린 나이에 제일 신입이고 막내다 보니 더 신경이 쓰이는 것도 있겠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 싸가지 없던 년이 이제는 질문 하나를 할 때에도 정중하기가 그지없고 퇴근 후에는 항상 따로 남아서 연습도 한다. 원래도 노력파였지만 타이탄즈에 들어오고 나서 더 불이 붙었다는 느낌으로, 훌륭한 스승 겸 선배들 밑에서 이것저것 착실하게 배워나가고 있다.
뛰어난 재능에 멈추지 않는 열정, 바람직한 환경까지. 아마 훗날 크게 될 것이 분명하다.
휴일을 하루 앞두고 있는 오늘, 그런 기특한 후배에게 유익한 제안 하나를 건네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허락할 수 없습니다."
"훈련 줄여줄게."
"싫습니다."
"……그럼 늘려줄게."
"더 싫습니다."
"아 좀! 머리카락 그게 그렇게 아깝냐? 나중에 다 자라는 건데?"
한참을 옥신각신하며 여러 가지 조건을 꺼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성필이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모델을 더 많이 구해야 하는데, 후배라는 애가 통 말을 듣지 않는다.
"제가 걸치는 옷, 머리, 화장까지. 모두 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다른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혜은이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듯 단언했다.
"화장도 해? 아니 그게 아니고, 머리를 혼자 깎지는 않을 거 아니야. 어차피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거 아니야?"
"자주 가는 헤어샵이 있습니다. 제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 이외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고집이 쇠심줄 같다. 진짜 갑자기 막 괘씸하고 그렇네.
"아니 그냥 다듬기만 해도 된다니까? 그리고 공짜고? 나 못 믿어? 눈 감았다 뜨면 끝나는 거야."
"선배 대체 뭐해요?"
열정적인 설득. 진심을 담아 안전하다는 것을 피력하며 혜은이를 어르고 달래고 있자니 민하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마침 잘됐다. 민하야, 저번에 우리 집 왔을 때 말한 거 있지? 헤어샵 모델 구한다는 거. 그거 좀 부탁해도 될까?"
"그거 진짜였어요? ……흠. 글쎄요. 어쩔까요?"
민하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금세 짓궂게 입술을 비죽였다. 무언가 음흉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혜은이 옆에 살그머니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혜은아. 이번에 언니랑 같이 갈까?"
"……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슨 마술을 부린 건지, 혜은이는 나보다 민하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좀 찝찝하기는 한데. 아무튼 간에 잘 된 일이다. 내가 머리를 두 번 깎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걱정이었는데 시름을 덜었다.
"그럼 둘 다 괜찮은 거지? 그러면 주소 보내줄 테니까 내일……"
헤어샵 위치를 가르쳐 주려던 참에 생각이 바뀌었다.
"아니다. 내가 그냥 차로 픽업 갈게. 한 11시쯤에 갈 테니까 기다려. 같이 밥 먹고 가자."
둘 다 주소는 알고 있고 썩 멀지도 않다. 태워준 다음 밥 먹고, 동네 한 바퀴 돌고, 그러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그 말에 혜은이는 심드렁하게 턱끝을 까딱였고 민하는 밝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그럴 것 같았어요."
다음 날, 나는 약속대로 두 명을 데리러 간 후 밥을 먹이고 헤어샵으로 향했다. 가끔 생각하는건데, 맨날 나만 운전하는 것 같다. 이게 사리에 맞는 일이냐? 난 모르겠다.
"어서 오세요! 매번 정말 감사합니다."
헤어샵에서는 성필이가 저번보다 편해진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익숙해진 모양인지 자세부터가 다르다. 주변 인맥을 싹 긁어 보낸 보람이 있다.
그 과정에서 이런 건 부조리나 다름 없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무시했다. 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양심도 없이 밥을 얻어먹을 줄만 알지 살 줄은 모르는 몇몇 악질 새끼들은 빼고.
"여기 우리 팀 후배들.신경 좀 많이 써줘."
성필이에게 둘을 간략히 소개 해준 후 소파에 앉아 머리를 깎는 모습을 구경했다. 멍하니 앉아 가위가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보니 졸음이 몰려왔다.
음, 잠을 쫓으려 눈을 부비고 다시 보니 확실히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다. 내 머리를 손질할 때는 그냥 스포츠컷을 하면서도 긴장에 손을 떨더니 지금은 동작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이래서 연습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도전이었던 일이 일상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도전이라고 하면, 성필이에게는 지금 하루하루가 도전이 될 것이다. 각성자 중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타고 났으니 헌터가 되라는 압박이 심했을 것이다. 반대로 평범하게 살려고 하니 강력한 능력이 주변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 도전을 좀 더 응원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는 각성자로 태어났다면 전투를 업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타고난 능력과는 별개로 원하는 삶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선택지가 훨씬 넓어졌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사회가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끝나면 깨워라."
아니면 말고.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일단 지금은 너무 졸리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눈을 감으니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잠을 방해했다.
"아니 선배. 후배 머리가 어떻게 되나 궁금하지도 않아요?"
"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궁금할 때는 많지……. 아무튼 잔다."
나는 잤다.
*
한숨도 자지 못하고, 햇살을 보고서야 밤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긴 하수도 터널을 빠져나와 겨우 다시 마주한 햇살은 김예림의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밝은 오후의 햇살이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피로와 오물들을 씻어낼 수는 없으리라.
어려운 사냥이었다. 깊은 하수도 안에서 오염물질을 파먹으며 나날이 강해지던 변이종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깨끗이 처리해야 했으니.
그런 만큼 수확은 값졌다. 어느 제약 회사에서 탈출한 실험체와 또 다른 장비 공장에서 몰래 배출한 오염물질. 직접 교섭 카드로 써먹을 수는 없겠지만 몇몇 미끼들에게 불신감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김예림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강둑을 따라 걸었다. 도심지에서는 거리가 조금 많이 떨어진, 오래되고 쇠락한 동네. 그런 만큼 사람들의 시선은 적었지만 얼른 갈아입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빨리 갈아입고, 씻고, 하지만 쉬지는 못하겠지. 일정이 너무 늦어진 것이다.
발은 양말까지 젖어 걸음마다 끈적거렸다. 여봐라는 듯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태양은 뜨거운 열기를 내려보냈다. 주변 공기가 신선해진 만큼 몸에서 나는 악취는 더욱 불쾌하고 찝찝하게만 느껴졌다.
그래.
김예림은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고생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수확이었다고.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활동을 방치하고 피해를 키웠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카드였다. 내부 고발자 후보에게 뿌린다고 해도 별 효과는 없을 것이고, 다른 증거 사이에 곁다리로 겨우 끼워 넣을 수준이다.
설익은 과실. 예전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내놓으라고! 내꺼라고!"
"내느으르그~ 느끄르그~"
갑자기 들려오는 새된 소리에 얼른 후드를 뒤집어 쓰고 얼굴을 가렸다. 근처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옆을 지나간다.
이 아이들은 곧장 강으로 향할 것이다. 놀 것이 없는 동네이니 강가가 최고의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그 강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문제의 그 하수도 터널이 연결되어 있었다.
김예림은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선배라면 새싹을 지키느라 과실이 설익었다며 불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괴물을 사냥하고 성과가 없었다고 불만 갖지도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녀는 투덜거리는 대신 좀 더 생산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기로 했다. 다행히 고민거리들은 많았다.
여기저기서 돌발적으로 출현할 괴물. 충분한 시간과 자원만 있다면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맞닥뜨리더라도 정보가 있으니 임기응변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각자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기업들, 조직들, 그 끝에 연결되어 있을 헤비 박스. 까다롭다. 그녀는 이미 헤비 박스의 눈 밖에 났으니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견제의 대상일 것이다. 속전속결로 끝내거나, 거대하고 튼튼한 계획이 필요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들은 적어도 상식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장 큰 골칫덩이는 상식 바깥에서 불쑥 머리를 짓쳐드는 법이다.
비상식적인 개인. 범죄자, 탈선범, 일탈자.
누가 어떤 범죄를 어디서 저지를지,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범죄를 저지르기로 작정한 개인을 막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아직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니 미리 체포 할 수도 없다. 범행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완벽한 예방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범행을 저지를 때까지 기다리고 나면 그 흔적이나 단서를 통해 범인을 즉시 특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를 방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하나, 정확히 범죄를 저지르는 타이밍에 개입하는 것이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불가능에 가깝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개인의 행동이야말로 가장 골치 아픈 변수가 된다. 일일이 감시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삐빅, 소리에 생각이 방해 받았다.
문자였다. 지하에 있는 동안 받지 못했던 문자와 전화 내역들이 액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부분 윤현수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디 있냐, 바쁘냐, 왜 씹냐, 주르륵 이어지던 문자의 나열은 한장의 사진으로 마무리 되었다. 서혜은과 유민하, 윤현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김예림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가 얼른 표정을 지웠다. 남들 앞에 보일 얼굴이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이, 예상을 벗어났다는 것이 언제나 불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미래의 악당들을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손이 닿는 범위에서는 믿고 지켜보고 싶다.
그러니, 이번에도 조금만 더 지켜보자.
김성필이 악마가 될지, 아니면 그냥 한 명의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지.
*
악마들의 수근거림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냥 버리고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안돼.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돌아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니 훨씬 말끔해진 인상의 두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어딘가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잘 잤어요? 자기 혼자 태평하게?"
나는 대답 대신 하품을 쭉 뱉었다. 아, 아직도 졸리네. 한 며칠 또 괜찮나 했더니.
"어……. 그래. 이쁘게 잘 됐네."
어느 새 둘 다 커트가 끝난 모양이었다. 성필이는 도구를 정리한 뒤 바닥을 쓸고 있었고 혜은이와 민하는 내 앞에 시위하듯이 모여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가 바뀌었는지는 알고요?"
"알지. 혜은이는 살짝 다듬기만 했고, 넌 컬 좀 더 넣었나? 아무튼 예쁘게 잘 됐네. 내 말 듣기 잘했지?"
"맞췄으니까 봐줄게요."
민하는 분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은이는 어디가 그렇게 의심쩍은지 아직도 앞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잘 된 것 같은데 왜 저러냐.
"선배도 머리 자른 거 멋있어요."
"저번 주에 깎은건데?"
"제 칭찬은 오늘 하셨잖아요? 전 받은 만큼만 돌려줘요."
적당히 툭탁거린 후 소파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저녁은 못 사주겠다고 했더니 카페에 들렸다가 저녁까지 사라고 한다. 대신 카페에서는 너희들이 사라고 하니 후배 커피 한잔 밥 한끼 안 사주는 선배가 어디 있냐며 역으로 성화였다.
"성필이 너는 안 와? 여기 거머리들한테 빈털털이 되기 전에 와야 되는데?"
"하하…… 전 뒷정리도 다 하고 가야 해서요."
"그럼 어쩔 수 없고. 수고해라."
기껏 공짜 커트도 시켜줬는데 커피값에 밥값까지 뜯기고, 내 신세가 처량하다.
더욱 무거워진 가슴을 품고 헤어샵을 나섰다. 지갑은 한결 더 가벼워질 것이다.
김성필은 유리문이 닫혀 찰캉거리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남을 도와주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 먼저 베풀 줄 아는 사람, 남을 돌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그런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김성필은 단 한 번도 도움을 받는 입장에 설 수 없었다.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러고도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것은 언제나 책임 뿐이었다. 뛰어난 능력에 책임을 져야 한다, 네가 선택한 길이니 네가 책임져라…….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는 무언가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챙겨준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 낯선 경험이었다.
처음 도움을 받으면서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세상을 원망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사실은 가슴 속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렇지만 동시에 용서할만한 구석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김성필은 실소를 흘리며 기지개를 쭉 폈다. 이제 뒷정리를 마치고 가게 문을 닫을 것이다. 응원해주는 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열심히 살아가는 수 밖에 없겠지.
부지런히 정리를 하던 그의 눈에 머리카락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도 아니고, 강력한 능력을 갖춘 각성자들의 머리카락. 올올이 흩어진 실선들을 보는 순간 김성필의 내면의 누군가가 꿀꺽 군침을 삼켰다.
그의 또다른 의무를 수행해야 할 때였다.
첫번째 희생자가 나온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