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다시 시작, 약속, 책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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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림이 타이탄즈의 훈련장을 찾는 시간은 언제나 가장 조용한 순간이다.
한산한 시간대가 언제인지는 몸에 새겨져 있다. 그날 일과가 훈련이었던 길드원들은 모두 떠나고, 일과 후에 훈련장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
보안 요원에게는 저녁에 해당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김예림이 출입 카드를 넣자 잠시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후에야 직원이 나와 불쾌한 기색으로 검사를 실시했다. 살짝 간장 냄새가 풍겨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신속하게, 친절하게 이루어졌다. 방을 배정받은 김예림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직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예림 씨,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컨디션은 챙기셔야죠."
김예림은 잠시 직원의 얼굴을 보며 기억을 되새겼다. 이번 회차에서, 그래, 선배다. 예전에 선배와 함께 찾아왔을 때 마주친 적이 있다.
"괜찮아요."
짧은 대답과 함께 몇 걸음 걸은 후, 다시 뒤돌아 덧붙인다.
"현수 선배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아이고, 참…….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김예림은 짧게 감사를 표하고 훈련실을 찾았다.
기본적으로 타이탄즈의 훈련실은 방음은 기본에 밀실이며 독실이다. 녹화 장치는 따로 신청된 것 이외에는 허락되지 않으며 출입 기록은 철저하게 관리된다.
타인의 시선에서 끝없이 멀어진 공간. 하나의 독립된 우주.
그날 그녀의 우주는 아주 차갑고 딱딱했다. 가장 단단한 훈련실이었지만 내부는 텅 비어있다. 마치 대련실 같은 꾸밈새였지만 상대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애당초 김예림은 대련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이기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비슷한 상대를 찾아 대련하기 보다 본인에게 직접 도전하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다음 기회가 보장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원래 그녀는 종합적인 무위를 추구했다.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 최적화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필살기와 다름없다. 단신으로 여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능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 회귀는 없다. 최적화된 공략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주먹구구로 밀어붙이더라도 확실하게 통하는 기술, 언제 어느 상황에서 내질러도 기회를 보장해주는 스킬이었다.
다행히 김예림은 그 기술의 레시피를 이미 알고 있다. 나머지는 어떻게 체득시키느냐에 문제다.
튼튼한 방 한가운데에 정좌하여 앉은 그녀는 조금씩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건져 올리는 것이다. 순수하고 투명한 결정, 너울, 흐름을 완성했던 그 순간의 모든 기억과 감각을.
그렇게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김예림의 귀에 난데없는 새 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이에요? 이런 장소에서."
김예림은 입술 하나 달싹거리지 않고 입안에서 문장을 맺었다. 그것으로 충분히 목소리는 전달되었다. 새 소리가 서서히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어 간다.
이런 장소니까 좋은 거지. 우리 기술이면 감청당할 일도 없어. 엿들을 사람만 없으면 그만이지.
"용건부터 말해주세요. 저번에 맡긴 일은 어떻게 됐나요?"
물론 깔끔하게 끝내 놓았지.
정보상 테오는 차분한 목소리로 처리한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뻐꾸기라고 불리는 남자답게 그 수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완벽했다.
우리 식구들이 고생한 덕분이지. 이제 낡은 건물이 무너질 일도 없을 거고, 자칫 길드 간 살육전으로 번질 뻔한 오해도 무사히 바로 잡을 수 있었지. 하수도에서 오염 물질을 파먹던 쥐 새끼들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었어. 젠장. 알겠냐?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격해지더니 종극에는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우리는 정보 조직이야! 심부름 센터가 아니고 자경단도 아니라고.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부탁을 떠넘길 생각이지?
본업에 지장이 생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조직의 정체성 자체를 흐리게 할 수 있었다. 테오는 수하들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불만을 읽어내고는 더 이상 지금 상황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돈은 충분히 지불하고 있어요.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돈 얼마를 주건, 우리 조직은 네 수족이 아니야! 그동안은 신세진 일을 갚는 셈 쳤지만 더 이상 이런 자질구레한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지. 이제 깔끔한 거래 관계로 돌아갈 때야.
테오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이봐. 조언 하나 하지. 지금 자네는 정상이 아니야. 어느 아파트에서 연구실, 변전소까지 일일이 문제거리를 찾아서 해결한다는 게 말이 되나? 어떻게 아는 지도 모르겠고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가 감당할 일이 아니야. 그만두게.
"……잔소리 때문에 연락한 건가요?"
걱정되서 하는 이야기야!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적당히 하게. 그렇게 탐욕스럽게 정보망을 넓히고 약점을 캐고 다니더니 이제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이미 벌려 놓은 일 때문에 자네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놈들이 많아. 그러니 아예 조용히 지내던가, 아니면 더 밀어붙여야지! 대체 이도 저도 아니고, 이득도 없이 여기저기 들쑤시는 이유가 뭔가?
"제가 그걸 말씀드릴 이유가 있나요?"
들을 이유는 충분하지. 말해.
늙은 정보상은 이제 숫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늘 능글맞던 노인이 이렇게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김예림은 망설였다. 마치 자기 손자를 걱정하듯 호통을 치고 있는 테오의 마음을 이용하는 꼴이 될까 봐.
하지만 결국 김예림은 결정을 내렸다.
"희생자가 없었으면 해요. 적어도 제 눈이 닿는 범위에서는요."
늘 도망치기만 했다. 반복되는 회귀 속에서 막을 수 없던 희생들.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는 편이 희생을 줄이는 길이다, 하며 외면해왔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는 없다.
그것 때문에 후배를 잃은 사람이 그녀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겨우 그거라고? 네가?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게, 너무 후안무치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윤현수와는 수없이 싸웠고, 아직 타락하지 않은 서혜은을 미리 제거한 일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외에 그녀가 저질렀던 수많은 살인들. 범죄들.
그 모든 일을 없던 일로 여길 수는 없을까.
이전 회차에서 헤비 박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윤현수는 지금도 타이탄즈에 남아 있다.
지금의 서혜은은 파멸의 숙녀에서 한없이 먼 삶을 살고 있다.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적어도 지금부터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회귀가 사라져버린 지금이야말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
“맞아요. 그게 전부에요.”
그렇기 때문에 김예림은 모든 일을 감당하기로 했다. 윤현수와 서혜은 앞에 떳떳하기 위해서,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사고와 재앙을 막아낼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사용하더라도.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어이가 없다는 듯 테오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한 번이라도 의뢰비가 밀리면 그때는 정말 끝이다.
그것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김예림은 통신기가 부착된 귀고리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고맙다는 말은 다음번에 얼굴을 보면서 건네면 될 것이다.
*
"넌 어떻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냐?"
"뭐가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 감회가 교차한다. 반성, 분노, 어이없음 등등.
왜 내 부사수들은 다 이런 꼴이 된 걸까? 내가 선배로서 어느 부분이 그렇게 부족하기에? 폭력?
"퇴근하고 난 뒤에 직장 선배가 밥도 직접 차려주고 술도 사주는데, 더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속이 좁은 거냐? 아니면 네가 뻔뻔한 거냐?"
"그걸 입 밖으로 말하는 시점에서 둘 다 아닐까요?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술 꺼내주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좀생이인가?"
"너 그러다 진짜 한 대 맞는 수가 있어요."
아무리 협박을 해보아도 민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는 듯 싱글거리며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퇴근 후 심심하다고 아주 노래를 부르기에 무시했더니 결국 집까지 쫓아와 밥을 얻어먹겠다며 눌러앉았다. 혜은이는 도망치고 예림이는 사라지고, 결국 누구 하나 떠넘길 사람 찾지 못하고 혼자 주방에 서게 된 것이다.
심지어 자기는 요리하는 법도 모른다며 저녁 준비도 나한테 떠넘겼다. 이게 후배가 맞나? 내가 선후배 개념을 잘못 배웠나?
"너 그럴 때마다 내가 길드원들 볼 얼굴이 없다. 선배 위신 좀 세우게 남들 눈앞에서라도 고분고분 있어주면 안되냐?"
"다른 사람들은 다 선배 부러워할걸요? 이렇게 귀여운 후배가 다 있냐면서."
"네가 진짜 미쳤구나."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금세 볶음밥과 군만두가 완성되었다. 남는 재료를 대충 털어 넣어 만든 것이지만 늘 그렇듯 안정적인 맛이었다. 요리 앞에서는 늘 그렇듯 민하도 깐죽거리지 않고 얌전히 받아 만족스럽게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따로 담아둔 건 지혜 언니 거죠? 늦게 오나 봐요?"
"맞으니까 눈깔 치워라. 너 먹을 거 아니다."
"제가 무슨 돼지도 아니고."
"장담할 수 있냐?"
남은 만두에 맥주까지 얻어먹는 꼴을 보니까 일단 사람 새끼는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놀리자 민하의 표정이 단숨에 불퉁해졌다.
"어차피 퇴근하고 할 일도 없는데 후배가 놀러 와줬으면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할 일 많은지 적은지 어떻게 알아?"
"저는 다 알거든요? 휴일에는 맨날 집에 틀어박혀 있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멍청한 후배년은 그렇게 단정 지으며 으스대듯이 말했지만, 전혀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야, 내가 얼마나 바쁜데? 후배에 동기에 친구에 업계 사람에. 독 저항 없었으면 간 수치 때문에 죽었을걸?"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 한 곳에서 잠잠하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고민거리니 상담할 일이니 소란이 일어서 마음 편히 휴일을 보내는 일이 더 드물었다.
"술 밖에 안마셔요? 다른 건요?"
"밥도 먹지. 커피도 마시고."
"무슨 하루종일 먹고만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저번 금요일에 만난 사람하고도 술?"
"어?"
금요일이면 예림이랑 같이 성필이네 미용실에 들렀던 날이었다.
"예림 씨랑 같이 간 거죠? 대체 누구랑 만나길래 머리까지 다듬고 가신 거예요?"
민하는 한술 더 떠서 머리를 다듬은 것까지 꿰뚫어 보았다. 지혜는 모르던데.
아무튼 일이 좋지 않게 되었다. 예림이랑 단 둘이 갔다고 하면 괜한 오해를 살 것 같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 것도 좀 그렇다.
"아! 신상철 알지? 상철이 친구가 헤어샵에서 일한다고 거기 들렸지. 실습할 사람 필요하다고 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핑계가 있었다. 병원에서 예림이랑 같이 만났다고 하면 아직도 상담을 받고 있다는 쪽팔린 진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지만, 상철이 연줄이라고 하면 충분히 둘러댈 수 있었다.
"그러면 예림 씨는 왜 같이 간 거에요?"
"나 혼자 가서 뭐 하냐? 보는 눈 있는 사람도 있어야지."
"저는요?"
"네가? 뭐가? 내 부탁을?"
네가 보는 눈이 있다고? 그리고 애초에 부탁한다고 네가 듣냐?
"저도 불렀으면 갔을 텐데."
"하이고. 그러시겠죠."
퍽이나 그러겠다. 여기 이 뺀질난 후배는 정확히 혼내기 애매할 정도로 일을 피하는 요령이 있었다. 각 잡고 혼내기에는 미안하고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거슬리는 일을 남겨둬서 결국 둘이 같이 남아서 일을 마무리했던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는 애가 내 부탁으로 휴일을 반납한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진짜인데요? 그럼 다음에 갈 때 저 불러줘요. 제가 가나 안 가나."
"어, 응, 그래, 알았어, 그럴게, 고맙다."
"지금 안 믿어서 그러죠?"
민하는 잔뜩 뿔이 난 듯 얼굴을 들이밀며 주정을 부렸다.
"저도 뭐든 도와주고 싶고, 뭐든 도와줄 수 있거든요? 선배는 말만 해요, 기다릴게요!"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술 냄새가 훅 끼쳐온다. 부담스러워 몸을 피하니 더욱 몸을 기울이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약속 잘 안지키거든요?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오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민하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역효과였다. 술에 취해 살짝 뺨이 발그스레해진 후배는 오히려 더욱 몸을 기울이며 내뻗은 팔에 몸을 기대기 시작했다.
"민하야?"
"선배……."
"이게 무슨 좆같은 냄새지?"
느닷없이 들려온 증오에 찬 목소리로, 분위기는 단숨에 폐허가 된 마을처럼 변하고 말았다.
사냥을 끝내고 늦은 시간 마을로 돌아온 전사는 후회와 분노로 안광을 불태운다.
"어? 지혜 언니? 오늘 퇴근 못 하는 거 아니……."
"그래서 이게 무슨 냄새냐고?"
지금 막 퇴근해서 돌아왔는지 피곤한 행색이 역력한 지혜가, 그 행색과는 전혀 달리 희번뜩하게 살기를 빛내는 눈으로 식탁 위를 바라보고 있다.
냄새? 그새에 재빨리 민하를 다시 제대로 의자에 앉혀 놓고 코를 킁킁거리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술 냄새뿐인데? 아니면 만두?"
얘가 술 냄새를 싫어할 리가 없는데.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내 술이 왜 남의 손에 들려있지……?"
약탈자의 손에 유린당한 맥주캔을 보면서 전사는 뚝뚝 흘러넘칠 듯한 분노를 불사른다.
남의 손에 쥐어진 승리가 끝없이 원망스럽듯이, 자기가 마시지 못한 술의 냄새가 더없이 역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내가 산 술인데 왜 네 술이 되어 있지?"
"내 냉장고니까……!"
"지랄! 민하야! 원샷해!"
"분명 언니 오늘 퇴근 못한다고…… 에이!"
순식간에 민하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황금의 액체를 보고 지혜는 오열했다.
결국 그날의 소동은 내가 추가로 맥주를 사오고 술안주를 준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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