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정신 나갈 것 같아 2
* * *
간만에 한가한 날이었다.
정해진 일정은 오후에 잡힌 약속 하나고, 미리 처리해둘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습관처럼 일어나 길드로 출근은 했지만 남은 일은 잠시 기다리다가 약속 장소로 향하는 것뿐.
남는 시간을 주체 못 한 나머지 결국 훈련실로 향했다. 거기에서 땀이나 좀 빼고 샤워하고 가면 시간이 딱 맞겠지. 겸사겸사 의수에 추가해 놓은 기능 몇 개도 시험해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훈련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혜은이 왔냐?"
아니, 내가 쉬는 날이면 얘도 쉬는 날인데? 굳이 길드까지 출근해서 훈련실을 찾는다? 이건 좀 기특하다.
혜은이가 요즘 좀 많이 기특하기는 하다. 저번 S급 토벌 이후, 매일 같이 훈련 삼매경에 빠져 있다.
원래도 생긴 것 같지 않게 성실한 편이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근접 전투와 실전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혜은아. 잠깐 이쪽 좀 와봐."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연습에 들어가려던 꼬맹이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뭐 하나만 묻자."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거 보니까 한 대 좀 때리고 싶다.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하냐?
"…다음부터는 제대로 인사하겠습니다."
"뭐? 아니 그거 말고."
아니 내가 뭐 그런 거로 사람을 혼내고, 좀 그러기는 하는데, 아무튼 지금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요즘 훈련량 너무 많은 거 아니냐? 체력 관리는 하고 있어?"
인사성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냥 좀 걱정돼서 불러봤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한다. 훈련만 하다가 진 빠져서 실전에서 맥을 못 추는 건 학생 때나 하는 짓이지.
얘가 아직 학생이 맞기는 해도, 이 정도면 절반은 사회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도 대충 알고 있어서 더 걱정된다.
"너 저번에 아무것도 못했다고 이러는 거지 지금?"
"……"
혜은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저번 토벌 때 중간까지는 다들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전열은 잘 버티고, 후열은 잘 때리고, 우희는 잘 쳐내고, 그러면서 각기 맡고 있는 포지션에 따라 원숭이 놈을 몰아붙였다.
문제는 놈의 눈이 시뻘게지면서 폭주하던 때인데, 거기부터는 일이 좀 꼬이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고 이상하게 움직여서 나도 겨우겨우 따라잡다시피 움직였고 후열 쪽에서는 거의 손을 못 댔다. 잡는 데 성공한 건 거의 전부 예림이 덕분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여기 계신 예비 사회인께서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수련에 매진 중이신 것이다. 특히 근접 전투 분야에.
내 의견을 말하자면 의미 없다 못 해서 해롭기까지 한 일이었다.
"너 때는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라니까? 원래 후열 쪽에서는 그런 일 많아. 그리고 그 놈도 일단 덩치 좀 작은 놈이라 그럴 만 해서 그런 건데. 그냥 좋은 경험 했다고 치고 넘겨."
나름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주어도 속수무책이었다. 혜은이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이대로 가면 애 잡겠다. 막을 수는 없으니 그냥 내가 목줄을 쥐는 게 낫지.
"야, 그러면 앞으로는 대련도 같이하고 훈련 봐줄 테니까 딱 그것만 해. 나머지 시간은 개인 정비로 쓰고."
이 정도면 후한 조건이다. 나도 명색이 A급인데 직접 훈련도 봐주고 대련도 해주는 것은 특혜나 다름이 없다. 원래도 팀 훈련은 내가 감독했지만, 아무튼 대련까지 해주니 특혜 맞다.
기껏 후한 대우를 해주는 대신 거기에 조건을 덧붙였다.
"대신 싸움 좀 배웠다고 근접전에 괜히 나서지 말고, 딱 자기 몸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쓴다고 생각해 둬."
"그러면 배우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없긴 왜 없어? 급한 상황에서 후열이 자기 앞가림만 할 수 있어도 1인분 한 건데. 전열이 후열 커버하려다가 대열 박살 나는 거 훈련 영상으로 본 적 없냐?"
혜은이는 능력상 어차피 후열에 있을 때 제일 효율이 좋다. 그동안 훈련과 능력 개발도 그런 방향으로 수행했으니, 이제 와서 괜히 앞에서 같이 싸운다고 설쳐봐야 아군 엉덩이나 지져 놓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무작정 근접 전투를 다시 배우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싸우고 어떤 상황에서는 무시하고 도망칠지 묶어서 가르치는 편이 낫다.
"그런 거라면……"
그렇게 마저 설명을 마치니 혜은이도 그제야 수긍하는 눈치였다.
"아, 맞다. 야 미안하다. 일단 그렇게 알고, 나 약속 있으니까 먼저 간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시간이 부족했다. 기껏 이야기해 놓고 미안한 일이기는 한데, 다음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다행히 혜은이는 그것보다는 내 약속에 더 관심이 가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약속…이라고 하시면, 혹시 예림 씨랑? 아니면 민하 씨랑?"
"어, 둘 다?"
왜 정확히 저 둘 이름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바로 맞췄다.
나, 예림, 민하.
이렇게 세 명이 함께 병원으로 갈 예정이다.
*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으로서, 후배 한 명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 후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고, 심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그렇게 한직으로 인사 이동을 받았다.
갸륵한 선배의 정성으로 어느 정도 본래 업무에 복귀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후배가 어느 날부터 자립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돌봐주던 선배의 도움 없이 스스로 움직이며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무언가 주변인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평소에도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눈에 띄게 소통을 거부하고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후배가 마약성 도핑약을 사용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때, 후배의 정신 상태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과민 반응일까?
"원래 정기적으로 길드에서 상담 받으라고 하잖아. 거기다 이번에 사상자가 나온 것도 있어서 좀 앞당겨진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 나는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수석에 앉은 민하, 뒷좌석에 앉은 예림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저거 거짓말이다. 내가 길드와 계약을 맺은 전속 병원에 상담 신청을 넣었다. 예림이랑 민하, 둘 다.
민하의 경우 꽤 오래 보고 지내던 동료들을 잃은 거라서 걱정돼서 넣었다. 근데 날짜는 다르게 할 걸 그랬어.
괜히 운전대도 평소보다 무거운 것 같다. 조수석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고서는 계속 재잘재잘 떠들던 민하는 뒤이어 예림이가 타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차 안이 조용해지니 어색함에 숨이 막혀 아무 말이나 떠들어 보았는데, 턱도 없었다. 지금도 불편해 죽을 것 같다.
"선배, 근데 이번 상담 선배도 받는 거예요? 정기 상담이라면서요."
자기가 운전하는 것 마냥 말없이 정면만 쳐다보던 민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어, 그렇지?"
"흠."
민하는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것도 거짓말이다. 바로 가서 몰래 신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별다른 대책에 없이 병원에 도착하고 상담실 앞에 섰다.
"먼저 들어갈게요."
첫 차례는 예림이였다. 자연스럽게 나와 민하는 앞 대기실에서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어땠냐면, 불편했다. 운전할 때만큼 불편하다.
평소에는 예림이가 차가운 느낌이라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인데, 지금은 원래는 수다스러운 편이던 민하가 조용하니 무슨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기류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어색했던 적이 없었는데 혹시 들켰나? 괜히 걱정한다고 화가 났나?
"선배. 그냥 물어보는 건데요."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을 깬 것은 결국 민하였다.
"혹시 뭐 들은 거 있어요?"
"어떤 거?"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되물으니 민하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견디다 못해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었다.
"…이번에 죽은 애들 이야기?"
너무 직설적인 화법이었을까, 민하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좀 더 돌려 말할 걸 그랬네.
"잘 마무리됐어. 장례식은 너도 왔지? 조의금이랑 위로금은 싹 정산해서 내가 전달했어. 가족 분들이 많이… 힘들어는 하셨는데, 그래도 결국 다들 마지막에는 잘 받아들이시더라고."
장례식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다 싶다. 어릴 적에는 그냥 무덤만 만들고 땡이었으니까.
민하는 잠시 표정을 흐리더니 휘휘 고개를 털고는 조금 웃었다.
"다행이네요. 전 중간에 가서 자리만 지키다가 금방 갔는데, 고마워요. 선배들도 편하게 갔을 거에요"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겼다. 보통 그렇듯이 대화가 길게 이어지기는 어려운 화제였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차라리 예림이가 빨리 나왔으면 하고 바라게 될 즈음에 민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 말고는요?"
"그거 말고? 어떤 거?"
"아니, 아니에요."
이번에는 정말 짐작 가는 것이 없어 물어봤지만 별 대답은 없었다. 자세히 캐물어 볼까 했지만 때마침 예림이가 상담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자연스럽게 민하가 뒤이어 상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내 경우에는 저번에 약물 관련해서 혼냈던 것이 마음에 걸려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원래 본인도 켕기는 게 있을 때 혓바닥이 잘 돌아간다는데 저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나도 약을 좀 쓰다 보니까 험한 말이 안나오더라고. 근데 걱정돼서 혼내기는 혼내야 되니 괜히 에둘러서 이야기만 반복하게 되고.
그래서 지금은 할 말이 없었다. 있더라도 민망해서 못한다.
예림이야 그냥 평소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어색한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는다. 대화문으로 적으면 짧기 그지 없겠지만 느끼기에는 한도 끝도 없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 이런 시간이다. 숨이 막혀 한 사람이 질식해 죽기 충분하다.
다행히 뇌에 산소가 떨어지기 전에 민하가 상담실을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표정은 오히려 더 심각해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반갑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는 건데, 구명줄은 의외로 금방 내려왔다.
"다음은 현수 씨? 이쪽으로 오세요."
"네? 저요?"
얼떨떨하게 되물으니 간호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심한 눈으로 서류철을 들여다봤다.
"네. 예약자에 있던데요?"
잘된 일이기는 한데,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살짝 둘의 눈치를 살핀 후 다시 물어봤다.
"어, 그게 왜 거기 있죠?"
얼빠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그런 상황에 익숙하다는 듯 다시 서류철을 확인하더니 무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신청은 따로 들어가 있는데, 타이탄즈 길드장님 이름으로 반드시 상담 받고 가게 하라고 적혀있네요."
삼촌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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