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3년 후 8
* * *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계획이 무너지고 승리가 멀어진다. 간절히 바라던 것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괴로운 것은 실패를 통해 스스로의 안일함, 아둔함, 무지함이 증명된다는 사실이다. 실패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을 마주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는 괴롭고, 실패를 되짚어 무엇이 원인인지 따져보는 것은 더더욱 괴롭다.
부조리한 것은, 그 일을 다른 사람과 함께할 때 더욱 괴롭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은 나눈다고 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곱해지기만 한다.
데이브가 현재 겪고 있는 일이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야… 여기 친구들 진짜 괜찮네."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데이브는 그 주둥이를 막거나, 아니면 목을 졸라 다신 거슬리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간절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여자가 데이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었다. 지위도, 힘도. 둘 다.
드디어 감상이 끝난 것인지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데이브를 돌아보았다.
"왜 불렀나 했는데 이제 알겠네요. 저쯤 되는 친구들이 널렸으면 어쩔 수 없죠."
한 시간가량 전투 영상을 감상하고, 또 감상한 끝에 겨우 나온 제대로 된 문장이었다. 실컷 좋은 구경을 했다는 태도였다.
데이브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겨우 삼키고 그녀의 새로운 이름을 떠올렸다.
"이리나 씨. 이제 의견을 들려주시죠."
"이리나? 누구? 아, 나구나."
자신의 이름이 낯설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리나는 겨우 떠올랐다는 듯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저 의수 꽤 멋진 물건인 거 같아요. 저희도 저거 만듭시다."
그녀는 영상 속 남자, 윤현수가 왼팔에 달고 있는 의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데이브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한 시간이다. 한 시간 동안 나를 병풍처럼 세워 놓고 싸움 구경이나 했으니, 처음 요청 따위는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 잊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팔을 잃으신다면 바로 준비해드리죠. 조금 다치셨다고 퇴역하시기에는 귀중한 인재시니 말입니다."
"재수 떨어지게 그런 말은 왜 해요? 장애인 만들고 싶나 봐?"
데이브는 다시 한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것이 지시 사항이었다.
그가 쩔쩔매면서 화를 다스리는 동안 이리나는 비죽 웃으며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겨우 그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마지막에 남은 두 명이죠. 음, 둘 중에 고르라면 남자 쪽이고요."
드디어 데이브는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기쁨과 해방감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그러기 전에 다음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행운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데이브는 그녀에게 또다시 대답을 구해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에 좌절감을 느꼈다.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명백하게 질색하는 표정에 데이브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인가? 한 마디 제대로 된 대답을 얻으려면 한 시간씩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하나?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이리나는 금새 표정을 풀고 원하는 대답을 내주었다.
"보면 모릅니까? 원숭이는 저 남자를 상대할 때만 반응 속도가 느려요. 처음부터 쭉.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페이크 모션에 당하기도 하고. 당신들이 가르쳐준 스펙이 정확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죠?"
즉 처음부터 대비가 된 상태였다는 말이었다.
데이브는 마침내 돌아온 제대로 된 대답에 환희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이제 해방이다. 남은 일은 그녀가 한 말을 정리해서 보고로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헌터 사냥꾼. 헌터에게 당할 리 없는 괴물이 헌터에게 당했다. 이 사태에 대해 헤비 박스 수뇌부는 즉시 원인 규명을 시작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설계에는 문제가 없었다. 실패의 원인은, 상대가 정확한 대처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대처법은 어떻게 유출되었는가. 누구에게 유출되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데이브가 이리나에게 전투 영상을 분석하고 의견을 요청한 것 또한 그 일환이었다.
환희에 젖어있던 데이브의 흥분이 급작스럽게 잦아들었다.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그에게는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위쪽에서는 여자 쪽, 그러니까 김예림을 더 가능성 있는 후보로 보고 있습니다."
데이브는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심경으로 질문을 뱉었다. 이제 이 대답을 듣는데 얼마나 더 많은 기다림의 시간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요행이 찾아올 것인가?
그에 대한 이리나의 반응은 말 그대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무슨…표정이십니까?"
이리나는 마치 쓴 약을 먹은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혀를 비죽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황당한 얼굴로 있기를 한참. 이리나는 표정을 풀고 말라붙어 텁텁해진 혀를 쩝쩝거렸다.
"귀찮게 왜 그러냐는 표정이죠. 왜 몰라요? 진짜 당연한 건데."
화를 내야 하나, 몸을 낮춰 사정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데이브는 그냥 무덤덤하게 다시 질문하기로 했다.
"부디 가르쳐주시죠. 어떤 게 당연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딱 보면 알지 않아요? 짜증 내는 표정인 거."
"그 말이 아니라…"
"그리고 영상에서도 딱 보면 알잖아요. 논리적으로. 논리 몰라요?"
이리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처를 알고 있었으면 저렇게 대놓고 썼겠습니까? 이 도시에서는 도핑이 불법이라면서요? 정말 알고 있었고, 그래서 대비를 하고 있었으면 적어도 저렇게 무식한 방법은 아니겠죠. 차라리 남자 쪽이 더 스마트하지."
예상 외로, 이리나가 이야기한 것은 전투 외적인 부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미 데이브와 다른 간부들이 고려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다시 데이브가 질문을 하려고 하자 선수를 빼앗듯 보충 설명을 했다.
"알고는 있었는데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서, 한방에 원숭이의 능력을 마비 시킬 정도의 극약을 꽂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데이브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헌터들의 생각을 읽는다고 하여도 첫 번째 단계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단계,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괴물 본신의 힘이 완전히 해방되고 마인드 리딩 능력도 100% 발휘되는 괴물.
김예림은 그 타이밍을 맞춰서 약물을 사용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까?
"미쳤어요? 아니면 걔가 미친 년이랍니까? 도핑제가 아니라 반쯤 마약인 물건인데?"
이리나는 단언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벌인 거라고.
"그냥 가지고 다니던 물건인데 급해지니까 썼겠죠. 미리 알고 있었으면 그냥 싸움을 피할 거 아니에요? 이기고도 몸 망가져, 머리 망가져, 이겨도 지는 싸움인데."
이리나의 거침없는 말에 데이브는 안색을 조금 굳혔지만, 이내 나름 합리적인 말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김예림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런 멍청한 싸움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까 잡으러 갈 거면 윤현수? 저 사람으로 해요. 그때 저도 부르고."
그 말을 끝으로 이리나는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눈을 감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데이브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의견은 충분히 들었다. 확실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보고로 올릴 수준의 의견은 갖춰졌다.
긴 복도를 걸으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보고할 내용을 정리했다. 대비, 리스크, 극약.
그렇게 차곡차곡 자리를 잡아가던 생각은 문득 '실패'라는 단어에 발목이 잡혀 갈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예상 외의 실패. 데이브는 까득 이빨을 갈면서 숨을 골랐다. 정말, 투자를 많이 한 계획이었는데.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예상 외의 소득을 불러왔다.
모든 흐름은 아름답다. 그 안에 충만한 질서가 있다면.
그리고 데이브는, 헤비 박스는 언제나 질서의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따르는 질서에 반하는, 혹은 그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법칙이 발견되었을 때 헤비 박스는 큰 동요를 겪었다.
혼란 끝에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지. 어느 쪽이건."
모든 보고를 들은 사령관은 그렇게 말했다.
사령관의 사무실. 데이브는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사령관의 가면 쪽으로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 것인가. 중간에 안색을 살필 수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아니, 괜한 생각이었다.
보고 내용을 뒤집는 것은 물론이요, 말장난을 치는 것도 불가능 하다. 데이브는 어디까지나 정직하게 모든 보고를 끝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상 외의 소득이 있었더라도 실패는 실패다. 그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최소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내려질 예정이었다.
"일단 윤현수 그 친구. 영입해봐야 할 이유가 늘었어. 한번은 실패했지만 영 가망이 없는 건 아니지. 계속 주시해보게."
사령관의 말에 데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약점이 훤히 드러난 상대는 대책을 세우기도 쉽다.
하지만 다음 상대는 그렇지 않다. 약점은커녕, 경계해야 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예림. 길드에 입단한 직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잠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시가지 사냥팀에서 재기에 성공…"
사령관은 그 행보를 읊어보면서 잠시 상념에 빠졌다. 그의 상관을 따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데이브도 마찬가지로 저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 말았다.
타이탄즈의 옛 유망주. 지금의 초신성. 요주의 인물.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들이 쫓고 있는 목표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녀가 망쳐 놓은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빙글빙글 헛바퀴를 돌기 시작한 그의 생각을 멈춰 세운 것은 사령관의 한마디였다.
"3년 후."
다시 사령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데이브의 초조함이 한계에 달했을 때쯤에 겨우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3년 후에는 뭐가 있을 것 같나?"
다행히 그때쯤에는 데이브로서도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계획대로면 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는 게 그 정도입니다. 또한 연구가 순조롭다면 워프 기술도 충분히 개발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인류 최초로 적의 본진에 역습을…"
하지만 데이브의 말은 결국 마무리되지 못했다.
데이브가 늘어놓던 각종 계획과 전망들은 단칼에 부정되었다.
"3년 후에는 아무것도 없어. 3년 후가 정말 올지, 안 올지. 우리는 알 수 없지."
가면을 덮어쓰고, 온몸에는 전투복. 온갖 보안 설비와 방어 설비가 가득한 헤비 박스 본부의, 그 안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방비 되어 있는 사령관의 집무실.
그 두꺼운 껍데기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
"적어도 우리의 3년 후는 아닐 테지. 우리의 지금 이 순간도 사라질 거야. 아니, 존재했다는 사실도 지워지겠지."
그 공포에 전염된 듯 데이브도 살짝 몸을 떨었다.
처음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도, 그 앞에서 괴물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도, 헤비 박스에 합류하여 모든 전선을 통합 시킬 때도, 지금과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찾아. 하루라도 더 빨리. 너무 늦기 전에. 되돌릴 수 없기 전에…"
사령관은 살짝 말끝을 흐리다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되돌아가기 전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숨이 아니라 두려움에 버거워진 호흡이 폐에서 저절로 빠져나가는 듯 하기도 했다.
결국 현재 헤비 박스의 최우선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함부로 죽여서도 안되고, 의심을 사서도 안된다. 위험을 느끼게 해서는 안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위화감을 줄 것이다.
반드시 생포하여 그 비밀을 밝혀야 한다. 능력을 뺏어야 한다.
헤비 박스의 수뇌부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최근 알게 된 그 존재.
사령관은 두꺼운 가시를 뱉어내듯 힘겹게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찾아내. 누가 진짜 회귀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