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3년 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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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세상에서, 왕이 얻은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잃어버린 기억이었다. 왕이 어째서 그의 영토를 떠나 이 더러운 먼지투성이 세상으로 떨어졌는가, 그것을 설명해주는 이야기였다.
왕은 평소대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는 곧, 시끄러운 짐승들의 아가리를 닥치게 하고 얼간이들의 꼬리를 잘라 놓는 것. 그렇게 어떻게든 일이 바르게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왕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뱉었다. 아둔한 백성 하나의 근심을 풀어준 뒤였다. 그렇게 겨우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에 왕은 고향을 떠올리며 깊은 비애에 빠져든 것이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올려다보던 천장에서, 혹은 그 너머 하늘에서.
너 비루한 원숭이야, 부름에 답하라.
그리고 다음 순간, 왕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 서 있었다.
왕은 언제나 그의 영토를 답답하다 느끼고는 하였다. 고향의 땅을 흉내내었다고 하나 그의 영토는 좁았고, 시끄러웠고, 그립던 향기를 조금도 흉내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 왕이 서 있는 장소는 그 이상으로 불쾌했다. 좁고, 더럽고, 공기에는 악취와 텁텁함이 가득하여 숨을 쉬기도 싫을 수준이었다.
당황과 짜증으로 찌푸려지는 그의 눈에 두 인간이 들어왔다. 손만 닿으면 부숴질 듯한 얇고 투명한 장벽 너머, 목에 축복의 징표를 띄운 어벙한 인간 하나와 비열하게 웃음을 흘리는 인간 하나가 나란히 선 채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 중 누가 나를 불렀는가? 고민할 틈도 없이 의식이 끊겼다.
그리고 실험대. 트럭. 지하. 구속대. 다시 실험실. 트럭.
성의 없이 만들어진 슬라이드 쇼처럼 맥락 없는 풍경들.
그리고 지상. 회색의 너른 공터.
왕은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을 모두 찾았다. 인간에 대한 복수심과 함께.
그리고 그가 얻은 다른 하나는, 그 복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줄 것이었다.
왕은 겁먹은 기색 없이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인간의 눈을 쳐다보았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맑은 강물 아래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훤히 들여다보이듯이.
이 사내가 어디를 주목하는지,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어쩐지 다른 놈들보다는 조금 혼탁한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잔인한 죽음을 안겨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왕이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발바닥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하얀색으로 물드는 듯한 순간이었다.
왕은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앞에 있는 사내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어떤 존재가 이런 이질적인 압박감을 가하는 것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숨을 몰아쉬며 주사기를 던져 놓는 한 여성이 있었다.
왕은 오랜 노련함으로 상대의 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사내 또한 강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위기감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왕은 새로 주어진 능력을 이용해 여자를 살펴보았다. 처음으로 돋보기를 손에 쥔 어린아이가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듯이.
읽을 수 없다. 어느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개울을 뒤집어 진창을 내놓은 듯, 불투명한 흐름에 머리가 아득해져 왔다.
왕은 이를 빠득 갈고 다시 발을 떼었다. 순간 두려움을 느낀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돋보기로 개미를 들여다보고 그 흉측한 몰골에 기겁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는 왕이다. 이런 미물은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는.
왕이 포효했다.
*
거미 원숭이. 이전 회차에서는 다른 이름이었지만, 그 본질은 같다.
헌터는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솔저는 상대할 수 있다.
이것을 절대적인 명제로 성립시키는 것은 헌터들의 순수함이었다.
헌터는 가장 순도 높은 각성자다. 장비보다 자기 자신의 힘을 신뢰하는 그들의 능력은 극한으로 정련되어 있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 괴물은 너무나 쉽게 헌터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이 헌터가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없는 이유였다. 가드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저 괴물을 상대할 전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도시의 전력만으로는 원숭이 놈을 쓰러트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헤비 박스들이 운용하는 솔저는 다르다.
그들의 힘은 약물과, 강화 시술과, 온갖 장비들로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특수칩이 아무리 고성능이어도 그 혼탁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헤비 박스의 작전팀은 거기에 주목하여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래, 아주 약간의 수정에 불과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헤비 박스는 도시에 의도적으로 괴물을 풀어놓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리고 그 괴물들을 토벌하면서 헌터들의 위세를 꺾고, 자신의 위상을 높인다. 그것이 처음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림의 간섭, 길드의 빠른 대응으로 오히려 스스로에게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지자, 그들은 조그만 꼼수를 덧붙였다.
저 괴물들의 머릿속에, 각성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특수칩을 이식하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헌터 사냥꾼을 풀어놓는 일이었다.
막을 수도, 대응할 방법도 없는 수작이었다. 교묘한 은폐 공작으로 도무지 꼬리를 밟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김예림 혼자 실험실에 쳐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에만 주력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김예림의 목덜미에 주입된 것은, 그녀가 상정했던 방법 이상으로 반사회적인 물건이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헌터 사냥꾼에 대한 대책은 두 가지였다. 오랜 기간 천천히 약한 수준의 약물을 주입받거나, 특수 강화 시술을 받거나. 이마저도 둘 다 헌터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으며, 사실 기술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비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비겁자의 요행] 5mL. 이것이면 충분하다.
재료는 일부 괴물의 피, 그리고 사람에게 주입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몇 가지 약품들.
효과는 높은 수준의 능력 강화와 인지 속도 가속.
부작용으로는 효과가 끝난 뒤에 닥쳐오는 끔찍한 금단 증상과, 몸 안의 기운이 헝클어지고 마는 것.
그리고 그 부작용의 결과, 괴물은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된다.
후유증은 심각하다. 때로는 그다음 회차까지 여파가 남을 정도로.
하지만 김예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진실을 밝히자고 결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윤현수에게 사실을 털어놓기보다 위험한 약물에 손을 대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에.
그렇게 비겁한 그녀는 이런 요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저 원숭이 놈의 털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지는 듯 하다.
김예림은 비수를 던지고, 곧바로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놈이 비수를 튕겨내는 동안 무릎을 향해 곧게 찌른다.
괴물의 반격은 빠르다. 단검 두 자루가 그녀의 목덜미를 노린다.
김예림은 찌르던 검을 당기듯 회수한 후 오른쪽으로 날래게 회전하며 단검을 튕겨내었다. 동시에 윤현수가 놈의 등에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놈이 차크람을 휘둘러 반격한다. 윤현수는 오른손으로 쥔 검으로 공격을 막고, 허리를 뒤틀며 왼손을 내민다.
그 손바닥에서 뜨거운 기류가 뿜어져 나오며 드릴처럼 회전한다. 원숭이는 몸을 낮춰 겨우 그 공격을 피하고 다시 역공에 나선다.
윤현수가 저런 무기를 쓰는 것은 김예림에게 있어 낯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그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타이밍을 맞춰 괴물의 배후에 파고들 수 있었다.
얼음으로 사슬을 만들어 놈의 팔을 붙잡아 잡아당긴다.
괴물이 당황한 듯 팔을 흔들자 단숨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시 자세를 잡은 윤현수가 두 손으로 검을 힘껏 내리칠 수 있었으니까.
날카롭고 흉악한 에너지를 품은 주황색 칼날이 놈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린다.
짝짝, 놈이 손뼉을 친다.
칼날이 사라진다. 검의 시동이 꺼진 것이다.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지는 않는다. 한낱 몽둥이에 가까워진 물건으로도 그 일격은 뼈아프다. 놈이 피를 흘리며 비틀거린다.
충분하고도 남을 틈이었다. 김예림은 창을 만들어 허벅지를 찌르고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놈의 손목이 2개 잘려나가고 허벅지가 꿰뚫린다.
놈이 완전히 냉정을 잃고 소리를 지를 때.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둘 다 결착의 순간을 직감했다.
김예림이 그동안 휘두르고 부서트린 얼음 무기들은 녹아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 파편들은 여전히 공기 중에 떠돌며 은밀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입자들이 일시에 달라붙어 놈의 무릎을 묶었다.
김예림은 단단히 얼어붙은 다리를 밟고 올라탔다. 그리고 내찌른다. 배를 향해서.
고통에 찬 비명이 새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붉던 놈의 눈이 당장 피를 뚝뚝 흘릴 듯이 부풀어 올랐다.
놈은 결국 합장하던 손을 푼다. 언제나 경건하게 움직이던 그 손이 김예림의 목을 향했다. 붙잡아 조르기 위해, 혹은 비틀어 버리기 위해.
마지막 발악으로,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그 염원은 성취될 수 없었다. 그 직전에 놈의 목이 잘려나갔기 때문에.
윤현수의 의수, 그 끝에서 뿜어져 나온 주황색 빛이 하나의 칼날을 이루었다.
그가 왼손을 휘두르자, 오랜 싸움이 무색하도록 쉽게 놈의 목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원숭이의 목은 허무하게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그 눈을 치켜뜬 채로. 돌아갈 수 없는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전투는 끝났다.
누군가는 복수가 완수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김예림에게는, 또다시 미래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 비척거리며 걸어오는 길태와 우희가 눈에 들어왔다. 무기를 잃고, 다리 한 짝을 절고 있지만, 그들의 표정을 밝아 보였다.
저 너머에 있던 후열 인원들도 찾아왔다. 치열한 전투에 끼어들 수 없어 조바심 내던 그들은 보다 조급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결국 사망자는 없었다. 공략 참여 인원 8명은 큰 부상 없이, 사망자 없이, 다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이것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헤비 박스는 무슨 움직임을 보일까? 그녀에 대한 경계를 더 높이지 않을까?
김예림은 바뀌어버릴 사건의 흐름을 생각하다가, 그냥 눈 앞의 풍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귀를 잃은 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는데.
우스운 일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기쁘고 후련한 느낌이 앞섰다.
스스로의 선택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오랜만이었다.
"예림아."
서서히 약물의 부작용이 올라오려던 때에 윤현수가 다가와 갑작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아니, 선배."
김예림이 당황을 하건 말건, 윤현수는 꼼꼼한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 호흡, 안색, 그런 것들을 살피고 난 윤현수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의 손이 조용히 움직여 파우치를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꺼내 김예림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것은 허벅지에 바로 꽂아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볼펜형 주사기였다.
"헌터용 중화제야. 당장 약물 검사에는 안 걸릴 테니까. 일단 이거 맞고. 나중에 이야기 좀 해."
바짝 얼어붙은 김예림의 머리에 메모 한 장이 떠올랐다.
윤현수에 대해 조사를 할 때 얻은 정보 중,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폐기했던 자료.
'전투 중 약물을 사용한다는 의혹이 있음.'
'제약계 종사자와 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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