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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38화 (38/55)

〈 38화 〉 3년 후 ­ 2

* * *

"아… 졸리다."

"저희 출발하고 30분도 안됐거든요?"

양현오의 늘어진 하품에 강예윤이 타박을 놓았다. 그러자 양현오는 강예윤가 던진 날 선 말을 덥석 붙들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출발하고 30분이건 1시간이건 졸린 건 졸린 거지. 내가 쉬자고 했냐 뭐라고 했냐?"

"일하는 사람 김빠지게 그런 말을 왜 해요? 그냥 속으로 하면 되잖아요."

이주호는 둘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짜, 또 시작이네.

"그만 합시다. 순찰 루트 한 바퀴 돌았으니까 지금부터는 평소대로 둘둘 나뉘어서 갑시다."

이주호의 말에 강예윤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평소대로면, 저 또 현오 씨랑 가요?"

"그러셔야죠. 페어잖아요."

"어휴, 가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지네 진짜."

"뭐라고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이주호는 다시 다투기 시작한 둘을 달랬다.

잠시 후 이주호와 주민찬, 강예윤과 양현오는 각각 짝을 지어 두 무리로 나뉘었다. 각기 의심 가는 지역으로 이동해 흔적을 살피고 괴물을 추적할 것이다.

건물 벽에 남은 얼룩이 그냥 낡은 것인지, 아니면 괴물이 남긴 것인지 살피던 주민찬이 한숨과 섞어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토해낸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해줘야 합니까? 돌겠네 진짜…"

"냅둬, 제일 좋을 때인데."

저 둘, 사귄다. 사귀면서 티는 내기 싫고, 그렇다고 같이 있는데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면 죽을 맛이니 저렇게 괜히 으르렁거리는 척을 한다.

문제는 옆에서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좀 더 엄격하던 시절의 이주호였다면 직설적으로 '다 티 나니까 그만하고, 연애질도 작작해라' 하고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조용한 편이긴 하죠."

"그렇지. 민하 있을 때는 더 시끄러웠지."

둘은 잠시 킬킬거리며 웃다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수상한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괴물보다는 사람이 남긴 흔적 같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형태였다. 두 가지 흔적이 인위적으로 섞인 듯하기도 했다.

이주호 일행은 상의 끝에 커플 일행을 부르기로 했다.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듯싶었다.

"진짜 불러요?"

"메시지로 위치만 보내. 그, 서로 민망하지 않게."

"아하."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강예윤과 양현오는 조금 뺨이 불그스름해진 채로 일행과 합류했다.

그렇게 다시 4명으로 뭉친 사냥조는 흔적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발자국이네."

"사람 발바닥 같은데요?"

"어느 미친놈이 맨발로 걸어 다녀?"

물로 질척해진 골목에서 그들은 흔적을 찾았다. 진흙처럼 뭉친 먼지 덩어리에 깊게 팬 맨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발에 달라붙은 진흙과 물기는 선명하게 그 경로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을 따라간 끝에 결국 그들은 괴물을 찾았다. 외곽. 꽤 넓고 텅 비어있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그 괴물이 조용히 서 있었다.

자연히 의구심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저거 왜 저렇게 서 있냐."

"그러게요. 뭐 부순 흔적도 없었고."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지만 무언가 명쾌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다고 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알지 못하는 괴물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알아보아야 했다. 그게 헌터의 역할이었으니.

"일단 보고 올리고 덮쳐보죠? 마침 4명 전부 있으니까."

양현오의 말에 이주호는 잠시 고민했다.

괜히 자극하는 게 되지는 않을까? 너무 위험하지는 않을까?

외견 상으로는 야수종, 체격을 보면 A급에서 B급 사이일 듯 하다.

이주호는 결론을 내렸다.

가벼운 탐색전을 벌이는 정도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좋아, 괜찮겠지."

*

임시 본부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S급 야수종. 타입 불명, 교전 중 사망자 넷.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었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위험이 코앞에 닥쳤거늘, 의지할 수 있는 정보는 지나치게 불확실했다. 가드들은 냉정을 잃고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사실 실속은 없었다.

저 분위기에 휩쓸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서둘러 임시 지휘 본부로 향했다.

"타이탄즈 시가지 사냥팀 윤현수 외 3명 현장 도착했습니다."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현오찬 경감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무언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을 되찾고 즉시 전후 상황을 브리핑 해주었다.

"지금으로부터 40분 전 사냥조로부터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이곳으로부터 16km떨어진 지점,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주차장에서 괴물과 조우했다고요."

거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말없이 눈짓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관측 드론을 띄운 후 탐색전을 벌이겠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헌터들에게 부여되는 작전권에 의거하여 그들은 별다른 허가 절차 없이 즉시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현오찬 경감은 설명을 멈추고 모니터에 영상을 띄웠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말이었다.

살짝 흐릿한 화면, 회색의 덩어리가 서서히 또렷해지며 주차장의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초점이 점점 맞춰짐에 따라 화면 한가운데에 서있는 괴물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상 속 괴물의 모습은 비루해 보였다.

팔 여덟 달린 원숭이.

본디 있어야 할 팔은 조용히 합장을 하고 있고, 등에서 돋아난 여섯 팔은 각기 무기를 쥐고 있다.

기괴하다. 하지만 위협적인 생김새는 아니었다.

곧이어 헌터들의 모습이 프레임에 잡혔다.

전열에 둘, 후열에 둘.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후열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방사형 대열.

괴물의 좌우를 전열 헌터들이 견제하는 상태에서 후열과 괴물이 거리를 두고 정면에서 마주 본다.

팀원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도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가볍게 견제 삼아 전력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괴물이 도망치건, 우회하건, 정면에서 돌진하건, 모든 경우에 대응하기 위한 다소 수비적인 대열.

그 상태로 교전이 시작된다.

후열 헌터들이 견제 삼아 던진 불꽃과 충격파가 빠르게 날아들고 전열의 헌터들은 거기에 괴물이 어떻게 반응할지 대비하고 있다.

수적 우위와 원거리 공격을 통한 선공권을 이용해 최대한 합리적인 전투 설계.

하지만 짐승의 교활함이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었다.

괴물이 오른쪽으로 피하자 전열의 헌터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간격을 유지했다. 이동 방향의 헌터는 물러나고, 반대 방향의 헌터는 접근하며 거리를 좁힌 것이다.

그것이 실수였다.

괴물은 곧바로 방향을 꺾어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교묘한 타이밍이었다. 놈에게 달려들던 헌터는 발을 멈출 틈도 없이 괴물의 사정거리로 들어갔다.

곤봉 하나가 골통 하나를 부순다. 양현오의 것이었다.

괴물은 눈을 돌려 이번에는 후열을 바라보았다. 놈은 웃음을 흉내 내듯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도약했다. 단숨에 그 거리가 절반이 되었다.

전열에 있던 이주호가 두 번째 도약을 저지하려 놈을 쫓았다. 거기까지가 괴물의 노림수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휘두르는 차크람에 주호의 옆구리가 깊게 찣어졌다.

그 모습에 강예윤이 결국 이성을 잃었다.

그녀가 제 몸을 불태운다. 완벽한 집중 상태에서도 쉽사리 통제하기 어려운, 자칫하면 아군마저 태워버릴 불꽃이 혀를 낼름거리며 심장 안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처음부터 통제하려는 의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에 불을 지르는 사람이 그 규모를 계획하지 않듯이,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불꽃을 그녀의 단말마로 삼았다.

짝짝, 원숭이가 박수를 쳤다.

불꽃이 꺼졌다.

강예윤은 텅 빈 눈으로 허망하게 괴물을 노려보다가 잿더미가 되어 쓰러졌다.

영상은 결국 염력으로 장벽을 세운 후 퇴각하려던 주민찬이 곤봉에 머리가 부숴지는 것으로 끝났다.

영상을 끝나자 억눌렀던 감정이 불쑥 고개를 쳐든다.

나는 저들을 안다.

하나하나가 죽을 때마다 그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저들이 무소속 헌터일 때부터 알고 지냈다.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들이 민하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거리낌 없이 시가지 사냥팀으로 불러들였다. 전부 후배 뻘이라 자꾸 챙겨주기도 하고, 오지랖을 피우기도 했다. 내가 책임질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전부 죽었다. 자책감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증원이 필요하겠군요. 현재 저희 팀의 전력으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영상을 분석했다. 최대한 냉정해지려 애쓰면서 적의 전력을 가늠해보았다.

어느 정도의 맷집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대도 맞지 않았으니. 굉장히 교활하고 재빠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또한 무시무시한 완력을 갖추고 있으며 헌터들의 능력을 무효화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명백한 S급이었다.

저들의 죽음에 책임을 지고 싶지만,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짓이었다.

먼저 좀 더 자세한 현황에 대해 알아야 했다.

"괴물의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교전 후 최초 발견 위치로 돌아간 후 이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면 움직임을 보이고요."

수상한 상황이었다.

"무언가 지킬 것이 있거나, 단순히 시선 끌기일 수도 있겠네요. 양동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신중하게 가능성을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저런 행동에 아무 의미가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의도가 무엇이건 그 결과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고민 끝에 일단 현재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일단 길드에 연락하여 현재 휴식 중인 시가지 사냥팀 인원들을 소집합니다. 이후 차출 가능한 인원을 모아 최소 15명의…"

"무슨 권리로?"

느닷없이 말허리를 자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천막을 열어 젖히며 임시 본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가슴에 붙여둔 계급장, 그리고 그 밑을 장식하는 훈장들.

이 도시 안의 그 어떤 가드나 헌터도 저런 식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저것은 저들이 도시 바깥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징표.

"현 시간 부로, 본 사태는 저희 헤비 박스에서 통제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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