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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37화 (37/55)

〈 37화 〉 3년 후 ­ 1

* * *

"3년 지났죠? 지난 거 맞죠?"

"민하야, 개소리 말고 한 세트 더 해."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는 제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산책 도중 공원에 피어난 풀과 꽃을 보고 계절이 변했음을 깨닫는다. 다 떨어진 노트와 볼펜 잉크를 보고서야 한 학기가 지났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은 머리카락과 손톱, 그리고 늘어가는 주름이 아니면 시간이 지났음을 알지 못한다.

모든 계기는 변화를 수반한다.

나 또한 그랬다. 새삼스럽게, 나는 시가지 사냥팀에 발령받은 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의 계기는 새롭게 단장된 대기실이었다.

이제 대기실은 간이 훈련실과 하나가 되었다.

사냥조나 휴식조는 굳이 대기실에 있을 필요가 없지만, 지원조는 지원 요청이 들어오기까지 가만히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다고 정말로 가만히 앉아 멍청하게 시간을 때우는 것도 좀이 쑤시니, 차라리 옆에서 간단히 훈련이라도 할 수 있도록 건의를 넣었더니 흔쾌히 처리된 것이다.

이제 남는 시간이면 훈련을 할 수 있다. 물론 훈련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그런데 건의를 넣었다고 이렇게 빠르게 처리될 줄은 몰랐다. 시가지 사냥팀의 입지가 그만큼 오른 덕분일 것이다.

시가지 사냥팀은 더 이상 말단 한직, 헌터들의 무덤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돌발 출몰 이후, 시가지 사냥팀은 충분한 실력을 갖춘 헌터들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활약을 펼쳐나가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게 변한 것이 벌써 석 달이다.

3년 안 지났다. 3세트도 못 채웠고, 훈련 시작하고 30분도 안 됐다.

그런데 이 맹랑한 후배 년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징징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몰라요. 이거 더하면 저 지원 못 나가요."

그러고는 아예 벌러덩 누워버린다.

미친 년인가?

"민하야. 너도 이제 선배야, 선배. 혜은이가 보면 무슨 생각 하겠냐?"

"공감하겠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혜은이 한쪽 눈을 살짝 뜨더니 안쓰러운 눈빛으로 민하를 쳐다봤다.

진짜 공감 능력 발휘 중인가?

그럴 때가 아닌데?

"혜은아, 집중하자."

혜은은 지금 계약자 특유의 교감 의식으로 힘을 끌어올리는 와중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계약 조건을 모두 지키고도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제 마음에 흔들림은 없습니다."

"어, 그래."

말투 진짜 적응 안 되네.

거미 여왕 사건 이후로 조금씩 슬쩍 존댓말을 섞어가더니 이제는 말투가 저렇게 변해 버렸다.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까 뭐… 이제는 그냥 컨셉이 저렇구나 싶다. 저러다 나중에 또 바뀌겠지.

근데 존대에서 반말로 옮기는 건 봤어도 그 반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몇 번 반말 섞고 나면 존대할 때마다 괜히 쑥스러워서 못하겠던데, 평소에도 부끄러운 말만 하고 다녀서 그런가.

"좋아, 대충 쉬었지? 다시 시작한다."

둘 상태는 평소대로 개판인 걸 확인했으니, 마지막 팀원을 상대할 차례였다.

김예림. 예전 부사수. 예전 유망주.

하지만 실력을 되찾은 지금은 그냥 현역 에이스 그 자체였다.

어지럽게 검과 얼음이 오고 갔다. 그것들을 흘리고 제치고 비껴내고 나면 다시 다음 공격이 온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빈틈이 없다. 적어도 내 눈에는 흠잡을 곳이 없는 밸런스였다.

예림이는 예전의 기량을 되찾다 못해 그 이상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예전에는 지나치게 저돌적이었다. 공격을 항상 아슬아슬하게 비켜내며 공격을 쑤셔 넣는 모습이 너무 무모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이후에는 반대였다. 시가지 사냥팀에 내려온 직후에는 전투가 지나치게 수비적이라 능력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 중 어느 것과는 다르다. 공수의 균형이 잡혀있고 의외의 지점을 찔러 들어오는 창의적인 공격 또한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었다.

힘을 과하게 사용하는 습관도 고쳐진 지 오래였다.

나와 예림의 검이 얽히더니 힘의 방향이 헝클어지며 양쪽 모두 검을 놓치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그냥 풀었다.

"음. 그냥 이쯤 하자."

그대로 근접 격투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괜히 손대중이 어려우니까 대련은 이 정도만 하자.

이제 잠시 휴식 시간이다. 목도 축일 겸 냉장고에서 물병을 몇 개 꺼내 팀원들에게 던졌다.

예림은 정확히 받아내고, 혜은은 받아 채려다 실패해 떨어트리고, 민하는 배 한가운데에 제대로 적중하는 바람에 비명 소리를 냈다.

"이익… 일부러 그랬죠?"

"누가 선배 앞에서 누워 있으래? 선배가 주면 두 손으로 곱게 받아야지."

되지도 않는 투정을 부리길래 내 몫의 물통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 주었다.

머리가 젖느니 어쩌니 투덜거리는 민하를 뒤로하고 벤치에 앉아 물 몇 모금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몸을 식혀주었다. 적당한 훈련, 대련, 그래야 휴식이 꿀 같다. 역시 우리 팀에는 이런 게 필요했어.

"예림이는 훨씬 괜찮아졌네."

그리고 훈련 뒤에는 응당 피드백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머지 둘은 뭘 하는지 마는지 내가 알 수 없으니 제쳐두지만, 예림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균형이 딱 잡혀서 훨씬 안정감이 있어. 실력 자체도 늘었고."

하지만 약해졌어. 뒷말은 그냥 삼켜두었다.

기술과 판단력이 좋아졌다, 기량이 늘었다, 그런데 어딘가 약하다.

예전에 공략팀에 있을 때, 나는 항상 예림이에게 항상 무모하다고 타박을 놓았다. 그러나 강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김예림은 우아했다.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이 들어와도 알고 있었다는 듯 결코 당황하지 않았으니.

두려움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판단 능력. 그것이 최고 유망주 김예림의 진면목이었다.

지금은 판단 사이에 망설임이 엿보인다. 이제는 불확실한 빈틈에 구태여 발을 들이지 않는다.

불균형함이 가져오는 파괴력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이룩한 성장이었다.

두려움을 아예 모르듯이 굴다가 한번에 무너졌다. 그러나 지금은 제대로 두려움과 마주하면서 싸우고 있다.

약해졌지만 전보다 든든하다. 더욱 믿음직스럽다.

처음 내려왔을 때는 완전히 꺾일지도 모른다고 걱정도 많이 했는데, 역시 기우였나 보다.

"칭찬받았으면 좀 좋아하는 티라도 내라."

"…고마워요."

괜히 투덜거리자 예림이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엎드려 절 받기가 따로 없다.

하지만 여기 남다른 배려심과 존경심을 가진 후배가 하나 있다. 바로 민하다. 내가 혹시 엎드리기라도 할까봐 아주 바닥에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우리 민하는… 척추가 없니…?"

"오다가 떨어트렸나 봐요."

봐라, 선배가 민망할까 봐 한술 더 뜨는 거. 아주 효녀야 효녀. 저런 후배가 또 없어.

"너 전에 있던 팀에서도 이랬냐?"

혹시 모를 걱정에 질문을 하자 민하가 목을 꾸물거렸다. 고개를 가로젓고 싶은데, 일어나기 귀찮은 것 같다.

"에이, 저도 어른인데 당연히 할 때는 제대로 하죠. 선배도 아시잖아요."

"그럼 지금 여기 누워 있는 건 어느 집 어린이냐?"

"응앵."

돌겠네.

어차피 시간 때우는 겸해서 몸 풀릴 정도만 하는 거라 억지로 시킬 건 아닌데, 그냥, 그냥 너무 얄밉다.

원래 해야 하는 일, 해도 되는 일을 너무 귀신같이 구분하면 또 은근히 얄미운 법이다. 가끔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어도 하는 척하고 그래야지…

나는 민하가 전에 속해있던 팀 멤버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호도 성격 만만치 않은데 용케도 참았네. 걔 앞에서 이랬으면 여자고 뭐고 불호령인데."

던전 공략하다가 몇 번 만나봤던 놈인데, 자기한테 엄한 만큼 다른 사람한테도 엄한 친구였다.

아마 경력을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사실상 리더 포지션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 꼴을 보고 넘겼지?

"에이 진짜, 선배 앞에서만 이러는 거라니까요? 저도 누울 자리는 분간하거든요?"

"그래서 여기 이 선배 앞에서는 왜 눕냐. 여기가 너 누울 자리냐?"

"…부끄럽게 왜 말을 그렇게 해요?"

내 말에 민하가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짓더니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건지는 모르겠고, 민하 훈련이나 봐주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니 하필 그때 호출이 왔다.

"타이밍 참… 일어나. 4명 다 가야 된다."

코드를 보니 전원 호출이었다. 나와 예림이를 제외한 애들은 부랴부랴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모든 장비를 착용한 상태라 기다리는 동안 호출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어디에서 보냈는지, 어디로 가면 되는지, 몇 명이 필요한지, 무슨 상황인지가 간략하게 적혀있다.

그것들을 훑어 내리는 와중 이상한 점을 몇 가지 발견했다.

먼저 실버볼 쪽 호출이 아니었다. 주소가 길드 내부 통신망으로 찍혀있는데, 가드 쪽에 화력 지원을 가는 게 일상이다 보니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다음으로 호출 위치가 도시 외곽이었다. 보통 사냥조가 외곽에서 개체나 둥지를 소탕하는데, 굳이 지원까지 요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전원 호출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가지 사냥팀은 셋 모두 4명의 수준급 헌터가 하나의 팀을 이루고 있다. 우리 팀에는 꼬꼬마가 하나 끼어 있었지만 나머지 팀들은 전부 최상위 현역들인데, 팀 하나가 통째로 필요한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위화감을 느끼면서 마지막으로 상세 정보란을 읽어보았다.

[비고: S급 야수종. 타입 불명. 이주호, 양현오, 강예윤, 주민찬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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