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34화 (34/55)

〈 34화 〉 쓸모없는 휴일 ­ 1

* * *

서혜은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러하듯이.

특별해지고 싶다거나, 특별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거나, 그런 고민이 아니었다. 그 고민들은 이미 그녀를 떠났다.

서혜은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느꼈다. 그녀의 쌓아온 실력도, 노력도. 거미여왕과의 전투에서 증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서혜은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도움이 되는 존재였구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자각. 그런 보람을 느낀 후로는 더 이상 특별하다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을 찾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하나의 고민거리를 떠나보내자 새로운 고민이 찾아왔다. 보다 낯설고 까다로운 것이었다.

서혜은의 힘의 원천, 계약.

그리고 계약의 조건, '너 다운 모습으로 남아라'

서혜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특별해지는 것,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이 계약의 조건이라고. 그래서 항상 평범하지 않게 행동하려 애썼다.

문제는 요즘, 서혜은이 자기도 모르게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나오는 말이, 행동이, 어느 한 사람을 닮아간다.

이대로면 안된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언제 계약이 효력을 다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서혜은은 원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 다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하기로.

그래서 그녀는 의류점으로 가득한 어느 번화가를 찾았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감춰주는 피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개성을 드러내는 도구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옷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다.

새로운 옷을 입은 모습.

그것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옷을 바꿔 입으면서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매력들을 재발견한다.

색다른 스타일을 시도한다.

스타일은 제약이다. 제약은 방향성이다. 방향성은 추진력이고, 그 힘에 힘입어 생각의 저변을 확장한다.

그렇게 서혜은은 한참을 헤매며 질문하고, 고민하고, 의심하며, 대답을 찾았다.

아쉽게도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그녀는 붙임 머리를 몇 개 산 후 아쉬움이 남는 걸음으로 카페를 향했다. 휴일에 괜히 체력을 낭비했으니 당을 충전할 차례였다.

"어? 혜은이?"

밝고 활달한 목소리가 서혜은을 불렀다. 당황하여 주변을 살피니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민하, 씨? 여기에 있었습니까?"

"응, 누구 기다리느라. 근데 왜 말투는 또 딱딱해졌어?"

유민하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서혜은은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태양의 공전 궤도처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옷 사러 왔구나? 스타일이 좋으니까 뭐든 어울리겠다. 아니, 이 말은 좀 그런가? 기껏 꾸몄는데 '뭐든 어울려' 하면 서운하잖아. 그렇지?"

서혜은은 유민하가 부지런히 던져대는 질문들을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싹싹하고 거리감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부터 그럴거야? 저번에 지혜 언니는 언니라고 부르더니, 왜 나만 민하 씨야? 말투도 딱딱하고."

거기서 유민하는 문득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 혹시 그 말투. 현수 선배 따라하는 거야?"

"무, 아니, 아닙니다."

서혜은이 동요를 보이면서 부정하자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 유민하의 미소가 한층 더 짓궂게 변했다.

"현수 선배 일 관련해서 말할 때 그렇게 말하잖아. 다나 까. 그게 신입일 때 입에 붙어서 가끔 나온다더라? 그렇게 생각하니까 선배랑 완전 닮았네?"

"…그렇습니까?"

"어? 웃었지 방금!"

서혜은은 얼른 다시 표정을 숨겼다. 마음이 복잡했다. 괜히 부끄러우면서 무언가 간질간질하고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면 또 다른 질문이 날아와 괴롭힐 것이다. 서혜은은 머리를 굴려 흘러나오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누구를 기다린다고 하셨는데, 혹시 윤현수 대장님이랑 약속이 있으십니까?"

있다고 하면 그것을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내용이었다.

"선배 기다리는 건 맞아. 근데 약속은 아니고."

알쏭달쏭한 대답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밑을 힐끔 살핀 유민하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저기 선배다."

그 말대로, 조금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카페의 테라스 석에서는 윤현수가 번화가를 걷는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것은 김예림이었다.

유민하의 입술이 또다시 싱긋 호선을 그렸다.

"따라가 볼래?"

*

길을 잃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이 알고 있는 길에서 벗어났다고 느꼈을 때, 김예림이 보통 선택하던 것은 현상 유지였다.

길이 다르더라도 방향이 올바르다면 목적지 근처까지는 다다를 수 있다. 어쩌면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찾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다가는 완전히 길을 잃기 마련이니, 차라리 다시 뒤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젯밤, 김예림은 뻔히 알고 있는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걸음을 옮겼다.

헤비 박스로 들어가지 않은 윤현수. 이것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어떤 변화로 이어질지 알 수 없기에 미래는 혼란스러웠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훈련하고 힘을 비축해야 할 터인데…

김예림은 지금 윤현수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차피 내일도 쉬는데 보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봐. 난 상관 없어."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김예림은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질문했다.

"왜… 저를 부른 거예요? 선배 옷 사려고 부른 건 아니잖아요."

"아니, 그냥 너한테 고마워서 이러는 거지."

윤현수의 의도는 순수했다.

전날 밤 김태균과 김예림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김예림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 순간 윤현수는 김예림이 너무나 먼 존재로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손을 내밀면 사라져버릴 듯한 덧없음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고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윤현수는 그의 기특한 후배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김예림이 마치 이별을 준비하듯이 망설인다고 해서 그 장단에 맞출 생각은 없었다.

만약 정말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니.

그래서 윤현수는 먼저 김예림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도움 받은 것에 대해 최소한의 답례를 하고 싶었다.

다만, 그 수단이 문제였다.

"민하는 같이 쇼핑 가자고 하면 좋아하더라고."

입방정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왜일까. 피부를 찌르는 듯한 이 긴장감은. 내가 무슨 말 실수를 해서 이렇게 된걸까?

역시 민하를 언급한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셋 다 기특한 후배'라고 머리 속에서 카테고리를 만들어버린 바람에 무신경한 말이 쉽게도 튀어나왔다.

거리는 혼잡했다. 그냥 걸어가면서 가게를 훑어 보는 사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흘리지 않을지 힐긋 살피는 부모, 친구인지 연인인지 모를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 벤치에 앉아 쇼핑백을 정리하는 사람.

그 중에 정면을 바라보며 말없이 걷는 사람은 김예림 혼자뿐이었다.

내가 아는 쇼핑은 이런 게 아닌데. 민하나 지혜랑 가면 여기저기 들리느라 정신이 없던데. 아니 뭐지? 어떡하지?

어색함을 풀겠다면서 괜한 대화를 시도하면 역효과를 부를 것이다. 대화를 받아줄지도 알 수 없고. 혼자서 떠들기 시작하면 어색함은 더 심각해진다.

그래도 아예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대로 안 좋다. 한두 마디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슬쩍 던져보자.

적절한 성의나 진심을 보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정확히 왜 화가 났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쓸만한 방법이 아니다.

게다가 방금 전의 흐름을 생각하면… 제대로 지뢰를 밟고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나도 모른다.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그래서 지금의 기묘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예림이는 정면을 보며 뚜벅뚜벅 걷고, 나는 계속 시선을 돌리며 어떻게든 예림이의 기분을 풀어줄 단서를 찾아 다닌다. 옆에서 봤으면 웃겼을 것 같은데, 나도 기왕이면 이런 건 구경만 하고 싶다.

"어쩌다 휴식조에 주말이 걸렸네. 평일에 쉬는 것도 괜찮은데."

적당히 떠오르는 무난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거리를 훑었다. 별 눈에 띄는 것은 없다.

"혜은이 실력 많이 늘었더라. 너랑 있으니까 더 빨리 성장하는 것 같아."

꽤 눈에 띄는 간판이 있었다. 아니, 별 볼 일 없는 가게였는데 이상하게 간판이 눈에 걸렸다.

"이번에 새 통신기 보급된다더라. 통신 방해는 적은데 범위가 넓어져서 그렇대."

간판에 기묘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검은색 얼룩 같기도 하고.

비늘 무늬 같기도 했다.

"예림아."

시내의 지도를 머리 속으로 그려내면서 주변을 살폈다. 비슷한 흔적을 몇 군데 더 찾을 수 있었다. 마른 정도는 제각기 달랐다.

"예림아?"

그제서야 예림이 이쪽을 보았다. 아니, 얼굴은 돌렸는데 시선은 피하고 있다. 약간 붉어진 얼굴로 무언가 뜨덤뜨덤 말한다.

"저, 선배. 손…"

손?

아, 내가 잡고 있구나.

그대로 잡아당겨 예림이를 끌고 인파를 빠져 나왔다.

살짝 꺅, 소리를 들린 것 같았지만 사과를 할 시간은 없었다.

사냥감이 저기 있으니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