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6
* * *
지금은 없는 어느 찰나에.
"오, 예림아. 잘됐다. 나 좀 꺼내주라."
그 남자는 잔해 사이에 파묻힌 채로, 해맑게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의수를 흔들 때마다 부러진 손목이 덜렁거린다.
그녀는 남자의 상태를 살펴보고 짧게 말했다.
"이미 틀렸어요."
"알아. 그래도 꺼내줘."
짧은 고민 후 김예림은 파묻혀 있던 윤현수를 꺼내어 볕이 닿는 곳에 눕혀주었다.
"고맙다."
사람 좋게 웃는 얼굴. 김예림은 웃음을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항상 이용만 당하네요, 당신은."
"선배라고 부르랬지."
"이제는 아니잖아요."
크흐흐…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이 더 생기 있었으리라.
"그랬지. 이제 선배는 아니지."
그는 타이탄즈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를 붙잡으려고 해도, 막으려고 해도, 죽이려고 해도.
윤현수는 결국 헤비 박스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는 약하지 않았다. 의지도 강했고, 능력도 있었다.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적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굳이 상대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결국 그는 비참하게 버림받아 죽을 테니.
이 모습을 보라. 시한 폭탄이 설치된 연구소에 시간을 끌겠다고 버려져, 온몸이 부서진 채 늘 자랑스럽게 여기던 의수만이 덜렁거리며 겨우 붙어있는 꼴을.
후회하지 않아요? 억울하지 않아요?
라고, 질문하지는 않았다. 답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물어보든, 물어보지 않든.
이전 회차에서도, 그 이전 회차에서도.
항상.
"지혜한테, 미안하다, 전해줘."
그는 바보 같은 말을 남기고 죽는다.
김예림은 그렇게 누워있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어리석은 저항이었고, 어리석은 죽음이었습니다. 저희 방식을 따랐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겠죠."
김태균은 못난 가장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베란다에 불어오는 바람이 슬슬 차가워지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고 파티장에 못지않을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저희의 제안은 합리적이었습니다."
"헤비 박스에게는 합리적이었겠죠. 우리에게는 아니었습니다."
김태균의 눈이 아집으로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점잖은 태도는 집어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를 듯이 가슴을 부풀렸다.
그러나 갑자기 스위치가 꺼지듯, 그의 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의미 없는 일이죠. 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그러면서 놈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깊은 한숨이 연기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게 한 개비를 내밀었다. 제 딴에는 배려심 있는 행동이었겠지만, 글쎄, 먼저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될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을 것이다. 아쉽지만 나는 담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짐작이지만 내가 담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냥 화나라고 하는 짓이겠지. 헤비 박스의 수법은 늘 그렇다.
"그냥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저를 초대하고, 찾아오고, 일부러 도발까지 하셨는데. 무슨 이야기를 준비하셨는지는 들어봐야죠."
아마 내가 화를 내기를 바랬던 것 같다. 이유는 몰라도 그런 흐름이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화를 억지로 참는다는 식의 표정을 짓던 김태균은 내 말에 표정을 씻은 듯 지워냈다.
"도발이라니요. 저는 그저 저희 쪽 견해를 대변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놈은 다시 후, 담배 연기를 내뿜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현수 씨라면 충분히 저희에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요."
공감이라, 심드렁하게 그 말을 흘려듣던 와중 문득 그 단어가 몹시 불길하게 느껴졌다.
합리적. 그래, 합리적이라고.
"현수 씨도 지금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도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지금 녀석이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확인 작업이다.
"문제가 없는 시스템은 없지요. 항상 개선의 여지는 있는 법이고요."
나는 최대한 문제가 되지 않을 말을 골라서 입에 올렸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당연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 당연한 말이, 지금 이 도시에서 통용되고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헌터는 장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게 얼마나 바보 같고 비효율적인 일인지요."
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동시에 이미 전부 알고 있다는 암시 같기도 했다.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도, 지금의 정체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할 수는 없군요."
"각성자의 능력을 보조하고 강화하는 슈트라니, 경우에 따라 지금의 시스템을 뒤엎을 수도 있는 물건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김태균은 이미 슈트의 대략적인 방향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다. 여기까지는 이미 길드 안에서 이미 공표된 사항이니까. 반대의 목소리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중립을 지키고 있었고, 일부 응원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니 나는 최대한 동요를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헛수고였다.
"그럴듯한 거짓말이죠."
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고작 그 수준이었다면, 이렇게 저희가 현수 씨에게 접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슈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적이란 밝혀지는 순간 연구실에 대한 모든 지원이 끊길 수도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면 프로젝트는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되겠지.
"하하… 제 생각에 저희는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물건을 만드시다니요."
김태균은 거의 필터 직전까지 타버린 담배를 난간 밑으로 버렸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것이었다.
이제 알았다. 도발하는 것은 물론,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놈은 이미 내 약점을 틀어쥔 채 나를 가지고 놀고 싶었던 것이다.
"결정하시죠. 저희의 아군이 되던지, 모든 아군을 잃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비로소, 본론이었다.
"이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입니다. 현수 씨는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저희는 뛰어난 인재, 시민들의 지지, 훌륭한 연구 아이디어를 얻겠군요. 이 도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비열한 목소리를 흘렸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내 안의 천칭이었다.
물러설 곳 없는 절벽에 천칭이 세워져 있다.
한쪽 저울에는 그동안 신세 졌던 얼굴들, 앞으로 책임져야 할 얼굴들이 줄지어 담겨 있었다. 떨어뜨리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또 소중한 것들
다른 한쪽 저울에는 단출한 그림 하나가 담겨 있었다.
풍경화였다.
한때 초상화였던.
대답이 정해졌다.
나는 그것을 입에 담으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 담고 있기에는 너무 뜨겁고 괴로운 말이었다.
그래서 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느닷없는 목소리가 내 마음을 서늘히 식혀버렸다.
"여기 있으셨군요, 선배."
잠깐 민하일까 생각했지만, 착각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목소리였다.
"예림아?"
왜 예림이가 이 자리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순간 예림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품 있는 조명이 은은하게 번져가는 베란다에서 깊게 파인 브이넥 원피스가 단순하고도 정갈하게 그녀의 차가운 칼날 같은 본질을 드러내 주었다.
무대 한가운데에 꽂힌 장검처럼, 그 순간의 주인공은 바로 김예림이었다.
차갑고 오연한 눈빛이 나와 김균태 사이를 가로질렀다.
"우연이네요. 둘 다."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제야 서늘해진 심장 속으로 미안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차마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반면 김태균은 금세 반가운 표정으로 둔갑하여 인사를 건넸다.
"저런, 조금 늦게 도착하신 모양이군요.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런 곳을 찾으실 줄이야 꿈에도 몰랐군요."
예림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 냉랭한 기운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글쎄요. 사과해야 한다면 제 쪽이겠죠. 조금 일이 늦어져서 미처 시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실례했군요."
"이런…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일이라고 하시면?"
그때 잠시 그녀의 시선이 나를 스치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칼그버드 공장에 볼 일이 조금 생겨서."
김태균의 안색이 처음으로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금세 여유를 되찾으며 미소를 보였다.
"아, 그곳의 처리 공법은 유명하지요. 저희도 그곳과 납품 계약을 맺느라 꽤 고생이었습니다. 출혈이 심했지만, 감수할만한 일이었죠."
"그렇겠죠. 대량의 괴물 포획용 철망이라니, 어디 가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죠."
김태균은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에 동요하는 마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런, 대외비였던가요?"
예림이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약간의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물건이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하… 양해에 감사드립…"
"하지만."
성큼, 한 걸음 걸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칼날이 목덜미 피부에 바짝 다가온 듯한 긴장감이 휘몰았다.
"그 오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왜 숨기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닿는 것만으로 선명하게 전해지는, 날 끝의 서늘함.
"비밀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더 신중해지셔야겠죠."
그리고 그녀는 김태균의 옆을 지나쳐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팔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어 예림이를 에스코트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대로 김태균을 뒤로하고 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티장 안의 분위기는 조금 느슨해져 처음의 들뜬 기색은 사라지고, 나름의 폐쇄성을 가진 여러 작은 무리들로 나뉘어 있었다.
노크한다면 그 안에 섞일 수 있겠지만.
리드하는 것은 예림이었다. 살짝 으슥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 예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하 씨랑 온 건가요?"
"맞아."
반사적으로 짦게 대답했다. 그 직후에야 뭔가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지만 무엇에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도움을 받았다는 실감은 선명한데, 어째서.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예림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조용히 있던 중 예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길드에서 나가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이번에는 마땅히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질문이 먼저 나갈 것 같다.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왔냐, 어떤 이야기를 한 거냐…
하지만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금 그녀에게 있었다.
다시 예림이 입을 열 때, 그것이 오늘 밤의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는 것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만약에 선배가 길드를 나가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김예림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이 차갑고 아름다운 여인이 내 후배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선배라고 부를게요."
그래서 말을 마치고 떠나는 예림이를 붙잡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민하가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다.
귀여운 후배는 대충 내버려 놓고 무슨 생각이었냐, 하며 엄살을 피웠다.
민하 나름대로 배려하는 거구나, 알 수 있었다.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선배는 후배 기특한 걸 좀 알아야 한다니까요?"
"그래. 고맙다."
"네?"
어리둥절해 하는 민하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니 질색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기특한 후배들을 둔 것을 분명히 기억해둬야 할 것 같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