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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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초대장을 받아들인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선배 제정신 맞아요? 이 옷으로 어디를 간다고요?"
디너 파티를 며칠 앞두고 있던 날, 토벌을 마친 후 복귀하던 와중에 파티에 입고 갈 옷이 화제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민하가 그냥 확인 삼아 물어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영 믿을 수가 없다느니,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느니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결국 집까지 찾아와 아닌 밤중의 시착회를 하게 된 것이다.
"절대 안 돼요."
민하는 그렇게 단언했다. 나는 직접 거기에 반박하는 대신 옆에 있던 지혜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별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열정의 양은 한정되어 있는 법이고, 이미 연구에 모든 에너지를 사용한 지혜는 모든 의욕을 잃은 채 말없이 소파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민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다.
"제가 선배 파트너인데, 이대로는 절대 못 가요. 선배, 내일 퇴근하고 할 일 없죠?"
다음 날, 나는 그대로 민하에게 끌려가 한참을 돌아다녀 정장 하나를 새로 맞춰야 했다. 뿐만 아니라 디너 파티 당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미용실에 끌려가 이런 저런 관리와 셋팅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인형 놀이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감히 말하자면, 그것은 보다 두렵고, 종잡을 수 없으며, 혼란스러운 것이다.
차라리 인체 개조라는 말이 어울리리라.
내 몸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상실한다. 이리저리 사람들이 오가며 내게 무언가 조치를 취한다. 그 조치에 따라 내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변화한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날 내게 일어난 일은 그런 것이었다.
결국 파티가 열리는 호텔을 향해 후들거리며 걸어가는 것은 나였으나 내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 생경하여 거울을 보기가 두려울 수준이었다.
"이제야 좀 보기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평소에도 그러고 다니죠?"
나와는 대조적으로, 옆에 있는 민하는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생기 넘칠 수 없었다. 찰랑거리던 단발머리는 단아하게 정리하고 우아한 디자인의 오프숄더 이브닝드레스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활달함을 숨기는 것은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나보다 세팅하는데 더 오래 걸렸던 거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지친 기색 하나 없나?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걸음을 옮기던 나는 회장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불균형하지만 생생히 살아있는 음색이 이 소리가 스피커가 아닌 연주자들의 손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임을 말해주었다.
부담스럽다.
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냐는 듯 의아한 기색으로 바라보던 민하와 눈을 마주쳤다.
그대로 가만히 있자니 민하가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갑자기 뭔데요…"
어쩐지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지금 내가 더 쑥스러웠다.
"…들어가면 뭐 해야 되냐?"
민망함을 무릅쓰고 던진 질문에 민하는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거 물어보려고 한 거예요? 선배 맞아요?"
즐겁다는 듯 놀리는 듯, 그렇게 생글거리며 물어보니 오기로라도 대답하고 싶은데, 할 말이 궁색했다.
"후배한테도 배울 건 배워야 선배지…"
"언제는 후배한테 뭐든 가르쳐 줄 수 있어야 진짜 선배라면서요?"
"그거는 그냥 선배고, 나는 아량이 넓은 선배라서 괜찮아."
민하는 어휴,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뱉더니 간단하게 말했다.
"그냥 들어가서 호스트 인사 받고, 그 다음에는 알아서 될걸요? 그냥 저 놓치지만 말아 주세요."
"아니 뭔 소리야."
대답도 없이 다시 걸음을 이어가는 민하의 기세에 휘말려 그대로 회장에 들어갔다.
호스트는 나와 면식이 있는 헤비 박스의 간부였다. 그러니까 척 봐도 간사해 보이고 실제로도 마주하기 껄끄러운 놈이었는데, 의외로 별 다른 말 없이 의례적인 인사와 함께 바로 다음 사람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파티의 주최자라는 것은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짧은 생각이 떠오르기도 잠시.
그 직후 예상 외의 인파가 내게 몰려들었다. 그리고 면면들을 살펴보며 나는 내가 지나치게 생각이 얕았음을 깨달았다.
"윤현수 헌터님 아니십니까? 이런 자리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아, 먼저 제 소개를 드리자면…"
"아이고, 현수 아니야? 거, 박규태. 그 양반은 요즘 멀쩡한가?"
"그때 작전 이후로 오래간만에 보는군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서로 아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었다.
유명 길드의 스카우터, 가드의 요직에 있다 물러난 군사 전문가, 충귀종 토벌을 전문으로 하는 헌터.
이 업계에서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모두 제각기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온 것이다.
"이런 자리는 찾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놀랐습니다."
"놀라다마다? 난 저놈 저렇게 옷 입은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니까 신수가 아주 훤하구먼. 진작에 그렇게 입지 그랬나?"
그 원인은 들려오는 대화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타이탄즈가 대형 길드로 부상한 것도, 그 안에서 내가 주 전력으로 인정받은 것도 이미 오래 지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고, 근래 여러 큼직한 사건들에 연루된 탓에 나에 대한 호기심이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것이다.
쏟아지는 관심은 이내 내 옆에 있는 민하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처음에는 지혜인가 했는데, 다시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구만."
"민하 씨군요. 이름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 그 사진에서 그 스카프…"
스카프? 머리가 핑핑 도는 와중 귀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었다.
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려는 차에 누군가 살짝 팔을 당겼다. 어느새 민하가 나와 팔짱을 낀 채 슬쩍 신호를 준 것이다.
그래, 예전부터 이 녀석은 이렇게 타이밍 좋게 핑계를 만들어주는 일에 능했다.
"죄송합니다. 파트너가 조금 지친 것 같아서."
"음? 허허, 그래. 우리가 배려심이 부족했구만."
규태 삼촌이 현직 헌터로 일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대선배 뻘의 길드장님이 어딘가 짓궂은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래, 잠깐 머리라도 식히고 오게. 저쪽에 베란다가 있으니 참고하고."
그분 덕에 편하게 인파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나와 민하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익숙하지 않은 일로 복잡해진 머리를 식혀준다.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나름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장소와 상황이 달라지니 또 별다른 느낌이다.
"선배가 그렇게 당황까지 하고, 따라온 보람이 있었어요."
"왜 그렇게 히죽거리나 했다. 못된 년…"
"에이, 그거 때문은 아니고요."
어쩐지 만족스럽게 웃는가 싶더니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모양이다. 여러 번 생각하는건데, 그동안 받아본 부사수 중에 정상이 없는 것 같다.
"그럼 뭔데?"
"가끔은 선배가 아까처럼 도와달라고 허둥거리는 모습도 보고 싶어서요."
"…아까랑 말이 똑같은데?"
"그런가요?"
민하는 배시시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이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 소근거렸다.
"아무튼, 전 선배 그런 모습도 좋아요."
"아이고… 그래. 고맙다."
그러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 상태로 가만히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점점 밤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을 것이고, 슬슬 돌아갈 생각에 민하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젊은 남자가 사뭇 반가운 태도로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봤던 얼굴이었다.
"김태균 씨."
이번 파티의 호스트이자 헤비 박스의 중역, 김태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파티로군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잠시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나자 김태균은 슬쩍 무언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민하가 얼른 눈치채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저야 요깃거리라도 먹고 있죠, 뭐."
김태균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더니 내 옆, 민하가 떠나고 난 자리에 섰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오는 자리였다.
"어떠셨습니까?"
아마 파티에 대해 묻는 질문인가 싶어 적당히 말을 골랐다.
"와인도, 음식도 훌륭하더군요. 뭐 하나 빠짐이 없었습니다."
"하하, 제 질문을 조금 오해하신 것 같군요."
김태균은 몸을 돌려 나와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제 질문은 지금 윤현수 씨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것을 실감하셨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되물으려는 찰나 놈이 말을 이었다.
"윤현수 씨와, 지금 자리에는 없지만 김예림 씨는 굉장히 주목을 받고 있지요. 여러 사태에 해결의 주역에 서고, 지금도 도시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네, 뭐…"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지요."
놈이 싱긋 웃었지만, 처음 보여주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지금의 얼굴에서는 비릿한 잡내만이 풍겨왔다.
"그 명예는 본디 저희가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당하게도, 사람들은 저희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이방인. 헤비 박스에 붙은 낙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유 없는 텃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부당하다. 참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자면 분위기를 망치기 십상이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발음 하나하나를 신경쓰면서 날 선 말이 나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놈의 멱살을 잡게 될 것 같았으니까.
가까스로 헤비 박스는 우리 사회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헤임달 프로젝트의 성공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헤임달이라도 없었다면 헤비 박스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베테랑이라고, 중견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대다수의 진짜 베테랑들은 이미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아직 그때 헌터들과 가드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책임감을 느끼지는 않으십니까?"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은, 바로 저 깡통들에게 있었다.
"책임감이라."
놈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인류가 살아남는 것, 그것이 저희가 책임져야 할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