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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31화 (31/55)

〈 31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 4

* * *

휴일은 사람의 인생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김예림의 휴일도 비슷했다. 그녀는 주어진 휴식 기간을 최대한 유익하게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납품 확인이라는 핑계로 부산물 처리 공장에 찾아간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총괄실, 김예림 맞은 자리 소파에 앉은 남자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기계에 그런 결함이 있었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괴물들의 부산물을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무모한 행동이다. 어떤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특성이 드러나 뜨거운 교훈을 안겨줄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무모한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다. 제대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현재 인류에게 부족한 자원과 잃어버린 소재 가공 기술을 대체할 수 있는 귀중한 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 치명적인 과실에 손을 댄다.

문제는 때로 그 리스크를 완전히 잊어버린 양 이익에만 현혹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모르셨나요?"

"네?"

"작업 속도를 높인다며 냉각봉 교체 주기를 두 배로 늘렸죠."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의 천성일지도 모른다. 더 큰 이익을 향해 무모하게 몸을 던지는 것. 헌터도 그런 족속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단순히 어리석은 것이며,

자신만이 아닌 도시의 목숨을 통째로 판돈으로 올린다면 단순히 이기적인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급하게 작업 속도를 높여야 했던 이유를 길드 연합에서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저도 궁금하네요."

공장장은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차갑게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도 차갑게 식어간다. 뜨거운 피를 뒤집어써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김예림은 알고 있다. 소파의 팔걸이 밑에 버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버튼을 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또한, 굳이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을 자를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미 겪어본 일이니까. 그저 한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뻐꾸기가 알려주더군요."

그 한마디와 함께 공장장의 눈빛이 변했다. 맥이 풀린 듯 깊이 숨을 내쉬는 남자의 눈에는 체념과 안도감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필요한 게 뭡니까?"

"헤비 박스에 납품하기 위해 특별한 물건을 하나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건 또 대체, 그렇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헛웃음을 뱉으며 입을 다물었다.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그것 이외에는 받지 않겠습니다. 하나 더 준비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죠. 물론, 충분히 안전하게 움직인다면요."

또다시 무의미한 질문이 마음속으로 부상하고, 다시 침잠한다.

공장장은 괜한 말을 하는 대신 마주 앉은 상대를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보았다. 타이탄즈의 유망주. 한때 심각한 슬럼프를 겪으면서 한직으로 내려가는 건가 싶었지만 거기에서 또다시 활약을 보이며 주목을 받은 괴물 신인.

아니, 더 이상 신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둘 수 없다. 문득 그녀가 입에 담은 이름을 떠올린다. 뻐꾸기. 그렇다면 혹시, 시가지 사냥팀으로 내려간 것에도 어떤 내막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김예림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메모리칩을 내려놓고 "연락은 제 쪽에서 할게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탁자 위에 올려진 작은 메모리칩을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집어 조용히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확인은 하지 않는다. 뻐꾸기가 물어다 준 물건이란 으레 그래야 하는 법이었다.

*

공장을 떠난 김예림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 편의점이었다. 깔끔하고 싹싹한 인상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범한 편의점이었다.

낮이었다. 자세한 시간은 텅텅 빈 도시락 매대와 한적해진 점내가 가르쳐주었다.

김예림은 입구에 들어가 매장을 한 바퀴 반 돌았다. 그리고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여기 비닐장갑도 파나요?"

"네. 왼쪽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왼쪽에는 커피머신 뿐인데요."

"아래쪽을 보셔야죠."

"그 아래에는 물받이뿐이에요."

"많이 취하신 모양입니다. ATM기 옆에 화장실로 가는 문이 있으니 이용하시죠."

김예림은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열이 되지 않은 상품들이 선반에 담긴 채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예림은 화장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쪽, 교묘한 각도로 숨겨진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계단 위 낡은 철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노인네를 기다리게 해서 쓰나, 못된 아가씨야."

그는 늘 느닷없이 말한다.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듯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말을 꺼내고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입에 담는다.

하지만 김예림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오늘 그가 언제 어떻게 말을 걸지. 무슨 말을 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 남자의 직업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또한.

테오는 낡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 대고 있었다. 입은 반갑게 웃고 있지만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구겨 넣은 폴로셔츠 위로 우락부락한 팔뚝과 가슴의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테오, 거래를 하러 왔어요."

"애송이가 너무 매정하군. 저번의 반만큼만 귀여우면 간식이라도 쥐여줄 텐데 말이야."

예상하지 못한 대화의 흐름이었다. 아니, 김예림이 이전 회차들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김예림은 남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대화가 길어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허락도 없이? 아주 맹랑해졌어. 처음이랑은 또 다르거든. 마음에 들어."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같은 말은 꺼낼 수 없다.

김예림은 이 정보상이 얼마나 수다스러운 사람인지 이미 겪어 알고 있었다. 그 수다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뭐, 아주 지겹다는 표정이더군.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태도라서 수상했어. 그래도 이것저것 파봐도 아무것도 안나오길래 그러려니 했지. 이 도시에 그런 사람이 좀 드문가."

허허, 하고 웃어넘기지만 김예림은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조사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일 것이다. 문제는 비록 반은 거짓말일지라도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는 말을 왜 본인 앞에서 꺼내냐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무슨, 아주 처음 온 것처럼 벌벌 떨더군. 아니지. 처음 오는 놈들은 강한 척 허세라도 부리지, 그럴 여유도 없어 보이더군. 그렇게 불안해하면서도 기어코 찾아와서는 부탁한 게 말이야."

테오는 말을 하던 와중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턱에 새겨진 흉터가 씰룩거렸다.

"남자 하나를 조사해달라고 했지. 한눈에 알았어. 그런 건 공적인 용무가 아니야. 공사를 분간 못하는 멍청이가 할만한 의뢰였지. 꼭, 자신의 인생을 바꿀만한 남자를 찾았다고 굳게 믿는 소녀가 할만한 의뢰였다고. 자기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그런 철부지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어지간한 말은 그냥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힘들었다.

저번에 부탁한 것은 윤현수에 관련된 조사였다. 전회차의 기억만으로는 알 수 없는, 혹은 이번 회차에는 변화했을지도 모르는 정보들을 조사하기를 부탁했다.

왜 테오가 윤현수에게 관심을 보이는가. 김예림은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아주 어리광을 다 부리는군. 역시, 저번보다 지금이 더 심해. 자기도 잘못된 방향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고집을 부리는 거야. 도망치는 거랑은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지."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해요."

테오는 씨익 웃으면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아주 날이 섰군. 그래, 일해야지. 찾는 게 뭐지?"

김예림은 말없이 테오를 째려보았다. 테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남자한테 괜히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 그만두라고. 어차피 이쪽에서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놈이야. 괜찮은 남자를 골랐군."

능글맞은 노인네. 김예림은 한숨을 토하고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실종된 가드가 있을 거예요. 이름은 이태석. 이 사람 행방을 쫓아주세요. 실종 이후의 목격 정보가 있으면 더 좋고요."

"다시 남자인가? 뭐, 저번 친구보다야 쉽겠군."

"또 있어요."

김예림은 선글라스 너머 테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섣부른 의뢰일 수도 있다. 충분히 신뢰가 쌓여있을지, 테오가 그녀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을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헤비 박스의 처리조에 대해서, 정확히는 근 한 달간 작전 내역에 대해…"

"이봐."

테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딱딱해졌다.

"우리 인연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나름 정이 든 것도 사실이야. 그러니까 경고하지."

"경고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거래를 하러 왔죠."

말문이 막힌 듯 테오는 말을 멈췄다.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테오는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그래. 내가 늙으니 감정적으로 된 모양이지. 철칙도 잊어버리다니 말이야."

이건, 조금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의심하거나,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다른 꿍꿍이를 꾸미거나, 그 정도의 반응을 예상했는데.

아니면 이것도 뒷일을 위한 속임수일까? 김예림은 그런 테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지막 부탁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곧 헤비 박스에서 디너 파티를 열 예정이에요. 그 초대장이 필요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것으로 김예림의 요구 조건은 모두 전달되었다.

테오는 잠시 말없이 김예림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금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

"네?"

"손녀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네."

테오는 또다시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김예림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김예림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나쁘지 않은 거래군요."

그 말에 테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었다.

"그래, 꽤 괜찮지."

불필요한 감정을 거래로 재단하였다. 훗날 적이 될 때도 망설임이 남지 않도록.

다음 접선지와 암호를 전달 받고, 김예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느새 시간은 저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휴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행선지는 타이탄즈 소유의 훈련장이었다.

"개인실로, 그리고 파괴용 더미 열다섯 개. 부탁드릴게요."

"이 늦은 시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직원의 감탄 어린 얼굴을 뒤로 하고 배정 받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루 종일 쌓인 피로로 다리가 무거웠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준비해야 할 것은 많았고, 시간은 주어진 만큼만 사용할 수 있다.

문이 열린다. 방 안은 서늘했다.

준비된 더미는 열 다섯 개. 하나하나가 공격에 특화된 A급 각성자의 공격도 너끈히 견뎌낼 만한 것들이다.

김예림에게는 파괴 자체에 특화된 능력이 없다. 다양한 능력을 조합하여 적들의 발을 묶고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위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그녀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이제는 부족하다.

순수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지워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를 바랬다.

김예림의 손에 빛이 어린다.

눈꽃이 피어오르고 바스라지며 별가루를 흩날린다. 빛은 다시 모여 눈꽃을 피워낸다.

방은 점점 더 차가워지지만 그녀는 추위에 떠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그 이마에 땀이 한 방울, 두 방울 씩 맺히기 시작한다.

차가운 밤, 차가운 방 안에서 그녀는 힘을 쌓아올리고, 분해하고, 다듬는다.

그녀의 남은 휴일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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