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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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파티? 헤비 박스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어코 내 케이크를 다 쳐 먹은 최지혜와 헤비 박스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그렇게 폐쇄적인 조직에서 대체 무슨 행사를 하는건지 궁금해 열어봤더니 예상 밖으로 디너 파티를 할 테니 부디 참석해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튀어나온 것이다.
"어. 대충 정장 입고 드레스 입고 딴딴딴 하는 그거. 호텔에서 한대. 이것 좀 봐"
"설명하려면 똑바로 하던가 딴딴딴이 뭐야. 너 가본 적 없지?"
"넌 가봤냐?"
"없지…"
일단 주는 대로 편지지를 확인했다. 역시 잘 모르는 호텔이었다. 위치야 일 때문에 외우고 있지만 가본 적은 없다.
애초에 지혜나 나나 그렇게 호화스러운 삶에 얽혀본 적이 없었다. 아예 기회가 없었냐면 그건 아닌데, 그럴 때면 그냥 규태 삼촌한테 떠넘기고 없던 일로 했다.
그래서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디너 파티는 드라마로 본 게 전부인데. 나는 고민 끝에 지혜에게 질문했다.
"가서 춤도 춰야 되냐?"
"어, 아닐걸? 몰라. 아니겠지. 근데 가게?"
"고민 좀 해보고."
다른 곳이었다면 부담 없이 편하게 갔을 텐데, 헤비 박스에서 주체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깡통 새끼들을 어떻게 믿고 가냐?
가드들은 전반적으로 진지하고 좀 심심하기는 해도, 나름 순박하고 인간미 있는 친구들이다.
헌터들은 그, 인간미라는 게 좀 과한 새끼들이고. 그래도 나름 자존심이 있는 놈이라 선을 넘지는 않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딱 부러지게 정리될 수는 없겠지만 조직에 몸을 담다 보면 그런 성미 같은 것들이 몸에 붙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솔저라는 놈들은 조금 꺼림칙하다.
병사 계급에 있는 놈들은 고지식하고 딱딱하기 그지없다. 말하는 법도 통일된 교육을 받는 건지 어느 놈을 데려와도 똑같은 소리를 똑같은 목소리로 반복한다. '작전 지시 사항을 준수하십시오.' 운운하면서.
문제는 그 간부들은 그 반대에 있다는 거다.
그동안 여러 명의 간부급 솔저들을 만나봤는데, 하나같이 속이 음험하고 능글거리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실실 쪼개거나 남의 말 잘라 먹으면서 재수 없게 구니 솔직히 상대하기가 싫다.
절대 충성하는 딱딱한 병사들과 음흉하고 귀족적인 간부들?
매우 불건전하기 짝이 없는 구도이다. 어떤 지저분한 함정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일단 가기는 가야지. 이놈들 괜히 집요하고 속 좁아서 안 가면 나중에 트집 잡는다 분명."
하지만 함부로 무시하고 없는 놈들 취급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조직이었다. 우수한 장비와 병력, 자본력으로 입지를 슬금슬금 늘려나가고 있으니.
"그래? 그래."
지혜는 관심 없다는 듯 봉투를 팔랑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용물을 꺼냈다.
"근데 누구랑 갈 거야? 두 장인데."
"너."
"싫어."
단호하다. 안 그래도 귀찮은 걸 싫어하는데 헤비 박스에 감정이 좋지 않으니 더 단호한 것 같다.
"나 말고 예림이나 민하. 둘 중 하나 데려가면 될 거 아니야."
"아니, 애초에 꼭 둘이 가야 되냐? 내 앞으로 왔으니까 나만 가면 그만이지."
"뭘 모르네."
지혜는 초대장과 봉투를 겹쳐 부채처럼 만들더니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여자면 그런 곳에 갈 때 에스코트를 받고 가잖아. 누가 에스코트 하느냐에 따라서 여자 인상도 달라지고. 반대로 말하자면 남자가 디너 파티에 갈 때 파트너도 없으면 초라해 보이는 거지."
"선생님, 현실은 로맨스 판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말이 틀렸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낡은 사고방식 아닌가 싶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대답을 꺼내지 못하고 괜히 인상이나 찌푸리는 동안 지혜가 또다시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아니면, 아니면 혜은이 데려가던가."
"기어코 미쳤구나."
"혜은이 데려가면 바로 분위기 개박살 낼 수 있는데 이 각을 놓치네."
"뭔 소리야…"
그러니까, 혜은이를 데려가면 그 재수 없는 깡통들 파티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괜찮은데.
나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시다. 나 진짜 쪽팔려서 쓰러져 토하고 죽을 수도 있어."
"그래? 그래도 걔 상황은 좀 가리면서 그러잖아. 반말하는 것도 너한테만 그렇고."
"모르냐? 혜은이 요즘 나한테 은근슬쩍 존댓말 쓰는 거."
그 말에 지혜가 이해가 안간다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은근슬쩍 반말 하는 거 아니고?"
"몰라. 이상한 설정 캐릭터 또 하나 미는 거 같은데."
"…그냥 귀엽게 봐줘."
지혜는 피식 웃더니 초대장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그래서 누구랑 갈건데? 예림 씨? 민하?"
결국 저 두 명의 이름이 남았다. 김예림. 유민하.
공교로운 일이다. 요즘 내 고민거리도 저 둘이 중심에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그 둘, 그때 대체 왜 왔을까? 나 문 앞에서 둘 살벌한 거 보고 도망칠 뻔 했잖아."
"내가 아냐? 씻고 나오니까 바로 그 꼴이었는데."
얼마 전 민하가 평소처럼 야식을 먹으러 현수와 지혜네 집으로 왔을 때 난데없이 예림이와 혜은이 찾아와 낭패를 봤다.
왜 낭패냐고 하면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정신적인 의미에서 난장판을 만들고 살얼음판을 깔아 놓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와 지혜는 잠시 머리를 맞대고 그날 일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지혜 넌 뭐 짐작 가는 거 없냐?"
"내가 뭐 너희 팀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함부로 아는 척하는 것도 그렇기는 한데…"
저렇게 미리 도망갈 길을 파두는 것을 보니 여전히 확신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내 결심한 듯 흐리던 말끝을 확 정리해버렸다.
"역시 민하가 들어오고 팀에 불화가 생긴거니까, 그게 문제인 거 같아."
"아니 그게 뭔데?"
"실적이지."
실적? 생뚱맞은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니 지혜가 신중한 태도로 설명을 덧붙였다.
"너도 알겠지만 둘 다 들어오고 나름 유망주 대우 받으면서 활동했잖아? 물론, 둘 다 한동안 힘든 시기를 보내기는 했지. 민하는 타이탄즈 나가면서, 예림 씨는 그 슬럼프 때문에."
지혜는 나에게서 이미 그동안의 사정을 대부분 전해 들은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추측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그러니 같은 팀에 들어온 지금 그 프라이드가 불화를 일으키는 거 아닐까? 안 그래도 민하는 예림 씨 들어오고 나서 밀려난 느낌도 있었으니까 더 심할 수도 있고."
"그랬나?"
"민하는 유망주라고 해도 예림 씨처럼 엄청 폭발적으로 유명하지는 않았으니까. 네가 그런 거 신경 안 쓴 것도 있고. 그런데 예림 씨 오고 나서는 뭐…"
여전히 그랬나? 싶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사리에 맞는 이야기 같았다.
그렇게 보면 짚이는 것도 있었다. 근래 들어서 예림이는 내게 갑옷이나 슈트를 부탁하는 일이 없었다. 차츰 단독 임무도 늘려가고 있고, 생각해보면 저번 회의에서도 유독 의욕을 내면서 의견을 냈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 분위기는 무슨 치정 싸움인 줄 알았거든? 서로 기싸움하는거?"
"미쳤냐?"
"아니, 일단 들어봐. 그런데 앞뒤 사정을 보면 예전 유망주끼리 신경전이었던 것 같다고. 애초에 그 자리에 제대로 된 남자도 없었고."
"나는?"
"니가? 미쳤냐? 너도 아닌 거 알면서?"
피식 비웃는 꼴이 얄밉기 짝이 없다. 괜히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역시 내가 부사수 키우는 실력이 있는 거지. 이렇게 의욕 넘치는 후배가 둘이나 생기고."
"제발 개소리는 하지 말고."
지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타박을 놓더니 다시 한번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둘 중에 누구 데려갈래?"
결국은 원점이다. 다른 부탁할 사람도 없고 둘 중에서 골라야 하는데…
"굳이 따지면 민하지."
"왜?"
"어? 편하니까?"
막상 이유를 설명하자니 쉽게 대답이 안 나왔다. 하지만 조금 더 궁리해보니 대답이 나오는 것 같다.
"예림이한테는 그런 부탁 하기 어려운데, 민하야 뭐, 내가 평소에 해주는 게 얼마인데."
"얼마인데?"
"몰라! 아무튼 많겠지."
지혜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쏘아보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민하는 그런 거 이야기 하기 부담 없기는 하지."
"무슨 느낌인지 알겠지 대충?"
"그치. 오히려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잠시 서로를 보며 낄낄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민하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무슨 일이에요? 선배가 먼저 전화를 다 걸고?
"민하야. 갑자기 미안한데, 혹시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있어?
흠, 글쎄요? 만들어줄까요? 선배 부탁이면 뭐…
"리츠다이아 호텔에서 디너 파티, 초대장, 두 장."
갈게요.
"그래야지."
흐뭇하게 전화를 끊고 나니 어이없다는 시선이 날아오고 있다.
"생각보다 엄청 쉬웠네."
지혜에 말에 괜히 민망해져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민하도 은근히 보면 대충대충이더라? 너 밑에서 배워서 그런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걔는 처음 봤을 때부터…"
말을 하다 보니 떠올랐는데, 처음에는 인상이 많이 달랐다. 뭔가 좀 더 거리감이 있고 예의 차린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저렇게 됐나.
"너랑은 모르겠고, 나랑 처음 봤을 때는 이미 저랬어."
"저랬다는 게 뭔데?"
애매모호한 대답에 질문을 던지니 전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 같아."
나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고서 말했다.
"지랄 마."
"너나 지랄 하지 마. 너랑 똑같구만."
"야, 내가 언제 저랬냐? 내가 훨씬 점잖고 신중하지."
"개소리 마라."
가당치도 않게 진지하고 단호한 말투로 지혜가 말했다.
"민하가 저렇게 너처럼 가벼운 사람이 된 건 무조건 네 책임이다."
"왜 그게 내 잘못?"
"저번에 네가 후배 잘못은 선배 잘못이라며."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별개다.
"아니, 애초에 나처럼 되는 게 왜 잘못인데?"
"너 같은 사람은 한 명이라도 적은 편이 좋아.”
"지금 너 저번에 염력 보조 장치 가지고 한 소리 한 거 때문에 이러지? 케이크로 봐준다며?"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네가 그러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아…"
그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와 지혜 모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솔직히 '너도 없잖아' 같은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해봐야 양쪽 모두 상처만 받을 뿐이니.
바로 그런 말을 하고 스스로 상처 받은 당사자가 눈 앞에 있기도 하고.
서투르게 위로하는 대신 조용히 에둘러 질문을 던졌다.
"…너 내일 휴일이지?"
"너도?"
나는 말없이 찬장을 열어 잔을 꺼내고 안주 재료를 꺼냈다. 지혜는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고 식탁을 준비했다.
간단히 안줏거리를 볶아낸 후 아무 말 하지 않고 서로 잔을 비웠다.
그렇게 시작한 술자리는 결국 '나는 연구하느라 바빠서 그랬으니까 너보다 낫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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