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2
* * *
그는 가드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헌터가 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낙오자라고 느끼기도 했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구했을 거라며 자조하기도 했다.
스톰브링어 중기관총의 사수가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폭풍과 같이 쏟아지는 총탄들은 그의 번뇌를 씻어내리기에 충분했고, 가드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세워주었다.
우리에게는 헌터들처럼 강력한 초능력은 없다. 하지만 뛰어난 장비와 조직체계가 있다.
그리고, 어지간한 괴물도 종이짝처럼 갈아버릴 수 있는 중기관총이 있다.
또한, 스톰브링어는 무적이다.
따라서, 중기관총을 들고 있는 나는 무적이다.
지나치게 총탄을 남용한다며 상관에게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그는 주눅 들지 않고 그의 사랑스러운 애인과 전장에 나갈 날만을 고대했다.
가드들의 장비 중 가장 뜨거운 화력을 자랑하는 이 병기는 지나치게 엉덩이가 무거워 좀처럼 출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일단 출전하기만 하면 약속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스톰브링어만 있다면 헌터들도 필요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헌터들이 불쌍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그런 동정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전한 엄폐물, 그의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기관총, 그 안에 장전된 대괴수탄들.
평소 그에게 전능감을 가져다주던 조합조차도 그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한 소녀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
차가운 인상의 소녀. 표정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 그저 무감정하다.
작고 가냘픈 몸은 헐렁한 펑크 패션과 기묘한 부조화를 연출했고, 그러면서도 어울렸다.
그 소녀가 손가락을 튕긴다.
크르륵, 하고 괴물 하나가 쓰러져 죽었다. 괴물이 미처 다물지 못한 칠칠치 못한 주둥이에서는 재와 핏물이 섞여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소녀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보라색 불꽃이 잠시 튀는 듯하더니 괴물 셋이 또다시 재를 토해내며 죽었다.
괴물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어두운 본성이 그들의 등을 떠민 듯 사방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와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제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듯 달려드는 그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소녀가 처음으로 크게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그는 소녀의 손에 어느샌가 혼탁한 보라색의 사슬이 쥐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너무도 진한 보라색. 영예와 영락을 동시에 암시하는 불길한 색깔. 높이 날아오른 자, 크게 추락하리라.
그 사슬은 살아있는 뱀처럼 요동치며 모든 괴물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빨래터에 널려있는 것처럼 사슬에 꿰인 채 흔들거리던 괴물들이 사슬이 사라짐과 동시에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눈과 코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고, 몸의 뼛대가 풀썩 주저앉았다.
"…오늘도, 내 상대는 없는 건가."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갔다.
그는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는 똑똑히 들었다. 그녀가 말을 마치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크아악…]거리는 짐승의 신음 소리를.
짐승은 배가 고픈 듯했다. 굶주린 것 같았다. 아쉬움에 지르는 비명과 같았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는 소녀의 안에서 들려왔다.
현장 정리 들어가지.
무전 소리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무전 내용을 되새겼다. 정리, 정리해야지.
그는 탄과 총기를 차량에 수납한 후 정리조에 합류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소녀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 아이는, 새로운 타이탄즈의 유망주가 분명하다.
소녀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혼자만이 아니었다. 다른 가드들도 잠깐씩 휴식을 취하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예림 다음 세대의 초신성이라느니, 아직 졸업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채용을 받았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소녀가 다소 냉랭한 태도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할 때에도 누구도 그녀를 나무랄 수 없었다.
*
서혜은은 윤현수가 보고 싶었다.
제발 빨리 와서 이 가드가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지 가르쳐줬으면 했다.
전투를 하는 건 차라리 단순하고 익숙해서 좋았다. 처음에는 굳어 있던 움직임도 실전에 익숙해짐에 따라 부드러워졌고, 김예림이 새로이 가르쳐준 기술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불꽃을 압축하여 주변 피해 없이 내부에서부터 괴물을 불태우는 기술이나, 무기를 만드는 요령 같은 것은 서혜은이 혼자서 연습했을 때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서혜은은 윤현수와 김예림의 가르침 아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한 가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현장에서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헌터가 해야 할 의무에 관한 것이다.
가드가 이것저것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당연히 알고 계시죠?'하는 몇 가지 전제가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서혜은은 당황과 혼란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때 서혜은의 호출을 받고 구세주가 등장했다. 김예림이었다.
하지만 서혜은은 그것을 반가워해야 할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지원 활동에서 복구 내역서는 월말에 한번에 처리될 거예요. 주간 내역으로 정리해서 사무 쪽으로 한 번에 보내주세요."
그 말과 몇 가지 서명으로 서혜은을 괴롭히던 절차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서혜은은 다른 의미에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서류를 확인하는 김예림의 새하얀 코트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윤현수의 슈트를 입고 있지 않은 것이다.
김예림은 윤현수가 당연하다는 듯 내민 손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혜은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그녀가 알기로 김예림은 윤현수가 옆에 없을 때 알게 모르게 불안감을 드러냈다. 표정이나 말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불안은 전투하는 자세에서 드러났다. 슈트와 윤현수, 둘 다 없을 때는 김예림의 전투는 극히 신중해졌고 방어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지금 김예림은 윤현수 없이, 슈트 없이, 심지어 다른 서포트도 없이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김예림과 서혜은이 윤현수의 집으로 쳐들어간 이후 그렇게 변했다.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서혜은은 그날 이후 김예림 안에서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지 두려워하며 다시 김예림의 눈치를 살폈다.
김예림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흔들림 없이 담담했다.
*
김예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민하와 윤현수가 이미 그렇게 친한 사이라는 것은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다.
미래에 유민하와 윤현수가 사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김예림은 살아남기 위해서 윤현수의 곁에 있고자 했던 것이다. 혼자 있으면 불안했기에. 그가 곁에 있으면 괜찮았기에.
그렇지만 이제 그녀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다. 괜찮았다. 윤현수와 같은 편에 서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하니, 언제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머릿속의 체크리스트를 정리했다.
그중 몇개는 이미 체크가 되어있었다. 부숴지도록 미리 방치해야 할 건물, 절대 죽으면 안되는 인물들 같은 것들.
잘못 건드린다면 윤현수가 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는 변수들의 목록이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헤비 박스.
다시 한번 가슴 깊숙이 새겨 넣는다. 헤비 박스만큼은 안된다.
거기만 아니라면 윤현수는 그녀 곁에 남아 있어줄 것이다.
괜찮다.
곁에 있어준다면, 그냥 후배로도 괜찮다.
괜찮아.
그래야 해.
*
최지혜는 간만의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실험실에 새로 인원이 배치된 이후로는 이전보다 훨씬 바빠진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체력으로 꿇리지 않는 그녀도 피로로 허덕일 수준으로.
하지만 어느 정도 적응 기간이 끝나고 나니 며칠 정도 휴식을 취해도 될 수준에 이르렀다. 게다가 인원이 늘어난 만큼 자원 소모 속도가 빨라져서 물자가 동이 나는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물자를 새로 들여오기까지 시간이 붕 뜨게 되었다. 그래서 최지혜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녀를 포함한 실험실 인원들의 휴식을 결정했다. 한창 가속이 붙던 와중에 맥이 빠지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즐겨야 한다.
……근데 할 게 없다.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며 빈둥거리던 최지혜는 막연한 불안감에 쫓겨 거실로 나왔다. 하도 일에 시달렸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윤현수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답지 않게 깨끗하게 정리하는 놈이다. 특히 책장을 꼼꼼하게 정리해서, 그녀가 찾는 책을 찾기 편했다. 최지혜는 책장을 가볍게 훑어보고 마음에 드는 제목을 골라 몇 권 꺼내 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그 녀석이 콜드 브루를 내리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어렵지 않게 더치 커피 원액을 찾을 수 있었다. 때마침 유통기한이 애매한 우유도 남아 있어 더치 라떼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우유를 꺼내는 와중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잼의 위치가 이상하다. 그놈이 이렇게 정리할 리가 없는데? 하고 슬쩍 잼을 치워보니 교묘한 각도로 조각 케이크가 숨겨져 있었다.
괘씸죄로 압수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잔에 얼음을 채우고 우유, 더치 원액을 차례대로 넣는다. 가볍게 저어준 후 포크와 쟁반을 챙겨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간식과 함께 독서를 즐긴다. 소설은 판타지로, 마탑에서 드래곤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그들에게서 마법 기술을 뜯어낸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우리도 어디 편리한 외계인이나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고 있자니 통신기가 울렸다.
실험 끝. 지금 통신 되냐?
"그래?"
이후 몇 가지를 확인하고 통신을 끊었다. 실험 데이터도 얻고, 케이크를 먹을 명분도 얻을 수 있었다. 뜻밖의 수확에 즐거움을 느끼며 대화 내용을 메모하려고 했다. 볼펜은 보이는데 메모지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책의 빈 페이지에 메모해두었다.
메모를 마친 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흐르고 흘러 소년이 모든 마법사들에게 복수를 서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동적인 결말에 만족감을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너무 오랫동안 책만 읽느라 몸이 뻣뻣했다. 더군다나 배도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산책도 할 겸 찬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볶음밥. 그렇게 결정하고 필요한 재료들을 몇 개 사서 바구니에 담았다.
생각해보니 윤현수가 싫어하는 재료가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빼려다가, 애새끼도 아니고 아직도 반찬 투정을 하는 꼴이 괘씸해서 다시 집어넣었다. 어차피 볶아버리면 티도 안 난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우편함을 확인했다. 우편물 중 받는 사람이 윤현수 앞으로 된 것도 있었지만 나중에 전달만 해주면 그만이다.
찬거리를 대강 냉장고에 집어넣고 우편물을 확인하는데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빛을 전부 삼켜내는 깔끔한 검은색. 고급스러운 감촉. 선명하게 떠오르는 금색으로 새긴 글씨.
헤비 박스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윤현수 앞으로 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