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28화 (28/55)

〈 28화 〉 단단하고 무거운 상자 ­ 1

* * *

사냥조, 지원조, 휴식조.

현재 시가지 사냥팀이 3교대로 돌아가며 맡고 있는 업무 중에 가장 고되고 힘든 것을 꼽으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사냥조 업무가 나온다.

별일이 없더라도 계속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괴물들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 그러던 중 교전 중 도주한 괴물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그 장소로 이동해 추적을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시민들에 의해 목격 보고가 올라왔을 때이다.

'괴물을 봤어요. 자세히는 못 봤지만 덩치가 엄청나게 크고 빨랐어요.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어요.' 이런 식의 신고가 들어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날 퇴근은 글렀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 인근에서 괴물을 찾건 둥지를 찾건 해야 철수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사냥조 업무에서 벗어났을 때는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도저히 그럴 분위기는 아니라 단념했지만.

아무튼 나는 간만의 기회를 맘껏 만끽하기로 마음먹었다.

허락된 자유 안에서 약간의 일탈을 저지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일.

내가 주먹을 날렸을 때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괴물의 복부에 작렬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주먹 쥔 의수가 강타한 지점을 중심으로 주황색의 파장이 퍼져나가며 열과 충격을 퍼뜨린다.

괴물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나고 나서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이족보행을 하는 생물이 폐를 당했을 때 흔히 보이는 반응이다. 필사적으로 호흡을 되찾으려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본능에 새겨진 패턴.

그러나 그런 반사적 행동은 때로 생존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이 된다.

내 오른손에 쥐어진 볼품없는 막대기, 그 안의 회로에 간섭해 스위치를 올린다. 그러자 단말에서 노란색의 빛이 피어나며 하나의 칼날을 이루었다.

옛 신화 속 신들이 번개를 길들여 휘두르듯이, 막대한 에너지가 도신을 이뤄 이글거리는 모습은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낸 기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적은 누군가의 재앙이 된다.

검이 빛이 궤적을 그리자 괴물의 목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익어버린 절단면에서는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아 그것이 방금 전까지 살아있었다는 실감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보복이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사족보행을 하는 괴물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들었다.

이런 행동 때문에 야수종은 한때 동료애가 특징적인 괴물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니터로만 몬스터를 겪어온 학자들의 착각이다. 놈들은 그저 공격을 한 뒤의 빈틈을 노리는 것뿐이다.

그 비열한 기습을 저지한 것은 죄어오는 염력이었다.

의수의 어깨 파츠에 장착된 염력 보조 장치가 작동한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끈과 매듭이 놈들의 아가리와 목을 얽매여 조였다.

상상 속의 굴레가 현실이 되어 놈들을 공중에 박제한다.

그렇게 쥐어 부스러뜨릴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개중 하나가 풀려나고, 또 하나가 풀려난다. 그렇게 동시에 이루어졌을 기습은 두 차례로 나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차례대로 죽였다.

마지막 남은 녀석은 크르륵, 하는 울음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뒤로 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수종은 용맹하다, 난폭하다? 그렇지 않다. 그들은 본능에 가장 솔직할 뿐이다. 생존을 원하는 속삭임에.

그렇지만 저렇게 단단한 껍데기에 육중한 체격을 가진 놈이 저렇게 꼬랑지를 말고 도망가는 모습은 지나치게 추하고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원 사격 요청합니다."

­화망 안에 헌터님이 들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일반탄이면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좌표 통신이 끝난 뒤, 놈의 껍데기 위로 총알 세례가 쏟아 부어진다. 마치 묵직한 폭포수를 정면에서 얻어맞는 듯한 충격에 놈이 휘청거리다 끝내 쓰러진다. 나는 그 위로 몸을 던졌다.

내 몸 위로 총탄이 쏟아진다. 하지만 피부에 닿기 직전 방어장이 작동하며 모든 충격을 흩어낸다. 그 뜨거운 장대비 속에서 오른손에 든 검을 내리 찌르고, 그 폼멜을 왼손으로 밀며 다시 충격파를 쏘아냈다.

그대로 관통하여, 괴물은 절명했다. 이 일대는 평화를 되찾을 것이다.

"마지막 개체 사망 확인. 실버볼에 현장 지휘권 이양하겠습니다."

나는 괴물의 시체에서 검을 뽑아 들며 마테리얼 칼날을 갈무리했다. 지나치게 무리해서 꽂아 넣었는지 프레임이 살짝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기능에 문제는 없었으니 다행일까.

포위망을 구성하느라 흩어져 있던 가드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면식이 있는 간부와 간단히 상황을 정리한 후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걸음을 돌렸다.

곳곳이 깨져 나간 도로와 엉망이 된 가게들. 그 광경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통신을 켰다.

"실험 끝. 지금 통신 되냐?"

­그래? 빨리 끝났네. 그래서 어땠어?

"FF염류권은 나쁘지는 않은데 충격이 좀 멋대로 흩어지더라. 그래도 활용도는 높고, 응집력 조정이 조금 어렵고. FM마테리얼블레이드는 다 좋은데 효율이 조금… 체력 너무 뺏기더라. 그리고 프레임이 좀 약하고."

­방어역장하고 염력보조장치는?

오늘의 일탈이 바로 이것이었다. 실험해야 할 장비를 실전에서 몇 가지 써먹어 보는 것.

던전에는 게이트 압력 등 변수가 너무 많고 모의전을 구성하는 데에는 예산이 너무 든다. 그래서 그나마 느슨한 지원조 업무에서 장비 몇 개를 가져와 써먹어 본 것이다.

미리 정보를 알고 가니 크게 위험할 일도 없고 정 위험하면 가드들의 서포트도 받을 수 있다.

"역장은 내 스킬이랑 살짝 간섭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괜찮아. 방어 소자 소모되는 밸런스가 좋더라. 그리고 염력보조장치는 그냥… 네 생각나더라.

­너무 가벼워? 아니면 너무 빠른가?

"컨트롤이 안돼. 사용하면서 동시에 몸을 못 움직여. 쓰레기 같아.

­오케이. 브리핑은 잘 해줬으니까 케이크 하나로 봐줄게.

"야."

통신이 끊어졌다.

냉장고 제일 안쪽에 숨겨둔 건데 설마 찾았나? 불안감을 느끼며 걸음을 옮기자니 바람이 살랑 일면서 탓 하고 발을 딛는 소리가 났다.

"선배! 빨리 끝났네요?"

"어, 민하야."

민하는 덥다는 듯 스카프를 느슨하게 풀며 다가왔다.

"그쪽은 끝났고?"

"그럼요. 헤비박스 쪽 장비가 좋기는 하더라고요. 저도 활 대신 총이나 배울 걸 그랬어요."

"넌 총보다 활이 더 어울려."

"그래요?"

민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스카프를 완전히 풀더니 내 팔에 묶기 시작했다.

"뭐하냐?"

"그냥요."

이쁘게 매듭까지 묶은 후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다.

땀내 나는 솔저 새끼들이랑 일하다가 미쳤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만하다. 그놈들은 같이 일하기 진짜 피곤하지. 그냥 내가 갈 걸 그랬다.

괜히 조금 미안해져서 건넬 만한 조언을 몇 가지 떠올려보았다.

"총? 말리지는 않을 건데, 가속 원리가 화살이랑 좀 달라서 새로 배워야 할걸. 근데 그런 거 떠나서 그냥 사격은 제대로 익혀두면 좋아. 세상에 총 만한 무기가 어디 있냐?"

"선배가 그렇게 말하니까 배우기 싫어요."

그렇게 옥신각신하다 보니 어느새 통제선 코앞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만큼.

당연하다시피 거기에는 기자들도 섞여 들어가 있었다.

그 뒤의 소란은 생략하겠다.

취재를 하겠다며 달려드는 기자들이랑 터져 나오는 플래시. 무슨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신물 나는 질문들. 그냥 내 이름을 외치고 부르는 사람들.

주저하지 않고 도망쳤다.

근처 골목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있자니 프흐흐, 하고 피식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선배, 왜 그래요? 인터뷰 같은 거 안 해봤어요?"

"그러는 너는 해봤냐?"

"안 해봤어도 선배처럼 그렇게 호다닥 도망은 안 갈 건데요?"

"너도 도망쳤잖아."

"선배 따라온 거죠."

진짜 너무 얄밉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주절거리는 저 주둥이를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선배로서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겨우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진짜 의외네요. 선배 인터뷰 같은 거 안 해봤어요?"

"안 해봤어. 한 번도."

정말이었다. 헌터들이 지나친 인기에 도리어 몸시름 할 때에는 신입이라 마이크가 돌아오지 않았고, 관록이 쌓이고 나니 게이트를 공략하는 게 주된 업무가 되어 헌터 개인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가는 시기였다. 그 외의 우연도 조금 겹쳤겠지만 결과적으로 인터뷰와는 연이 없는 시절을 보낸 것이다.

김예림 갑질 논란 때? 당연히 그냥 대기실에서 박혀 지냈다.

그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피할 수 없는 관심이 반갑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뭐, 전 할 거 다 했으니까 괜찮아요."

"무슨 소리야 또."

"선배가 사진빨도 잘받아서 좋다는 말이죠."

뜬금없는 소리를 하면서 팔뚝을 툭툭 치길래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골목길 바깥으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이제 슬슬 자리를 떠야 할 것 같다.

도망치는 것 같군. 그런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기자들한테 도망 다니고 괴물들은 쫓아다니던 때로.

*

"시대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하나가 불편했다.

"창이나 칼, 활을 들고 다니는 놈들이 영웅이니 뭐니 거들먹거리는 꼴이, 문명사회에서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높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흔들거리고 널찍한 공간 덕분에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음식과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테이블보는 그가 입고 있는 옷보다 고급스러운 것 같았고, 그 위에 얹힌 접시와 음식들은 그의 한 달 월급보다 비쌌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거북하기 짝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불쾌한 것은 건너편에 앉은 상대방 자체였다.

실버볼 소속의 가드, 현오찬 경감은 스스로를 헤비 박스의 심부름꾼으로 소개한 남자와 식사 자리를 갖고 있었다.

"글쎄요. 얼마나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현오찬 경감은 그렇게 운을 떼었다. 재미있다는 듯 올라가는 한쪽 눈썹이 매우 거슬렸지만 참고 말을 이었다.

"헌터들의 무장이 구시대적인 것은 전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게이트를 통과하는 그 압력은…"

"장비들을 망가뜨리죠. 하지만 이제 충분히 극복된 문제에요. 그 압력을 견디는 합성 소재도 있고, 압력으로부터 기기를 지켜주는 특수 용기도 있습니다."

남자는 현오찬 경감의 말을 자르며 우습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무엇보다, 그들의 방어 장비를 보십시요. 그들은 건물 하나를 입고 다닙니다. 그리고 칼과 도끼를 휘두르죠.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현오찬 경감은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불쾌함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에 대한, 그리고 그가 살아온 세계에 대한 모욕이었다.

헌터들의 무장이 투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의 건너편에는 그가 살아오고 겪어온 진실이 우뚝 서 있다.

옛 시절. 최초의 게이트가 열리고, 살아남은 국가들이 연합하여 그 침공을 막아내고, 절대방어선을 구축하고, 그렇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자라나던 시절에.

그것은 찾아왔다.

작은 게이트. 최초의 게이트가 대문이었다면, 차라리 창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그런 게이트.

그것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뱉어내는 괴물의 수는 적었지만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안전지대가 사라졌다. 전선에 물자를 공급할 생산지대가 불타올랐다. 전선은 양분되었고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아 사라지는 군대가 수두룩했다.

최전선에 모든 것을 투자하여 황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인류는 그렇게 멸망하는 듯했다.

그때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선으로 뽑혀가지 못한 초보 각성자들, 망가진 몸으로 은퇴한 늙은 각성자들, 그리고 전선에서 도망친 비겁자들까지.

그들은 힘을 합쳐 괴물들과 싸워나갔다.

능력이 충분히 강한 이들은 약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총기를 양보했다. 대신 그들은 칼과 활, 창을 들었다. 그들은 가장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며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헌터라고 불렸다.

능력이 약한 이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양보 받은 무기를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 단합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드라고 불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통은 지금까지 내려와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헌터들은 초월적인 능력으로, 가드들은 뛰어난 장비와 조직력으로 괴물들을 상대한다.

헌터들의 장비를 현대화하자는 의견은 많았지만 결국 개인용 방호 코트를 개발하는 선에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이미 충분한 화력을 갖춘 조직에서 무기 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낭비로 여겨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현오찬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짐작이 가는군요."

심부름꾼을 자처한 남자는 그 소개에 어울리지 않는 무례한 태도로 웃음을 흘렸다.

헤비 박스라는 놈들은 항상 저런 꼴이었지, 현오찬 경감은 생각했다. 놈들이 도시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부터 쭉.

그들은 도시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해나가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다국적 연합이었던 절대방어선이 하나의 조직에 의해 완전히 일원화되었음을 알렸다.

헤비 박스. 강력한 능력자와 강력한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헤임달 프로젝트의 도입으로 도시의 안전을 가져다 준 조직.

그들은 스스로를 인류를 지키기 위한 단단하고 묵직한 상자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현오찬 경감이 느끼기에 그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보다 불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헤비 박스에서 저 같은 사람을 찾는 이유가 뭡니까?"

왜 헤비 박스에서 실버볼의 가드를 찾아왔는가. 그것도 일개 경감을? 그 의도부터가 의심스러웠다.

가드와 헌터는 태생부터가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우방이었지만 솔저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출신에서부터 행동까지 모든 것이 수상쩍은. 그렇기에 더욱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겸손은 그만두십시오. 가장 위험한 현장에만 투입되시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잘못된 이야기를 듣고 오신 것 같군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렇다고 수뇌부에게 미움받아 소모품으로 푸대접받고 계신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남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현오찬 경감은 더 이상의 모욕을 감내할 생각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현오찬을 남자의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그리고 현오찬은 홀린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쉬어버린 목소리인지, 이빨이 갈리는 소리인지. 남자는 그 울림이 만족스럽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다리 하나 놔주시고, 이야기 조금 들려주시고. 그게 별겁니까?"

답답함과 초조함에 목이 바싹 말라붙어 현오찬 경감은 자세한 내용을 되물을 수도 없었다.

벌벌 떨리는 손이 물잔을 쥐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심부름꾼이 입을 열었다.

"윤현수 헌터와 면식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여 물잔을 잡았다.

물을 마시지도, 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는 현오찬 경감을 비웃듯이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물잔을 비우고 나서야 말을 마쳤다.

"그분께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겁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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