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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23화 (23/55)

〈 23화 〉 음모, 계획, 말썽 ­ 2

* * *

"야, 우리가 남이냐?"

"남남 합시다, 오늘부터."

나는 대답과 함께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없이 단호하고 강경한 태도로.

호구처럼 당해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가끔은 이렇게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뭐 하나라도 더 챙겨줄 거 아니야. 지금이 그때였다. 강하게 나가야 할 때. 좀 더 몸이 회복되고 이야기를 진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 일주일은 근무 전부 빼준다."

삼촌이 벌떡 일어나서 나를 붙잡는데,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말을 받았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제가 이번에 얼마나 다쳤는데."

"벌써 다 나았잖아. 좋아, 그럼 유급으로."

"그것도 당연한 거고. 아니, 어느 동네에서 일하다가 산재로 다쳤는데 병가를 안 준답니까?"

"그건 제대로 다친 놈들 이야기고!"

"억울해서 다음부터는 진짜 아주 제대로 다치고 와야겠네."

박규태 삼촌은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 콧바람을 흥 불었다. 준비한 진짜 카드를 꺼내겠다는 신호였다.

잠시 고민했다. 떠날 때를 놓쳤는데 확인만 할까? 어차피 일주일 쉬는데, 지금 듣고 대답은 나중에 한다고 하면…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힘을 빡 줘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기를 잊지 않았고.

삼촌은 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어 표시해둔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기존/신설 시가지 사냥팀 소속 헌터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그 계약 조건에 대해 명시된 페이지였다.

눈에 불을 켜고 그 페이지를 읽었다. 조건이 얼마나 좋건 간에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낼 생각이었다.

"삼촌 치매 아니죠?"

나는 서류를 받아 들고 조항과 액수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세부 사항들을 눈이 빠져라 꼼꼼히 살펴보았다. 분명 어딘가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 숨어있을 것이다…

없었다. 진짜 제대로 된, 말도 안 되게 후한 조건의 계약서였다. 이 정도면 베테랑 A급이라도 별 이의 없이 계약에 동의할 정도였다.

"아니, 이 조건으로 공표하면 진짜 개나 소나 달려들어서 지원하겠는데요?"

"그러니까, 그러지 않게 제대로 된 놈으로 팀 구성해오라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늑대 변이종, 거미 여왕. 이 두 사건은 사람들의 믿음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오늘의 평화가 내일도 이어지리라는 믿음. 그것이 부서진 자리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우물처럼 꿀렁이며 솟아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비난의 화살이 되어 가드, 솔저, 그리고 헌터들에게 날아왔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뭐했냐? 하는 논조의 비난이 공공연하게 신문과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올라왔다.

억울한 일이다. 우산은 빗물을 막을 수는 있어도 비가 내리는 일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니. 물론 때로 그런 착각이 들어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헌터들은 그런 비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두 사건 모두 해결의 주축에 헌터들의 빠른 초동 대응이 있었으니, 피해가 커지기 전에 사태가 마무리된 것에 헌터들의 역할이 컸다며 긍정적인 반응이 앞섰다.

다만, 몇몇 호사가들의 입에서 '체제의 구조적 결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빗물을 손바닥으로 막으려는 일이다. 그들은 그 단어를 중얼거리기 위해 태어나고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들이 말하는 결함은 이렇다. 왜 헌터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적법한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는가? 그 결과 헌터들이 사건 대응을 위해 불법적인 월권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였다. 박람회에서 소란을 피운 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공식 항의서가 몇 장 날아왔다. '이미 사라진 법령을 근거로 협조를 강요하여…' 운운. 근데 아마 삼촌이 처리해줄 것이다. 설마 이걸 안 해줘?

아무튼 간에, 결과적으로 길드들은 좀 더 정비를 체제하고 유사시 즉각 대응 가능한 헌터 팀을 상시 운용할 것을 '완곡하게 권유' 받았다. 그중에서 타이탄즈는 이미 시가지 사냥팀을 운용 중이긴 하지만 이를 좀 더 확충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리고 조카 부려먹기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삼촌은 그 인원을 구해오라며 내게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팀 하나가 땅에서 솟아나요, 하늘에서 떨어져요? 그냥 길드 안에서 해결하죠?"

"던전 공략할 인원은 남겨둬야지. 팀 하나도 겨우 뺀 건데 인마."

길드 안에서는 인원을 더 이상 할당할 수 없다. 그러니 다른 길드에서 사람을 빼 오거나 무소속 헌터들중에서 괜찮은 놈들을 뽑아 팀을 구성해라. 이것이 삼촌의 요구 사항이었다.

솔직히 이 조건이면 어떻게든 사람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좋은 만큼 아무 인원이나 뽑아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헌터는 이미 계약으로 복잡하게 묶여있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적지 않게 발품을 팔아야 할 텐데… 나는 괜히 계약서를 째려보며 불만을 쏟아냈다.

"아니 무슨 조건이 이렇게 좋아요? 사람 부담스럽게. 옛날 대기조는 이런 조건 아니었잖아요."

옛날, 그러니까 헌터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괴물들을 겨우겨우 토벌하고 다니던 시절의 상시 근무조는 훨씬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일은 당연히 더 빡세고 위험했고.

10년째 길드장을 역임하고 있는 늙은 헌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더 챙겨줬어야 했는데, 그때 시절이 조금 고달팠냐."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하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삼촌의 미소는 서글퍼 보였다.

*

"그렇게 된 거지."

나는 그렇게 상황을 설명한 후 입을 닫았다. 면허를 딴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주차는 긴장된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집중하여 핸들을 돌린다. 완벽하고 반듯하게 주차를 마쳤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를 토해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래, 그래서 나를 새로운 팀에 넣어보고 싶다는 건가? 사람 보는 눈이 괜찮군."

혜은이는 차에서 내리며 그렇게 물었다. 감추려 애쓰고 있지만 뿌듯한 기색이 숨길 수 없이 새어져 나온다. 아니 왜 이렇게 얄밉지?

"새로운 팀은 아니고, 지금 우리 팀에서 인턴으로 시작하는 거지. 나랑 예림이, 그리고 너까지 3명."

나는 그렇게 설명하며 슬쩍 혜은이의 눈치를 살폈다. 저번 사건 이후 예림이와 혜은이 사이의 기류가 이상했다. 예림이는 뭔가 미안한 게 있는 것 같고, 혜은이는 뭔가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분위기로는 괜히 거리를 두면 영영 멀어질 거고, 차라리 같이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낫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고, 실제로 서혜은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나랑 예림이가 가르치면 실력은 쑥쑥 늘어날 거고, 팀 구성상 강력한 화력을 갖춘 사람이 하나 필요한 참이었다.

"그래서 측정소에는 왜 온 거지? 이미 내 실력은 충분히 본 것 아닌가?"

"인턴 하려면 프로필 등록해야지. 겸사겸사 새 스킬도 등록하고."

프로필에는 각성자로서의 능력과 스킬, 그리고 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스킬이 특히 중요한데, 능력 란에는 그냥 무슨 무슨 능력이 있다는 짤막한 설명만 들어가지만 스킬 란에는 그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붙는다.

결국 실질적으로 스펙을 드러내는 것은 스킬이고, 그 스킬의 심사, 등록,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이 이곳 측정소인 것이다.

"예림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걔 스킬만 세 자릿수라던데 그 정도면 심사받는데 도가 텄지."

그런데 그 스킬 심사라는 게… 좌우지간 골치 아프다. 어떤 능력으로 어떻게 구현하는 것인지, 그게 어떤 쓸모가 있고 왜 다른 능력과 차별화되는 것인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각성자들에게 있어서는 자격증이나 마찬가지인 항목이라 각성자들은 한 줄이라도 더 늘리려고 진땀을 빼고 심사관들은 거기에 허위 사실이 없는지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기 마련이다.

그걸 세 자릿수나 채웠다? 저 나이에? 솔직히 저게 인생 1회차일리가 없다.

"김예림 헌터…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는군. 역시 오래 사귀어서 그런 건가?"

"내가 쭉 걔 사수였는데 어떻게 몰라. 아무튼 예림이는 휴식도 취하고 할 일 밀린 것도 있대서 못 온대."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대답하자 혜은이는 이상하게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았나? 평소에도 자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양이지?"

"아니, 단톡방에 올라왔지. 생각해보니까 너 없나? 지혜랑 예림이랑 전부 있는데."

"뭐…라고…?"

혜은이 여태 아무도 자신을 초대해주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처를 받은 혜은이를 달래주고 단톡방에 초대를 해주는 사이 측정소 직원이 자리에 도착했다.

"오, 상철이. 오랜만이다? 오늘 근무야?"

"현수 선배! 올 거면 말이라도 하고 오시지, 어쩐 일이에요?"

"…가는 곳마다 아는 얼굴이군."

살짝 질린 얼굴을 하는 혜은이를 간단히 소개하자 상철이는 웃는 낯으로 악수를 나눴다.

"또 신입이에요? 어지간히 돌보기 좋아하시네 진짜. 또 저처럼 갈구고 그러는 거 아니죠?"

"내가 뭘 갈궈? 아 맞다. 그거 한번 오랜만에 좀 해보자."

그러고 보니까 이놈한테는 특이한 장기가 하나 있었다.

"상태창."

"파 ­ 앗

이름 : 윤현수

나이 : 26

코드 : 755578 ­ ■■■■■

소속 : 길드 ­ 타이탄즈, 최심부 개척팀

능력(스킬) : 입자 분해 처리(도구화 외 3), 초월적 항상성(독 중화 외 8), 일반 염동(충격 분산 외 1)"

"…뭐지? 방금 저건?"

경악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혜은이에게 자랑스럽게 웃어 본다.

"완전 똑같지? 애처럼 소리 잘 내는 사람 한 명도 못 봤다. 파앗, 아니 이걸 어떻게 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파­앗 소리를 흉내 내고 있자 서혜은의 눈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걸 전부… 외운 건가? 완전 암기, 그런 게 능력인…"

"무슨 소리야? 후배가 선배의 프로필을 외우는 건 '상식'이잖아?"

너도 하게 될 거야, 그 소리에 완전히 굳어버린 혜은이를 뒤로하고 때마침 상철이가 건네준 등록 신청서를 체크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지금 민하 와있는데 보고 가실래요?"

"민하? 맞아, 걔 요즘 뭐 하고 지낸 대냐?"

"이러고 지내지!"

뒤에서 오금이 툭 밀리며 나도 모르게 주저 앉을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뒤를 돌아보자 오랜만에 보는 상쾌한 단발머리가 반갑게 웃고 있었다.

"선배! 잘 지냈어요?"

"괜찮았는데, 너 보니까 다시 안 좋아지는 거 같아."

"에이, 엄살은. 근데 오랜만에 보니까 좀 잘생겨진 거 같네요?"

"오, 진짜?"

"아니, 잠깐만요? 음… 흠. 음?"

"진짜 너 그럴 때마다 때리고 싶은 거 알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볼 때마다 싱글생글 웃고 있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어쩐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혜은이를 민하에게 소개 시켜 주었다.

"아, 들은 거 같은데. 선배 새 후배 맞죠?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서혜은. 타이탄즈에 새로 들어가게 됐죠."

"와, 고생하겠다."

서혜은의 기묘한 말투에 아랑곳하는 기색 없이 민하는 생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특히 현수 오빠 밑이면 더 고생하죠. 저도 선배 부사수로 들어갔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데."

"나도 너 혼내느라 힘들었어."

나와 민하가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혜은이 입을 열었다.

"부사수는 김예림 헌터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민하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김예림 헌터 오기 전까지 부사수였거든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혜은의 눈매가 한층 더 험악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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