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음모, 계획, 말썽 1
* * *
박규태는 약속 장소를 앞두고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다. 역에서 20분이나 걸어야 하는 카페를 약속 장소를 잡다니, 기본적인 배려심이라는 게 없는 모양이다. 박규태는 그놈 부모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입지에 비해 썩 괜찮은 건물이었다. 단독 주택을 개조한 건물인지 작고 아담하지만 세련된 외관에, 2층에는 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는 테라스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도 제법 신경을 쓴 눈치였다.
돈이 많이 들었겠군, 그렇게 건조한 결론을 내리며 박규태는 가게문을 열었다.
이국적인 음색의 도어 벨 소리가 한산한 가게 안으로 울려 퍼졌다. 계산대 앞으로 다가가 메뉴를 읽어보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글씨가 너무 작고 빽빽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약속 상대에 대한 불만이 치솟았다. 이번에는 다소 부조리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박규태는 구태여 그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런 박규태의 등 뒤로 조용히 인기척이 다가온다.
"이분은 생강차 따듯한 거에 감귤 마멀레이드 한 스푼만 넣어주세요."
윤현수였다. 속없이 싱글거리는 윤현수의 얼굴에 카페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감귤 마멀레이드는 따로 파는 물건이라서."
"와, 아니 형. 제가 진짜 생색내기는 싫은데, 그때 고깃집에서 채끝살…"
윤현수의 이야기가 끝모르게 이어지자 결국 카페 사장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됐다. 해줄게."
윤현수는 헤헤 웃으며 카드를 꺼냈다. 카페 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강차 값만을 계산한 뒤 카드를 돌려줬다. 표정이 한층 더 샐쭉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조개구이 한번 먹으러 가죠. 거기가 제가 아는 사람이 이번에…"
"됐어 인마. 이제 알겠네. 왜 사람들이 너한테 뭐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된다고 하는지."
"섭섭하게 뭘 또 그래요?"
윤현수는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도 한참을 떠들다가 음료가 나오고 나서야 박규태와 함께 2층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별 탈은 없으셨고요?"
"오는 길에 니 애비 얼굴 보고 싶어서 혼났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윤현수는 투덜거리면서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요즘 삼촌 볼 때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던데."
"그걸 왜 내 탓을 해?"
남 탓이라도 해야 속이 풀리죠, 그렇게 말하면서 윤현수는 엄살을 피웠다.
사실 엄살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지난 한 달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니까.
늑대 괴물 사태 이후 프로메테우스 연구실에서 몸과 정신을 혹사당하고, 바로 며칠 전 거미 여왕 사태에서는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가며 싸웠다.
얻어터지고, 약에 취하고, 독에 당하고. 그것이 고작 일주일 전의 일이다.
보통 각성자라면 지금까지도 앓아눕거나, 아예 죽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박규태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말했다.
"튼튼한 거 하나가 자랑인 녀석이. 그리고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지."
"삼촌 같은 사람이 자꾸 팔아서 그렇잖아요."
"망할 놈. 한 마디를 안 지네."
박규태는 투덜거리며 음료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생강과 귤의 향이 독특하게 어우러지며 달콤한 맛을 감싸주었다.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문득 서글퍼졌다. 아저씨가 다 되었군.
그래,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다. 감당해야 하는 일은 나날이 늘어가는데, 할 수 있는 일은 나날이 줄어든다.
그리고 먼저 떠난 친구가 맡기고 간 맹랑한 꼬맹이는 이리 장성하여 건장한 젊은이가 되었구나.
내가 키운 거다, 알았냐?
그러니까 좀 부려먹어도 넌 할 말 없어 인마. 누가 일찍 죽으래?
옛 친구를 떠올리며 실없이 투덜거리던 박규태는 입에 머금은 음료를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
가지런한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빠져나온다.
고민, 피곤, 망설임 그런 답답한 감정들이 담겨 있어, 그 숨은 무겁다.
김예림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코르크 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코르크 보드에는 사진과 자료들이 정신없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압정과 빨간 실들이 자료들을 가로지르며 혼란을 한층 더했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상황판 한가운데, 중심에 붙어있는 것은 한 남자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었다.
윤현수.
김예림은 지난 사흘간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윤현수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쌓아온 인맥, 정보상, 그리고 이전 회차의 기억들을 총동원하여 긁어모은 정보들.
이미 일어난, 바꿀 수 없는, 바뀔 수 있는, 곧 일어날, 모든 상황에 대한 정리.
그 결과물이 마치 윤현수를 포위하듯이 도열한 채 상황판에 붙어 있었다.
사흘 전 거미 여왕 사건에서 김예림은 윤현수를 살리기 위해 서혜은에게 새로운 힘의 운용법을 가르쳤다.
여우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이미 저질러버린 행동에 심장이 쿵쿵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너, 제정신이야? 하고.
그러면 심장의 항의에 시달리던 머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니, 안될 게 어디 있어? 하고.
윤현수도, 서혜은도, 동료가 되면 되는 거잖아.
그 생각을 떠올렸을 때, 김예림은 다시 가슴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동료?
김예림, 이 소심한 회귀자는 동료를 두지 않았다. 곁에 두고 믿기에는 사람이란 지나치게 변수가 많은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조력자는 있어도 항상 문제 해결의 주축은 언제나 김예림 혼자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심지어 회귀를 잃어버린 불확실한 상황 속에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김예림은 그 사실이 너무나 불안했다.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 한켠에서 꿈틀거렸다.
양쪽으로 갈라진 마음이 소리 높여 싸우는 통에 김예림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김예림은 단호하게 가슴이 아닌 머리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틀어진 미래, 제거하지 못한 위험 요소들을 생각하면 믿음직한 동료를 만드는 것을 필수적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번도 제대로 된 동료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김예림은 소심한 회귀자답게 결국 평소 애용하던 방식으로 돌아왔다. 다른 선택지를 아예 막아버리고 자신의 동료가 될 수 밖에 없게 만들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대규모 조사인 것이다. 김예림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상황판을 들여다보았다.
사적인 감정은 모두 배제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한다. 다시 다짐을 되새기며 자료들을 읽어 내렸다.
그 와중 윤현수가 고구마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대목에서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좋아하는데, 같이 먹으러 갈 기회가 있을까? 혜수동 사거리에 괜찮은 가게가 있었더랬다.
이어서 다음 자료를 읽었다. 취미는 의외로 카페 탐방, 좋아하는 술은 맥주, 주로 찾아가는 가게는 집에서 10분 거리의 닭발집, 좋아하는 색깔은…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필요에 의한 조사에 불과하다.
코르크보드에 한 장 더 사진이 붙는다.
*
개인 공간이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위안을 가져다준다. 그 형태와 넓이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좁은 곳이 더 편안할 때가 있으니.
그러나 지금 서혜은에게 지금 자신의 방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여학생의 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치 어두운 색조에 해골, 단검, 사슬 따위의 실버 악세사리가 널려있는 방 안에서 서혜은은 그녀만의 고독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농부가 대지와 싸우고, 어부가 바다와 싸우듯이, 서혜은 또한 거대한 질서에 맞서 원하는 것을 쟁취해내기 위한 싸움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그녀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지금 서혜은이 찾아보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윤현수에 대한 정보였다. 연이은 이변 사태에 사람들의 불안은 높아만 갔고 따라서 그 해결의 주역 중 하나인 윤현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타이탄즈의 베테랑 A급, 윤현수에 뉴스와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막상 그중 그녀가 원하는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서혜은은 윤현수의 좌천에 무언가 음모가 숨어있으리라 확신하고, 그 증거를 찾고 있다.
조사의 계기는 사흘 전, 그 날 김예림에게 느낀 실망에서 시작했다. 서혜은이 존경해 마지않던 영웅은 사실 불안에 떨고, 초조해 하고, 질투에 휘둘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김예림은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저히 미워할 수는 없었지만 존경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뒤집힌 인식은 윤현수에게도 이어졌다. 서혜은이 미워하고 경멸하던 윤현수는 사실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보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지만, 의외로 윤현수는 주변 사람을 잘 지켜보며, 아닌 척하면서도 챙겨주고 돌봐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이 싹 텄다. 서혜은이 알기로 윤현수의 시가지 사냥팀 발령은 다분히 징계성이 강하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는, 김예림과 윤현수의 불화에 있었다.
윤현수와 김예림 사이에 불화? 윤현수가 김예림을 괴롭혀서?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기사가 나고, 왜 윤현수는 좌천을 당한 것일까?
이에 호기심을 갖게 된 서혜은은 공책을 펼쳐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 인터넷으로 조사한 사실들을 정리하고 나열했다.
추리 소설과 범죄 소설을 읽으면서 단련한 논리적 추리 능력과 직관력.
자작 소설과 시, 노래, 만화로 책장을 가득 채우면서 충실하게 쌓아온 상상력.
그 둘이 아울러 춤을 추며 정보들을 분해하고, 조립하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대련장에서 윤현수가 은근슬쩍 스킨십을 유도하던 모습.
그때 김예림이 보여줬던 수줍음에 촉촉히 젖은 눈빛.
그녀는 회색 뇌 세포 위로 번개가 달리는 듯한 전율 속에서 확신했다.
김예림과 윤현수는 비밀리에 연애 중이다!
그 사실에 질투심을 느낀 누군가가 윤현수를 독점하기 위해서 허위 사실을 퍼뜨리고 음해한 것이 분명하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지."
서혜은이 중얼거리자 손등의 문양이 빛을 내며 [크아아악…]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옥상에서의 사건 이후 문양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으며 이따금 저렇게 신음을 내었다.
처음에는 꺼림찍함을 느끼던 서혜은도 이내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도리어 그녀가 '결정 대사'라고 생각하는 말을 할 때마다 울리는 천둥소리 같은 저 소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추상적이던 문양이 용의 두개골처럼 뚜렷한 형상을 갖추게 된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튼, 결론을 내린 그녀는 윤현수와 김예림의 명예를 위해, 숨겨진 음모의 주모자를 찾아내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서혜은이 그동안 윤현수를 오해하고 비난하면서 생긴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윤현수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서혜은에게 감사를 표하며 능력을 인정해주는 윤현수의 모습을 상상하자 그녀의 입술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는 윤현수 몰래 조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인맥과 정보력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고민에 빠져있던 서혜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어느 카페로 찾아와 달라는 윤현수의 목소리는 유달리 절박하고 초조해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대화하면서 단서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그녀는 집을 나섰다.
서혜은은 약속 장소를 앞두고 잠시 숨을 돌렸다.
오늘의 패션은 평소보다 조금 더 하드보일드한, 사립 탐정 같은 느낌으로 코디했다. 조금 투박한 가죽 자켓이었지만 부분 염색을 한 그녀의 머리와 어울려 다소 배덕적인 느낌을 내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카페는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세련되고 앙증맞았다. 특히 내부 인테리어가 산뜻하고 감각적이어서, 서혜은이 생각하던 윤현수의 이미지와 맞지 않았다. 심플하게 벽에 장식된 패브릭 포스터와 곳곳에 장식된 장식품들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제법 안목이 있군, 그렇게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가니 미리 음료를 주문해둔 윤현수가 테이블에 앉아 정신없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부탁을 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 나를 부른 용건과 관련이 있겠거니 하며 자리에 앉았다.
준비된 음료는 블루베리 에이드였다. 오늘 나는 테킬라와 진, 최소한 커피가 아니면 안마시는데, 서혜은은 그렇게 투덜거리며 빨대로 한모금을 쪽 빨았다. 그녀 취향에 딱 맞는 맛이었다.
"아, 미안하다. 급하게 불러서."
잠시 음료의 맛을 즐기는 사이에 통화를 마친 윤현수가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어쩐지 전투 이후보다 더 피곤하고 수척해져 있는 것 같았다.
"괜찮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네가 나를 따로 부르다니."
실수했다. 서혜은은 식은땀이 살짝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음료수가 너무 맛있어서 푹 빠져 있느라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해버렸다.
서혜은은 윤현수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 이상으로 험악한 윤현수의 인상에 겁을 먹어 허세를 부리느라고 반말을 하고나서, 그녀는 줄곳 존댓말을 꺼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 전투 이후, 이번에는 정말 그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정말 존댓말을 사용하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기회를 날려 먹고 만 것이다.
윤현수는 이미 그녀의 반말에 익숙해졌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당면한 고민거리에 빠져 다른 것들을 신경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민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혹시, 정식으로 타이탄즈에서 인턴 좀 안 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