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용기의 증명10
* * *
서혜은은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이끌려 온 곳이, 바로 그녀가 다니는 학교였을 때.
운명이니, 숙명이니, 생각했는데.
그 끝이 이것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
특별하고 자시고, 그녀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 만을 다시금 확인했다.
특별한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꺾여버렸다.
멍청한 자의식이 머리를 들었다. 남들의 꼬투리를 잡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못된 목소리가 속삭인다.
특별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니 뭐니 거드름을 피웠으면서, 애초에 특별한 게 무엇인지 알기나 하냐고.
그냥 남들과 다른 것? 그런 거라면 노력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이 특별할 테니. 하지만 그녀가 꿈꾼 특별함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남들보다 우월한 것? 너무 조악한 정의였다. 동시에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면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처음부터 모순투성이에 철부지 같은 꿈이었던 것이다.
특별해지고 싶다고 떠들면서 주변을 깔보던 얼간이 중에 얼간이.
그 얼간이가 말한다. 특별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한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런 말을 하고 다녔느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을 새삼 자각한다. 자학한다.
이렇게 오만하고 멍청하면서, 뭘 해보겠다고 이곳까지 와서, 자기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다. 어린애처럼 혼자 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필요하다고, 도와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참 좋았는데.
그 부탁마저도 망쳐버렸다. 내 힘이 부족한 탓에 저 괴물이 더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나았을까.
'아이야, 그렇지 않다. 내 말을 듣거라.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를 망치고 싶지 않다.'
시끄럽다. 부끄럽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온 도시를 불태우면, 내 이름이 잊혀질까. 그러면 나도 잊을 수 있을까.
몽상에 취해있던 소녀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그래서 모두를 조용히 만들고 싶은 한 명의 어른.
멸망의 숙녀.
그 앞에 그녀의 옛 우상이 다가왔다.
"무슨 할 말이 남았죠. 아니."
자신을 짧게 비웃고, 서혜은이 말을 이었다.
"무슨 할 말이 남았지? 이야기는 충분히 들은 거 같은데."
"…꼭 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잔인한 년."
아무렇지도 않게 날카로운 말이 나왔다.
"아직도 부족해? 충분해. 충분히 이해했어.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제일 빨리 죽는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한 일이다…"
자조와 회한이 섞여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그리운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모두 토해내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으면, 내 바닥을 보지 않았으면 더 행복했겠지. 특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달려 헛된 꿈을 계속 꿀 수 있었을 테니까. 아, 그러면 멍청한 꿈에서 깨게 해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김예림은 말없이 서혜은을 바라보았다.
언어로 정리되기에는 너무 복잡하거나, 언어로 휘발되기에 너무 무거운 감정은 침묵을 낳는다.
"저는 혜은 씨가 무서웠어요."
아주 조심스럽게, 가장 확실하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혜은 씨는 강해요. 더 강해질 거에요. 혜은 씨가 언젠가 적으로 돌아서면, 저는 이길 수 없을 거고, 그래서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래서, 혜은 씨가 헌터가 되지 않기를, 더 강해지지 않기를 바란 거예요."
아까와는 색채가 다른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 침묵의 의미는 유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기다리기 위한 시간.
서혜은의 입이 열리며 까칠하게 가시를 세운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아할 것 같아?"
한때 우상으로 믿고 따랐던 존재가 그녀를 질투했노라고,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서혜은은 그 고백을 믿을 수 없었다. 허무한 가슴에는 모든 말들이 공허하게만 울렸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뭘 부탁하고 싶은 거지?"
이번 침묵은 정곡을 찔린 자의 머뭇거림이었다.
"…혜은 씨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 말을 내가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있지?"
김예림의 말은 그 무엇도 담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서혜은에게는 그랬다. 거짓말, 기만, 사탕발림. 그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했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내가 꿈꿨던 그 우상이 맞는 건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비겁한 사람이,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진짜 영웅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인가?
김예림은 할 말이 없었다. 설득할 재료도, 쌓아둔 신뢰도 없었다.
김예림은 소심한 회귀자였다.
위험 요소가 있으면 활용하여 강해지기보다 일찌감치 제거하거나 도망치는 것을 선호했다. 그녀가 이용하는 변수는 안전하고, 확실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설득할 일이 있으면 미리 증거를 모아 놓았고 그도 아니면 미리 빚을 만들어두고 안전하게 협조를 얻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경험도 지금으로서는 의미가 없었다. 서혜은과의 인연은 언제나 피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그런 것들은 알 수 없다.
문득 깨닫는다. 이번 회차에서는 얼마든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조금 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봤었다면.
김예림은 후회했고, 좌절했으나, 그러나 여전히 절박했다.
그래서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위험해요."
김예림은 도움을 구걸했다.
"뭐든지 할게요. 제발 도와주세요."
서혜은은 김예림의 추한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어깨너머 윤현수가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문득 불안감이 스쳐 갔다.
"먼저 한 가지 확인해두지."
정말로 모든 것이 허무하고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불안함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정말… 할 수 있나?"
단 한 명. 그녀를 걱정해주고, 믿어주고, 가르쳐주고, 필요로 하던.
솔직하고 얄미운, 저 못난 어른을.
서혜은은 돕고 싶었다. 그녀가 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어요."
김예림도 그랬다.
"…제가 가르쳐줄게요."
멸망의 숙녀와 싸움을 거듭하며 관찰하고 분석한 힘의 운용 방식, 활용법.
김예림은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서혜은에게 가르칠 것이다.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언젠가 적이 될지도 모르는 마녀를 길러낸다.
그것이 회귀를 잃어버린 후 그녀가 처음으로 가슴 속에 품은.
바보 같고, 비굴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분명한 하나의 용기였다.
*
공격력이 부족한 헌터의 설움을 아는가?
아무리 앞에서 버티고 피하고 때리면서 별 지랄을 다 해도 결정타를 먹일 수 없다면 소용이 없다.
결국 활약하는 장면을 가져가는 건 언제나 강력한 화력을 가진 공격수 계통인 것이다.
폭탄… 존나 크고 강력한 폭탄이 필요하다…
의수, 이번에 지혜 몰래 손목 쪽에 폭탄 신제품을 넣어 놨는데 그거만 가져왔어도 벌써 끝났을 것이다. 시원하게 쏴버리면 증거도 안 남으니 하루라도 빨리 써버려야 하는데.
그리고 또, 뭐지? 사진기, 커피, 목걸이, 장갑. 그래, 장갑. 다음번에는 의수에 끼울 장갑도 사야지. 근데 그게 소용이 있나?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간다. 팔다리의 움직임은 모두 본능에 맡겨 놓았다. 그리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운다.
그러지 않으면 의식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온몸이 뜨겁고 땀이 멈추지 않는다. 아니, 몸이 녹아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각이 이상하게 둔하고 얼얼했다.
위험하다. 독 중화 능력을 포함해 방어 기능을 담당하는 모든 능력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각성제를 한 번 더 맞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것대로 몸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다. 예림이가 방법이 있다고 뛰어나간 게 도망간 게 아니기를 바래야지.
잠시 후, 나는 내 기대가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급작스럽게 추위가 느껴졌다.
그제야 돌아온 피부의 감각이 속삭인다. 오후의 햇살은 참 따스했노라고, 그렇게 아쉬워한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푸름으로 빛나던 옥상의 풍경이 한 꺼풀 어둠을 뒤집어쓴다.
이성이 아닌 직감으로 느낄 수 있는 또렷한 존재감이 등을 간질인다. 지성을 완전히 상실한, 여왕으로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저 괴물조차 내 등 뒤로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빛의 불꽃이 소녀의 손끝 위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어둡다.
검다.
한 톨의 온기도 나누지 않겠다는 듯이 탐욕스럽게 넘실거린다.
조물주의 실수가 지펴낸 듯한 멸망의 불씨.
뒤에서는 김예림이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그 열기에서 혜은이를 보호하고 있다.
흑염(??)을 지탱하는 혜은이의 손은 숯으로 타버린 것처럼 끝에서부터 검게 변한 채, 문양만을 빛내고 있었다.
한시라도 더 들고 있기가 두렵다는 듯이 다급히, 그렇게 흑염을 던져낸다.
그리고 괴물이 타올랐다.
" "
불꽃은 비명조차 삼켜버린다. 괴물은 흘러내리듯 주저앉았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부터 한 줌의 그을음이었던 것처럼, 존재가 지워져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 광경에 견딜 수 없는 두려움과 고뇌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쿵쾅거렸다.
나는 겨우 입을 삼켜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눌러 삼킨다.
존나 멋있다.
아니, 불꽃이 검은색이라고. 검은 화염이 회오리치고 날아가고 한다고. 막. 그냥. 와.
근데 그. 혜은이 보고 멋있다고 인정하면, 좀 자존심이 깎이는 뭔가, 뭔가가 있다.
아무튼 진짜로 절대 안된다.
여전히 남아 일렁이는 검은 불꽃에서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바라보면 혜은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멋있었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
비틀거리다 그대로 주저앉은 예림이와 혜은이에게 걸어가는 와중,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불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
왜 안 꺼지지?
"……"
폭주.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혜은이는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통제.
나는 지체 없이 달려가며 긴 창대를 만들어 그 끝에 날카로운 촉을 달았다.
한 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그때, 검은 불꽃이 위로 치솟았다.
" "
날뛴다.
검은 불꽃이 아니라, 아직도 죽지 못한 저 빌어먹을 괴물이.
혜은이는 자신의 힘을 충분히 통제해내고 있었다. 폭주하는 것은 서혜은이 아닌, 저 미친 괴물의 생명력이었다.
숯 더미가 된 채 검은 불꽃을 몸에 매달고, 그러고도 죽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징그러울 정도의 재생력, 생명력.
그렇지만 아주 조금, 조금만 더 타격을 입힌다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가 창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주마등과 같은 강렬한 예감이 스쳐 갔다.
집중이 극한까지 치달았을 때 보이는 것,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직감.
창대로 옮겨붙은 불꽃으로 내 몸이 불타버리는 미래.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며, 그 미래를 부정한다.
원하는 미래를 향해 창을 내지른다.
촉은 너무나도 쉽게 숯 더미가 된 몸통을 뚫고 들어갔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대는 녹아내렸지만 불은 번져 오르지 않았다.
목숨을 건 배팅으로, 승리했다. 신뢰는 보답받았다.
혜은이는 여전히 완벽하게 불꽃을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런 능력은 우연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운 좋게 계약으로 손에 넣은 강한 힘이 아니라, 서혜은이라는 사람이 쌓아 올린 노력과 의지의 결과물.
멋있다, 혜은아.
결코 본인에게 들려주지 못할 그 말을 다시금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다시 능력을 발동해 철퇴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막타는 내가 쳐야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