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용기의 증명9
* * *
진짜, 예림이가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바람이 몰아치는 옥상 난간 위,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고 길다란 방호 코트를 휘날리는 김예림의 모습은 그야말로 구세주 같았다.
칼리오네는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찾아 시선을 돌리고, 그대로 호된 대가를 치렀다. 예림이가 던진 얼음송곳이 정확히 눈을 꿰뚫은 것이다.
"키에에엑!"
눈이 멀어버린 여왕이 발광을 시작하여 조금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에 예림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호흡이 가빠 보인다. 다리를 모두 처리하자마자 급하게 달려온 거 같은데, 고마운 일이다.
"선배, 다치신 건 아니죠?"
"괜찮지, 그럼. 고맙다. 진짜 겨우 한시름 놓았네. 이제 혜은이 데리고 잠깐 도망가 있어. 위험할 것 같은데, 내 말은 안 들을 거 같아서."
"…저는 걱정도 안 돼요?"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나도, 예림이도. 아니 말을 하자마자 후회할 거면 왜 그러는데.
"아니, 어린애부터 챙겨야지. 우리 팀 강령 3번 모르냐?"
"…모르는데요."
"신입은 무조건 사수가 붙어 다니면서 케어하잖아. 전우조로."
"모르겠어요."
왜 모르지? 내가 얘 사수 받았는데. 아.
"야, 그건 네가 맨날 네 마음대로 움직여서 그렇고. 너 알게 모르게 내가 계속 지켜보기는 했거든?"
솔직히 말하다 보니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사라지는 통에 뭐 챙겨줄 수가 있어야지.
예림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처음에, 아주 처음에 그랬던 거 같긴 한데… 강령 그런 건 정말 들어본 적 없는 거 같아요."
"짬 먹기 전까지는 그런 거 말하지 말라 그랬어. 신입 애들 부담스러워하잖아."
얘는 처음부터 부담감 그런 거 있지도 않았지만, 결국 가르쳐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예림이 잘못이다.
"아무튼, 혜은이 데려가서 안전한 곳에 두고 와. 여기는 어떻게든 되겠지."
"…혼자서요?"
"그래, 뭐…"
여전히 날뛰고 있는 괴물을 바라봤다. 더 이상 여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얼굴을 긁고 할퀴어 얼음송곳을 뽑아내고 주변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부숴 대고 있었다.
얼음 망치에 내리 찍힌 부분이 눈에 띄게 아물고 있다. 초재생 능력이 생긴 거라면 아마 시력도 곧 돌아올 것이다.
혼자는 힘들지 그럼.
"아니다. 그냥 여기 좀 도와줘라."
예림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그 눈빛이 싸늘한 것 같았다.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지금 공세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더 괜찮은 선택이 있다.
"예전에 불도깨비였나? 그거 잡을 때 했던 거 부탁할게."
정식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서리와 냉기를 코팅시켜 열기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기술.
예림이는 내 부탁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뭘 수줍어하고 아악!"
진짜, 진지하게, 심각한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이거 왤케, 왜 이렇게 추, 추워?"
"…강하게 해서 그래요. 참으세요."
"왜 강하게 하는데?"
"더 위험해서요."
사리에 맞는 말이긴 했지만,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눈에 냉랭한 기색이 도는 것이 사적인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한겨울 목덜미에 눈을 쑤셔 넣는 듯한 추위를 느끼며 무기까지 코팅을 마칠 때까지 한참을 떨어야 했다.
*
김예림은 눌러두었던 긴장감이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어떤 회차에서도 겪어본 적이 없는 특수 개체.
기괴한 재생력과 진화 속도로, 어느새 복구된 두 눈 주위에 단단한 혹이 솟아 눈을 보호하고 있다.
어느 변수가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인지,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이번 일은 그런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불안을 낳는다. 그리고 김예림은 그 불안감에 너무도 취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옆에 있는 선배의 쓸데없는 추태와 엄살에 다시 맥이 빠졌다.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늘 저렇게 넉살 좋게, 여유롭게, 가볍게 입을 놀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공략팀에 있을 때도 항상 신입들에게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긴장한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곤 했다.
저 얼빠진 목소리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왜 저렇게 강한 개체가 나왔는지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정말 없는지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서혜은이 이 자리에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엉뚱한 질문이 대신 튀어나오는 바람에, 자세히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왜 방독면을 덮어쓰고 있는 건지. 내가 걱정하는 그게 맞는지.
물어볼 틈도 없이, 윤현수는 달려들었다.
뒤따라 달려가는 김예림의 감각에 불쾌한 악취가 걸려들었다.
예의 그 안개일 것이다. 원래라면 '다리'가 충분한 양분을 모아올 때까지 안개를 뿜지 않는다. 안개를 다 뱉고 나면 극히 취약해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리분별 없이 안개를 피어 올리고 있다. 기괴한 변형의 부작용인 것처럼.
김예림 자신은 점액에 접촉한 적이 없다.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그 안개는 그녀에게 아무런 해악도 끼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배는?
윤현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아가 검을 휘둘렀다.
김예림의 한기를 머금은 검은 불타오르는 집게발과 부딪쳐 굉음을 냈다. 그사이에 생긴 틈으로 김예림이 파고들었다.
호흡을 맞추는 것은, 정말 숨 쉬는 것보다도 쉬웠다. 김예림은 윤현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A급 헌터 심사 때, 윤현수가 대련관으로 나온 것은 김예림의 오랜 악몽이었다.
상호 간 공격적인 능력 사용 금지. 그 조건 안에서 윤현수의 기량은 그녀가 짐작한 것 이상이었다.
패턴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수비적인 움직임을 보이다가 느닷없이 내던지는 반격의 타이밍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태산처럼 굳건히 공격을 받아내다가, 곡예를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검을 던지고, 그 검을 밟고 도약하다가, 주먹을 휘두르는가 싶으면 다시 검을 쥐고 있다.
그 심사 하나를 뚫지 못해서 몇 번의 회귀를 거쳤는지. 포기하고 B급에 머물러 진행한 회차도 수없이 많았다.
겨우겨우 패턴을 알아내고, 파훼하기 위해 능력과 스킬을 개발하고, 그러고도 꼼수를 몇 가지 동원해서야 오를 수 있었던 것이 A급의 등위.
사실 A급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비교적 최근의 회차였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임 하나하나가 여전히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분명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갈 것이다.
김예림은 왼쪽으로 돌아 괴물의 어깨에 일격을 먹이고, 휘두르는 팔을 아래로 빠져나가 지나쳤다.
그 틈에 오른 다리 밑으로 들어간 윤현수가 주의를 끌면, 다시 그 틈으로 김예림이 괴물의 뒤를 잡는다.
김예림의 길다란 곡도에 얼음 칼날이 덧씌워지고, 유려한 궤적으로 휘두른다.
극도로 날카로우며, 스스로 진동하여 절삭력을 극대화하는 칼날.
하지만 괴물의 피부를 덮고 있는 강렬한 열기에 녹아내려 제대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질량으로 찍어누른다. 그런 판단에 물러난 김예림은 다시금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 내리쳤다.
아까보다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치명상까지는 입힐 수 없었고 체력과 능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윤현수도 냉기가 코팅된 검을 휘둘러 나름 공격을 퍼부었지만 잔 상처를 입힐 뿐, 제대로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는 상황.
그래도 흐름은 나쁘지 않다. 이 괴물이 스스로 무너져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화력 지원도 늦지 않게 올 것이다. 뿜어내는 안개의 양도 많지 않아, 학교 밖까지 퍼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는 김예림의 눈에, 급작스럽게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윤현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이 멈췄다. 불안했다.
능력을 강하게 펼쳐 잠시 움직임을 봉쇄시켰다. 기껏해야 10초를 버틸까. 그 짧은 시간을 벌기 위해 체력을 낭비한 김예림은, 그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대신 다급하게 윤현수에게 다가가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해주었다.
"왜 그래요 선배. 설마…"
"벌 거 아냐. 싸우는데 지금 뭐해?"
말은 그렇게 했다. 그렇지만 떨리고 있는 몸을 숨길 수는 없었다.
김예림의 눈에 살짝 금이 간 방독면이 눈에 들어왔다.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 그리고 초조해서,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윤현수는 튼튼하다. 화염, 독, 그 외 각종 위험에 대해 적응력과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 악독한 합성독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일까? 지금은 괜찮더라도, 고칠 수 없는 후유증이 남는다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김예림의 생각이 이내 스스로에게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 기술을 완성했더라면,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아직 역부족인데.
이전 회차 수준의 능력이 있었다면, 그때 그 능력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능력과 장비들을 독식했다면, 더 효율적인 성장로를 구축했더라면.
더, 강했다면.
수십, 수백 번 반복했던 후회가 또다시 새겨진다.
이전 회차에도 그러했듯이, 이번 회차에도.
차이점은, 이번 회차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것.
회귀를 잃고 나서 느꼈던 공포, 그것의 곱절이 되는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다. 활로를 찾아. 자신의 목숨이 아닌 윤현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이 안개를, 저 괴물을, 모두 불태워버릴 수만 있다면.
김예림은 떠오르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다가, 이내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끔찍한 화력.
혼돈의 마녀. 멸망의 숙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최악의 변수.
레이디 로스트 헤게모니.
서혜은이, 저 뒤에 있다.
뜨거운 어둠을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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