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용기의 증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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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유 능력은 단순하다. 대상을 분해하여 입자로 만들고 체내에 흡수했다가 방출한다.
이렇게 정리하니 좀 멋있는 거 같은데, 문제는 각성자의 고유 능력이라는 게 보통 그렇듯 원리도 모르고 적용 기준도 모른다는 것이다. 대충 생명체랑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 지나치게 큰 물체는 안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사실 이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다른 조건이 있을 수도 있고. 가끔 생각하지만 이렇게 정체도 알 수 없는 힘에 인류의 존망이 달려있는 지금의 상황은 썩 건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이 능력이 이것 자체만으로는 전투에 써먹기 애매하다는 것이다. 전투 중 상대를 분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입자 방출로는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다. 빔처럼 고출력으로 쏘아내는 것도 연습해봤는데, 안되더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구와 연습 끝에 방출한 입자들로 원하는 기계, 장치, 사물을 만들어내는 스킬을 익혔다.
당연히 어려웠다. 단순한 능력으로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과 설계가 필요하다. 능력의 적용 대상을 금속 원소와 몇몇 화학물질로 제한하여 기능을 단순화시키고, 의수에 고성능 처리 장치를 붙여서 능력 사용을 보조한다.
특히 처리 장치가 중요한데, 그거 없이는 나사 하나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섬세한 작업이 안되거든. 그리고 나사를 만들 수 없으면 당연히 기계도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수가 파괴당하는 것은 가장 치명적인 위기 상황 중 하나다. 한쪽 팔이 없으니까 균형도 안 맞지, 능력도 거의 못쓰지, 지혜한테 혼나지… 아무튼 좋지 않다.
그래서 특별한 보험 하나를 준비해둔 것이다.
어깨 쪽에 숨겨진 스위치를 누르면 즉시 약물이 투여되며 뇌가 활성화되고 설계도가 텔레파시의 형태로 머리 속에 투영된다. 그렇게 뇌를 혹사 시키면 평소 상태로는 할 수 없는 조립도 뚝딱 해낼 수 있다. 결국 나중에 지혜한테 혼나는 건 똑같지만.
사실 이런 숨겨진 한 수 같은 건 다들 준비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듯이, 저 벌레년도.
검과 권총을 만들어 손에 쥘 때쯤 놈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킷키에엣!"
타란툴라를 연상시키던 두꺼운 몸통과 다리가 쩍쩍 갈라진다.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검은 껍질이 한순간에 연약해 보이는 회색으로 말라붙었다.
허물을 벗는 게 아니라 알을 깨부수는 듯한 과격한 변태.
그 짧은 변신 끝에 튀어나온 것은 이전보다 몇 배는 날렵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유선형의 괴물이었다.
남아있던 한쪽 집게발이 가위처럼 날카로워지고, 잘렸던 팔도 돋아나 총 여섯 개의 팔이 칼날처럼 길게 늘어났다. 아니, 저게 팔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곤충 다리가 사람 몸통에 붙어있는 것 같다.
뚱뚱하던 몸 자체가 얄팍해지고 다리도 날카롭고 길쭉해져서 몇 배는 빨라 보였다.
"키잇, 키잇, 키잇."
침을 뚝뚝 흘리며 괴성을 내는 것이 언어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아예 지성을 잃은 괴물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옥상이 아주 박살이 날 수도 있겠는데. 옥상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폐허처럼 바닥 곳곳이 깨져 있고 움푹 파여져 있었다. 그래도 진짜 폐허나 던전보다는 낫다. 예전에 도시에서 싸우는 일이 잦았을 때에도 그랬다.
지대가 높아 탁 트인 개활지에서 적과 마주하는 것은 어떤 순수한 집중으로 싸움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준다.
적과 나, 싸움, 그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그 순간 여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 새끼 침 흘리는 거 컨셉 광기네."
여왕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것은 서혜은의 바로 옆이었다. 직감적으로 그 앞을 막아서며 날카롭게 찔러오는 칼날을 쳐냈다.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강한 화력을 가진 상대부터 노린다. 지성이 날아간 대신 전투 본능이 날카로워진 건지, 아니면 저렇게 폭주하는 모습 자체가 연기인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지금 나를 개무시하는 걸 수도 있다.
나는 밑으로 쳐낸 칼날을 밟으며 권총을 머리에 겨누었다. 귀중한 교훈을 새겨 넣기 위해.
아쉽게도 방아쇠를 당기기 전 여왕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에 보라색 불꽃이 내리꽂혔다.
"내가 확실히 붙잡으면 그때 공격해. 타이밍은 알아서 감으로!"
"잡을 수는 있겠나?"
"왜 안되냐?"
건방진 말대꾸에 대답해주며 다시 한 차례 공격을 막아냈다. 여왕은 이제 나와 서혜은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누구를 노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도록.
빨랐다. 정면에서 찔러오는 칼날의 움직임이 빨랐다. 옆으로 돌아가며 허벅지를 노려오는 것도 빨랐다. 여러 개의 팔을 이용해 동시에 몰아치는 것도 눈에 잡히지 않을 만큼 빨랐다. 붙잡히나 싶더니 물러서는 것도, 물러서는 듯싶더니 혜은이로 목표를 바꾸는 것도 빨랐다.
그 모든 공격을 차단하고 쳐내면서, 역습의 타이밍을 가늠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향해 검을 내지름과 동시에 옆구리 사이로 총구를 겨눠 연사했다.
여섯 발이 정확하게 명중.
화약, 금속을 제외하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소수의 물질 중의 하나. 쇠와 화약은 각기 하나의 시대를 끝낸 물질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하나의 생명을 끝내기에도 부족했다. 역사성으로는 벌레 하나 잡을 수 없다.
그래도, 명중한 것으로 충분하다. 패턴을 읽었으니.
나는 잔탄을 소진한 권총을 그대로 쥐어 부순 후 파편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 힘껏 주먹을 휘두른다.
따각, 하고 도자기를 깨부수는 시원한 소리가 울렸다.
가속 상태에서는 그냥 기계적으로 반응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연이어 검으로 찔러 꽂은 후 그대로 타고 올라갔다.
"준비!"
다시 움직일세라 몸을 타고 오르며 부지런히 칼을 찔러 넣었다. 칼이 부러지자 도끼를 만들어 내리쳤다. 특히 팔의 얇은 부분을 노려 두 개를 부러뜨려 두었다.
고통에 겨워 여왕이 나를 떨어트리려 몸부림치는 사이 혜은이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형태가 없는 보라색 불꽃이 마치 점성을 가지는 것처럼 조금씩 끈적해진다.
그 너울너울이 겹쳐지며, 하나의 형태로.
창, 말뚝, 송곳. 관통력 이외의 모든 것을 도외시한 기능적인 형태로.
보라색에 보라색을 더하여 취할 듯한 퇴폐적인 색으로.
"쏴!"
그 열기와 속도가 공기를 찢어 놓는다. 폭음과 빛이 쏟아지자 나는 부딪치기 직전 여왕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청각이 아주 잠시 마비된다. TV의 채널이 바뀌는 것처럼 짧은 정적이 지나자 머리가 아플 정도의 비명이 들려왔다.
몸의 절반이 사라진 여왕이 제 몸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서혜은이 준비 과정 없이 또다시 불꽃을 쏘아냈다. 몸을 던지듯이 피해내는 여왕의 모습은 추악하고 비참했다. 벌레처럼.
공교롭게도 그 순간 결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리 하나가 또다시 끊어졌겠지. 여왕은 비명을 토해내며 온몸을 비틀고 마구잡이로 칼날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훨씬 느리고 팔 숫자도 적은 데다가 기술도 형편없다. 나는 칼날을 쳐내고 그대로 머리 통을 내리치려 했다.
다리를 잃고 취약해진 모습을 보고 틈을 노려 접근해 공격한다.
"배우는 것이 없구나. 미물아."
여왕의 가슴이 열리며 숨겨진 칼날이 튀어나왔다.
단둘이 싸울 때 보여줬던 것과 같은 기습.
"윤현수!"
다음 순간 옆구리가 크게 갈라져 나가며 피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피를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피가 많이 흘러나오지. 청소하기 빡세겠다.
검고, 초록색으로 찐득한 피는 딱 보기에도 청소가 귀찮아 보였다.
"갑자기…안보였…"
"신체 강화는 필요할 때만 쓰거든."
그래야 방심한 놈들이 당해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놈의 몸통을 걷어차 넘어뜨렸다.
불에 타서 약해진 부분을 다시 한번 베어 놓아 거의 죽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내가 능력을 숨겼듯 이놈도 어떤 술수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혜은아, 태우자."
영악한 놈이었다. 지금 약해진 모습까지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보다 싱거웠군."
"어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다행히 혜은이가 꿈틀거리는 여왕의 몸에 불을 붙이고도 아무런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혜은이는 불을 붙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불꽃을 가속, 회전시켜 하나의 돔처럼 만들어 철저히 소각했다.
"이거로… 끝인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니까. 아무튼 도와줘서 고맙다. 속은 좀 시원해졌냐?"
혜은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부족하다. 내가 싸웠다는 실감이 없어…"
그러더니 점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증명한 건가? 이 싸움에서, 내가 있을 의미가 정말로 있었던 건가?"
나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등짝을 한 대 때려주었다.
"공격은 니가 거의 다 넣었구만 뭐. 너 정도면 강한 거 맞아. 앞으로는 더 강해질 거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 좀 하지 마. 무리하지도 말고. 원래 캐리한다고 깝치는 애들보다 얌전히 딜각만 잘 보는 애가 진짜 잘하는 거야."
"뭐라는 건지…"
피식 웃는 얼굴이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다. 이러면 한동안은 얌전하겠지.
그 사이에 혜은이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제대로 된 훈련 메뉴나, 음, 첫 전투 승리 축하식 같은 거. 그런 것들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갑자기 민망함이 몰려와 뒤통수를 긁으니 뒤늦게 고통이 몰려왔다. 특히 뒷목이랑 왼 어깨가 너무 아프다. 의수가 박살 나 혼날 걸 생각하니 머리도 아파왔다. 일상용 경량 의수도 좀 비싼 거라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전기를 꺼내니 또다시 결계가 요동치고, 이내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다리가 잡힌 모양이었다.
이제 진짜 끝인가, 생각하는 와중에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돔이 커지고 있다. 여왕을 둘러싼 불꽃의 돔이.
다시 감각을 곤두세우자 결계를 구성하던 에너지가 여왕에게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로."
나는 짧게 말하며 검을 들어 혜은이 앞에 섰다.
돔이 점점 커진다. 커지는 만큼 얇아지고 얇아지는 만큼 투명해져 안이 비쳐 보였다.
반쯤 투명해진 불꽃의 장만 안에서 꿈틀거리며 녹아내리고 재생하는 여왕.
죽은 것은 아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살아있지 않을 뿐이다.
"화력 더 높일 수 있냐?"
"…한계다. 이 이상은 무리야."
"돌겠네."
어느새 원래의 3배 정도로 자라난 돔이 마침내 찢어졌다.
불에 타서 비틀린 고목과 같이 비쩍 마르고 건조하다. 재생이 된 것인지 아닌지, 불에 탄 반신은 되돌아왔지만 큰 형태만 잡혔을 뿐 온갖 부분이 일그러지고 뭉개져 있어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인간형 몸체는 쪼그라들어 머리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고, 집게발은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철퇴처럼 변해 있었다.
그 까만 숯덩이 같은 몸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오르자, 혜은이가 반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보라색은 붉은색에 그대로 삼켜져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최대 공격 거리에서 기다려!"
나는 서혜은을 뒤로 밀치며 달려들었다.
면역 진화는 드문 일이다. 제아무리 충귀형이라도, 충귀형 중에서도 아라크네 타입이어도 이렇게 그 자리에서 갑자기 변화를 이뤄내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지금 서혜은의 공격은 의미가 없다. 내 공격이 의미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라고 해도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을 끄는 수밖에.
집게발이 지면을 강타하자 파편이 비산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긁으며 쓸어내듯 팔을 휘두른다.
한번 뛰어오른 후 왼팔로 집게발을 잡고 다시 몸을 튕겨 도약했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 의수가 녹을 듯이 뜨거웠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어깨를 뒤틀어 힘껏 굴렀다. 그렇게 겨우 내리 찍히는 다리를 피하고 몸통을 향했다.
몸통이 낮아서 타고 오르기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등 껍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혜은이처럼 제대로 불꽃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분출이 뜨거운 체액과 뒤섞여 무시무시한 위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용암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올라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체급 차이가 난다.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올라타는 수 밖에 없다.
각오를 다지고, 숨을 힘껏 들이쉰다.
온몸에 뼈가 시리는 추위가 덮쳤다.
인간의 감각은 때로 오류를 일으킨다.
켜지지 않은 냉동 창고에서 얼어 죽는 것처럼.
사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팔이 잘려나간 환자가 존재할 리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뜨거운 것에 닿았을 때 아주 잠깐 차갑다고 느끼는 것처럼.
근데 그건 그거고, 지금은 그냥 추웠다.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와 여왕의 등판을 강타한 거대한 얼음 망치가 주변에 냉기를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옥상 난간 위, 김예림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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