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좌천 헌터는 돌아갈 수 없다-17화 (17/55)

〈 17화 〉 용기의 증명­6

* * *

사실 나는 제대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대충 16살인가? 그때 헌터가 되서 지금이 얼추 8년차.

헌터가 되기 전에는 도시가 온통 개판이라 인프라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서 학교를 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아카데미 안에서 길을 잃은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듣기로 학교는 감옥이라던데, 미궁도 겸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디를 가나 복도가 똑같고 어디가 계단이고 정문이고 후문인지 알 수 없게 섞어 놓은 꼴이 침입자를 교란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지나가는 길에 적당한 소화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이 좋군."

역시 고급 학교라 그런가 소화전 안에 방독면이 몇 개 비치 되어 있었다. 문을 여는 과정에서 실수로 손잡이가 부숴지기는 했지만 보험에서 알아서 보상해줄 것이다.

방독면 끈을 꽉 동여매고 호흡 체크를 하니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다리'가 펼친 결계가 무언가에 격하게 반응하고 있다. 예림이가 잘 해주고 있는 모양이지.

조금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방심한 게 아니면 의식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털고 다시 건물 안을 돌아다녀 마침내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좋아, 다시 한번 장비 체크.

허리에는 호출기와 무전기. 능력을 사용해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검을 만들어 쥐고, 방독면의 상태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점검했다.

좋아.

나는 힘차게 옥상문을 발로 차 부수며 뛰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검은 투창이 날아와 나를 맞이했다. 호쾌하게 방패로 튕겨낸 후 달려들었다.

"건방진 인간이로구나."

거리를 제대로 좁힐 틈도 없이 집게발이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를 노려 동시에 날아왔다.

달리던 기세로 몸을 살짝 날린 후 허리의 탄력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몸을 모로 세워 두 개의 집게발 사이를 통과한다. 정면에서 180도 회전하여 등을 보이게 된 나는 바로 땅을 박차며 배면 뛰기로 놈의 머리 위를 넘었다.

뒤늦게 내가 서있던 자리의 놈의 앞다리가 내려찍히는 순간 나는 검에 온몸의 속도를 실어 놈의 꽁무니를 힘껏 내리쳤다.

"키­앗! 날래기도 하구나!"

별 효과는 크지 않았다. 튕겨나온 칼날을 회수하며 가볍게 백스탭을 하자 이번에는 창의 장대 부분이 채찍처럼 공기를 가르며 신발코 바로 앞을 긁어놓았다.

"인사도 받지 않고 달려들다니 무례한 인간이로고."

"꼭 먼저 지랄한 년이 성내더라. 그리고 못생긴 년이랑 말 안 섞는다. 좆같이 생긴 년아"

나는 뻐근한 손목을 휘휘 돌리며 도발했다.

불쾌한 기색으로 딱딱거리는 턱에서부터, 놈의 모든 요소요소가 전부 구역질 나게 생겼다.

배회성 거미 특유의 뚱뚱한 몸뚱아리를 단단한 껍데기가 감싸고 있다.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인간형 몸통이 붙어있고,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벌레의 얼굴이 붙어있다. 징그럽게 4개씩이나 달린 팔에는 각각 검은 키틴질의 창이 들려있었다.

거기에 여덞 다리 중 여섯 다리는 땅을 딛고 있지만 둘은 집게발을 달아 놓아 게걸스럽게 딱딱 거리고, 여섯 다리 중에서도 앞의 둘은 유독 앞으로 뻗어 나와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놈을 밟아 으깨고자 안달이 난 듯 했다.

진짜 구역질이 나온다. 아니, 저걸 언제 다 피해? 전부 흉기인데, 아까처럼 곡예질 계속하면 멀미나는데.

"진짜 개좆같이 생겼다. 그 턱주가리로 사람 말은 어떻게 하냐? 볼 때마다 신기하네 진짜."

"여왕의 앞에서 그대 비천함을 알라. 어디 건방진 입을 놀리느냐."

아라크네 퀸은 턱을 딱딱거리며 성을 냈다.

"여의 이름은 칼리오네. 명예로운 싸움을 위해 그대 침입자는 이름을 밝히라."

"방충업자다 씨발년아. 침입은 니가 했지 내가 했냐?"

"무례한 인간아.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대 안에 남은 동포들의 흔적이 내 눈에 선하거늘…"

칼리오네의 눈에 괴이한 빛이 서렸다. 내 몸에 남은 잔여물을 훑어보는 듯 했다.

나는 얼굴에 덮어쓴 방독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안보이냐? 너희 수작질 안통하니까 날먹할 생각은 미리 버리고."

"…얼굴이 특이한 인간으로 생각했거늘."

저 씨발년이 진짜.

나는 칼등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생각했다.

충귀형, 그중 아라크네 타입, 의 변종. 복잡한 수식어 만큼이나 난해한 패턴을 보이던 놈들.

아라크네 타입은 유달리 변이와 진화 속도가 빨랐다. 변종 군집 안에서도 다양한 파생종이 생겨나고 사라졌고, 그러면서 각기 고유의 특징이 뚜렷이 살아있었다.

함정을 파고 강력한 독을 사용하는 놈에서, 거미줄을 이용한 공중 전투술과 덩치와 기동력을 무기 삼아 전차처럼 밀고 들어오는 놈들까지.

그 중에서 저 변종은 유독 골치 아팠다. 처음에는 육상 전투에 특화되었나 했더니 전투력은 별 볼 일 없고, 기동력도 그냥저냥이고, 노란 점액을 뿜어대기는 해도 거기에 아무런 독성이 없어 퇴화된 기관을 교란용으로 사용하는구나, 생각했다.

변이 과정에서 생겨난 실패작, 그것이 당시 헌터들과 가드들이 내린 판단이었고, 그 오판으로 수많은 피해자가 생겨났다.

확실히 그 노란 점액은 독이 아니었다. 살짝 찐득거리기는 해도 각성자들의 발을 묶을 수준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 점액을 체내에 흡수한 인간이 퀸이 내뿜는 안개를 흡입한다면.

온몸이 녹아내리는 극독이 만들어진다.

오직 인간을 겨냥하여 만들어진 합성독.

독성이 없다고 착각하여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점액들은 수많은 민간인, 처리업자, 의료인들과 접촉했고, 도시 어딘가에 숨어있던 퀸이 안개를 내뿜는 순간 그들 모두가 녹아내렸다.

죽어가는 이들도,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도 이유를 몰랐다.

게이트에 의한 새로운 전염병이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안개에 우리들이 식별할 수 없는 독성이 있다고 의심하고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리가 밝혀졌을 때, 살아남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네놈들 손에 죽어나간 백성들의 원성이 지금도 사무치는구나."

"누가 할 소리를 하냐? 벌레년아."

둘 사이에 난폭한 웃음이 오고 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오는 것은, 낭창거리는 검은 창.

높이 들어 찌르는 듯 하더니 그대로 빙글 돌려 휘두른다. 그 길이가 곧 속도가 되어 공기를 찢어 발기고,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창날을 몸을 숙여 피해낸다.

가장 강력한 것은, 집게발.

앞선 실패를 반성하는 듯 집게발은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번갈아가며 흉측한 톱니가 솟아난 집게가 쿵쿵 몰아넣는다. 저도 모르게 그 박자에 익숙해지는 순간 창대가 낭창거리며 다시 휘둘러진다. 한순간의 느슨함이 목숨을 앗아간다.

가장 흉악한 것은, 기둥 같은 앞다리.

저 육중한 돼지 몸뚱아리를 지탱하는 강건한 앞다리를 쑥 들어올리더니 내리찍는다. 그리고 다시 들어올리고 내리찍기를 고속으로 반복한다. 재봉틀 같이, 폭포수 같이, 그 압박감에 조금이라도 몸이 굳으면 뼈 한 조각 남지 않은 채 바스라질 것이다.

내딛는 걸음, 어깨, 팔, 관절 하나하나의 움직임으로 생사가 갈라진다.

살 수 있는 쪽으로, 다시 살아남는 쪽으로.

"키­앗!"

쇄도하는 앞다리를 피해 기껏 좁혀 놓은 거리를 다시 벌리자 창이 곧게 뻗어 머리를 노려온다.

정직한 공격, 고개를 살짝 틀어 창을 피하고 땅을 강하게 박차며 달려나간다.

힘껏 창을 내뻗은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굳어있는 사이 몸을 점점 앞으로 기울이며 가속한다.

그리고 힘차게 방패를 바닥에 내질러 꽂고, 이를 축으로 삼아 물구나무 서듯 몸을 던져, 그대로 손을 놓자 방패는 땅에 꽂힌 채 몸만이 핑그르 공중제비를 돈다.

한발 늦게 회수되는 검은 창, 그 창날의 갈퀴가 방패를 찢어 놓는다.

산산히 부숴지는 방패의 파편, 그것을 딛고 칼리오네의 머리를 향해 도약한다.

그 추진력을, 속도를 칼끝에 싣고, 온힘을 다해 목을 내리치면.

칼날이 부러진다.

아 이게 안되네.

기왕 다가간 김에 여왕의 턱을 한방 걷어차고 그 반작용으로 회전하며 다시 물러났다. 별 타격은 없을건데, 그냥 기분 나쁘라고.

살짝 어지러운 게 전부인지 살짝 목을 돌린 칼리오네는 턱을 따닥거리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더없이 나약하구나 미물아."

"미물은 벌레 부를 때 쓰는 말이고 벌레년아."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검날을 복구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두껍게.

"미련함이 비할 데가 없구나. 제까짓 칼날을 휘두른다 하여 이 옥체에 흠집이라도 내겠느냐."

"저번 여왕은 잘만 죽던데? 골통이 깨지면서 즙이 팍 튀는데, 세탁도 안되서 옷 그냥 버렸지."

기세등등하게 도발하며 다시 뛰어들었지만, 알고 있다. 내 공격력으로는 지금 녀석을 죽일 수는 없다.

최대한 놈의 주의를 빼앗으면서 시간을 끌면 예림이가 다리를 끊어놓을테고, 그것으로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저 머리, 칼리오네가 안개를 뿜으려면 다리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 동시에 강한 마력으로 연결된 다리가 파괴되는 것은 본체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다.

그렇게 되면 내가 직접 숨통을 끊어 놓을 수도 있을거고, 정 안되면 계속 버텨서 증원이 오도록 기다려야지.

"킷­? 키게킷­킷­킷­킷­케기킥­"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괴성과 마력감응도가 낮은 나도 알만큼 출렁이는 마력 파장.

때마침 다리 하나가 박살 난 듯 놈의 거체가 휘청거렸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어설프게 휘두르는 집게발과 창을 피해내고 제대로 들어 올리지도 못하는 듯한 앞다리를 타고 올라 다시 한번 목을 향해 힘껏 검을 휘두르려다가 앞다리에 치여 날아갔다.

날아가.

난간에 박혔다.

아프다.

난간이 두꺼워서 버텼다. 다행이다. 옥상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으니.

왜 이렇게 옥상 난간이 두꺼운지, 이게 그 자살방지턱인가 뭔가 하는 그거인가? 학교에 안다녀봐서 모르겠는데 학교에서는 허구한 날 학생들이 자살을 한다고 들었다.

아. 정신이 들었다.

"튼튼한 놈이로구나."

"아…진짜, 뺑끼나 치고, 존나 비겁하네, 개같은 년."

"인간이 할 말은 아니지."

키케켓 웃으며 여왕은 말했다.

"이전 세대와 같은 종으로 묶지 말거라. 관문을 닫고 우리의 터전에 뿌리 박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티끌만큼의 결함도 없는, 인간을 말살하기 위한 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오! 턱도 움직인다. 생각보다 멀쩡한거 같은데 시발 의수 박살났네. 안에서 원두 가루가 흘러내렸다. 비싼건데. 아까워라. 미리 빼둘걸.

"거, 폐관 수련하는 김에 한 1갑자 내공이나 쌓고 나오시지 왜 벌써 나오셨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불만을 토하자 칼리오네는 역으로 불쾌하다는 태도로 턱을 딱딱거렸다.

"원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제로 끌려온 셈이지. 겨우 인간들에게 좌지우지되다니, 불쾌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나름 좋은 기습이 되었구나."

"어느 씨발놈이 과자 흘리고 청소도 안했대? 그러니까 바퀴벌레가 꼬이지."

어깨를 가볍게 돌리고 부러진 검은 대충 던져 놓았다. 여력을 쥐어짜 짧고 묵직한 도끼를 하나 만들어 쥐었다.

한 쪽 팔로 타격 비슷한 거라도 남기려면 이제 이것 뿐이다.

"Round Two­"

정신을 다잡기 위해 단편소설 한 권을 가볍게 읽는 러시아인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여왕을 향해 걸었다.

칼리오네는 가소롭다는 듯 그 자리에 선 채 킬킬거리다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 옆을 돌아보았다.

배덕적인 의상, 부분 염색이 개성적인 헤어 스타일,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문양과 보라색 불꽃.

그리고 허무를 좇는 듯 공허한 눈빛.

부서진 옥상문을 지나, 서혜은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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