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용기의 증명4
* * *
호출기의 빨간빛이 기계적인 흥분 상태를 불러온다.
장비, 칼이랑 방패 정도, 일상용 의수, 만든다, 권총, 자원 저장량, 이동 시간, 합류한다면.
할 수 있는 것과 사용할 수 있는 것, 필요한 것,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채워나간다.
대강의 정리를 마친 후, 호출기가 송신하는 좌표에 주의를 기울였다.
가까운 지점이라면 먼저 도착해서…
"몇 곳이야 대체?"
호출기는 몬스터가 피해를 남긴 구역 수십 개의 좌표를 띄워주었다.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시가지 사냥팀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제때 피난이 끝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우선 기동 타격대를 구성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 할 것이다. 운이 좋다면 늦지 않게 다른 헌터들도 합류할 거고.
섣부르게 하나의 개체를 노려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적인 작전 구성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좋다, 그러면 구체적인 지침이 내려오기 전까지 가장 가까운 좌표로 이동하여 대기한다.
그렇게 방침을 정한 후 데이터를 검토하던 중 무언가가 미심쩍었다.
불길하고 익숙하다. 피해 구역의 좌표와 보고 시간들이 어떤 특정한 패턴을 나타내고 있었다.
위화감에 젖어 잠시 걸음을 멈춘 사이 현장을 촬영한 몇 장의 사진 데이터가 새로이 도착했다.
혐오스럽게 부숭부숭하게 털이 난 다리와 번들거리는 노란 눈이 오돌오돌 박혀있는 모습.
사진 속에서 중형 왜건에 비견되는 크기의 거미가 노랗고 미끈거리는 액체를 뿜어 대고 있다.
충귀형, 그중에서도 낯익은 모습이었다.
"지도, 야, 작전 지도, 그거 어디 있어?"
"작전 지도? 차에 있지, 왜?"
지혜는 초조한 와중에도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설명하느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뛸까? 아니, 주차장이 무슨 미로 마냥 꼬여있던데 어느 세월에 찾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와중 한 가지 기억이 스쳤다.
"여기 유사시 주요 거점이지? 본부로 대회의실 쓰고."
"응? 그렇지. 근데 왜?"
"몇 층이었지?"
"어, 4층. 근데 왜?"
"가자!"
"뭐? 야!"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뛰어나갔다. 잠시 후 뒤에서 따라 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지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중에 조금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정말 시간이 부족했다.
다짜고짜 회의실을 찾아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당황스러운 정적 속에서 직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이곳은 관계자 외에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타이탄즈, 시가지 사냥팀 윤현수입니다."
나는 헌터증을 꺼내어 내밀며 말했다.
"현재 도시 내에 다수의 몬스터 침입으로 비상사태로 판단되는바, 이상사태대응법 3조 2항에 의거하여 모든 시민들은 협조의 의무가 있습니다. 현시간 부로 이곳을 타이탄즈 상황통제실로 사용하니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뒤통수가 따갑다. 지혜가 경악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필요한 절차다. 5년 만이라 진짜 겨우 기억났는데, 3조 2항 맞겠지?
복잡한 건 집어치우고, 나는 대답이나 질문을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대신 권한에 따라 직원들에게 작전 지도 설치를 요구했다.
권위와 분위기란 무서운 것이다. 기세에 등 떠밀린 직원들이 허겁지겁 준비를 시작했다.
정리를 마친 테이블 위에 작전 지도가 펼쳐지고 그 위에 아크릴판을 올려두었다. 나는 그 위에 검은 보드마커로 슥슥 표시를 했다.
좌표와 보고 시간으로 몬스터들의 예상 이동 동선을 그려놓는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흩어졌는지, 어디를 향하는지를 꼼꼼히 파악한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긴다.
큰 건물. 사람이 많으면서 인구밀도가 높고, 유동 인구가 적어야 한다. 주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 좋다. 하지만 너무 막혀 있는 것도 좋지 않다. 옥상이 넓어야 한다…
나는 후보지 몇 곳에 빨간 마커로 표시를 한 후 좌표를 외운 후 전화를 걸었다.
"예림아, 어디야?"
[본부에서 가장 가까운 좌표로 이동중이에요. A4E7…]
"됐고, 지금 불러주는 좌표로 와! 거기서 합류한다!"
[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좌표를 불렀다. 기다리기에는 이미 인내심이 한계였다.
"잠깐만요, 지금 괴물이 나타났는데 관련 없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는 겁니까?"
어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느닷없이 딴지를 걸길래 냅다 멱살을 잡고 끌고 왔다.
역시, 아까 그놈이다. 광부니 과욕이니 헛소리하던 그놈.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과 인내심을 낭비 시킨 양복쟁이에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현시간 부 지휘권을 타이탄즈 소속 최지혜 수석 연구원에게 이양합니다. 이의가 있으면 그쪽에 하세요."
나는 코트의 방어 소자 잔량을 체크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너 아까 그 새끼지? 거, 적폐니 뭐니 떠들던 사람."
"네? 뭐요?"
"시끄럽고, 이 동네 온 지 얼마 안 된 거면 귀 열어 놓고 잘 들으쇼. 헌터는 원래 사람 지키라고 만들어진 거 아닙니다. 광부질하라고 모인 놈들도 아니고."
뒤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냥, 괴물만 죽이고 싶어서 시작한 거지."
후련하게 할 말을 마친 후 방을 나왔다. 이제 나머지는 지혜가 수습해줄 것이다.
나는 다시 예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림아, 도착 예정 시간."
[10분이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여기…]
"여기 뭐, 어? 아, 어."
나는 그제야 합류지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카데미, 그것도.
"혜은이 다니는 곳이지? 맞다. 걔 연구실에 얌전히 있지? 따라오려고 안 하든?"
이번에는 충분히 기다려줬건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길거리는 여고생이 방황하기에는 너무 밝고 적나라했다.
서혜은은 연구실을 나와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면서.
그것은 후회와 닮아 있었다.
최초의 자각, 최초의 자학.
처음 특별하다는 것을 의식한 것은 언제였을까.
시작은 늘 그렇듯 평범하게,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의 말다툼이었다.
"넌 왜 너만 알아? 너만 특별한 줄 알지?"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인지, 그 경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굉장히 상처를 받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게 아닌데,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는 괜한 오기로 변해버리기 쉽다.
'그래, 그러면 어쩔 건데? 그러는 너는 뭐 특별한 줄 알아?'하고, 서혜은이 생각했다.
그렇게 냉전이 시작되어 서로 말도 나누지 않고 시선도 마주하지 않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린애들의 싸움이 으레 그렇듯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조금씩 다시 관계가 회복할 조짐을 보일 무렵에.
서혜은이 각성했다.
미안했고, 내가 잘못했어, 그 쉬운 말이 드디어 나오려 할 때였는데.
각성자 등록으로 며칠간 학교를 빼 먹은 서혜은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싸늘한 시선과 외면이었다.
일반 학급에서 아카데미의 초등부로 전학 가는 데에는 몇 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시간 동안 서혜은은 학급 내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곧 못 볼 텐데 뭐가 그리 매정했는지, 아니면 앞으로 안 볼 사람이라 더 쉽게 그랬던 건지.
완전한 고립 속에서는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믿음 없이는 버티기가 어렵다.
내가 특별해서 이런 거야, 특별하니까, 각성자니까.
선민의식은 간절한 자기 합리화였다.
그냥 그렇게 끝날 이야기였다. 아카데미로 전학을 가고 새 친구와 새 교실에 적응하고 나면 끝날 이야기.
하지만 평범한 사춘기의 방황에 어느 거대한 눈동자가 흥미를 보였다.
꿈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동굴에서 흘러나오듯 깊고 쇳내가 비릿하게 풍겨오는 목소리가,
'너는 특별하다'고 말했다.
서혜은이 동의했다. '남들과 다르게, 더 특별해지고 비범한 존재가 되어라. 그것이 조건이다.'
서혜은이 끄덕였다. '너 다운 모습을 지키거라. 그 모습이 보기 즐겁다.'
그렇게 서혜은은 특별한 힘을 손에 넣었다.
각성자들이 모인 아카데미에서도 돌출되고 뚜렷이 구분되는 특별한 능력을.
'재롱을 떠는 꼴이 썩 보기에 좋구나.'
서혜은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좁은 공간이다.
각지에서 모인 각성자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별했고, 어쩔 수 없이 서혜은은 자신이 유달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무감인지, 강박인지 모를 감정은 남았다. 그녀는 특별해야 했다.
특별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었다.
……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애부터 죽어]
[평범하게 사세요]
이런저런 말들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녀가 김예림을 동경했던 이유는 희망 때문이었다.
F급 헌터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C급 헌터로 승급. 타이탄즈에 입단하여 최단기로 A급 헌터가 되었다.
자질도, 능력도 평범하다고 여겨졌던 김예림이 유망주로 부상하고, 빛나는 활약마저 보여주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반전. 비루하던 것이 특별한 것으로 변모하는 모습.
그래서 서혜은은 김예림을 동경했다.
설령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특별해질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하지만 김예림은 그녀의 이상을 부정하였다.
여전히 목소리는 속삭인다.
'째깐한 것아, 나의 말을 의심하느냐? 너는 특별하다.'
서혜은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손등에 문양이 떠오르며 불길한 빛을 뿌렸다.
'아둔하고 안타깝구나, 아이야. 확인할 기회를 주겠다.'
서혜은의 발걸음이 어딘가를 향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 끝에서 무엇을 만나건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다다른 곳은 어느 아카데미.
서혜은이 다니는 곳이었다.
정말로 운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