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용기의 증명3
* * *
서혜은와 김예림, 단둘이 있는 연구실은 평소보다 쌀쌀하고 적막했다.
그 차가움 속에서 김예림은 결심을 마쳤다.
"새삼스러운 질문이지만, 혜은 씨는 헌터 지망인 거죠?"
"네."
서혜은은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질문을 던진 김예림도 막상 대답을 듣고 나니 무언가 주저하는 눈치였다.
둘 사이에 짧게 망설임이 오가고 김예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늘 힘들어요. 괴롭고. 그렇지만…"
꺼내기 어려운 말은 대부분 흉기에 가깝기 마련이다.
"저는 혜은 씨가 헌터가 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서혜은은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농담인가? 뭔가 오해가 있는 건 아닌가?
현실 도피에 불과한 일이었다.
서혜은의 우상은 그녀의 꿈을 부정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 결심이 섰어요."
김예림은 지금부터 자기가 꺼낼 말이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말했다.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서혜은이 기뻐하는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감정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김예림의 말은 이해하기 쉬웠다. 마음 편히, 분노할 수 있었다.
"동경만으로 뛰어들기에는 헌터라는 일은 너무 위험해요. 괴롭고, 서혜은 씨가 바라는 걸 정말 얻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요."
"저는, 저는 이 길밖에 없어요. 비가 오면 개구리가 울고 가을이 오면 잠자리가 나는 것처럼, 제게 헌터는 숙명이에요."
서혜은은 겨우 평소의 말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전히 마음속 폭풍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혜은 씨는 개구리나 매미가 아니에요. 혜은 씨는 사람이고, 사람은 자기 길을 선택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저는 이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아니, 이 길이 아니면 안됩니다."
"누구나 그 나이 때는 그런 착각을 해요."
서혜은은 이를 악물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았다.
"착각이라니요?"
"자기 눈앞에 있는 길이 유일한 것이라는 착각이요."
다시 한번 서혜은은 목구멍으로 무언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숨을 가다듬고 흐르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다.
이런 하루가 될 예정이 아니었는데.
"전 정말, 혜은 씨가 괴로워하거나 다치는 일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로."
서혜은의 입에서 습관처럼 익숙해진 말들이 튀어나왔다.
"절 통제하려고 하지 마요. 제 운명은 제 것이에요. 전 구속되지 않을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들, 서혜은의 말버릇과 같은 말들.
하지만 김예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변수, 통제.
서혜은은 변수가 아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다.
김예림의 손에 죽었던 멸망의 숙녀가 그러했듯이.
두 사람은 각자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서혜은이 생각했다.
특별하지 못한 나는 살 자격이 없어.
김예림이 말했다.
"제 말을 믿어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에요."
*
평범한 삶을 선택한 남자가 있다.
한때 헌터가 되기를 꿈꿨으나, 결국 실버볼에 몸을 의탁하여 가드가 된 남자.
노력이 부족했을까? 재능이 부족했을까? 이유가 무엇이건, 그는 형편없는 헌터가 되느니 평범한 가드로서 살기를 선택했다.
무난한 결정이었다. 모든 사람은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원하는 것은 평범한 삶이다.
꿈을 좇아 무모한 걸음을 이어나가다 처참한 실패를 맞이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없다.
꿈이라는 도박에 판돈은 인생.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그 사람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더욱.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남의 물건으로 배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담이 강한 사람은 드물다. 실패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미래는 불투명하기에 꿈을 꾸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제외하고.
가드가 되어 산다는 것은 명예롭고 안정된 일이다. 사실, 성공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찍은 패배자의 낙인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평범한 삶에 미련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평범하지 못한 실패의 가능성과 평범하지 않은 성공의 가능성, 둘 모두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때때로 그런 미련은 질투심으로 변한다. 그 남자 또한 그랬다.
저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 그는 유망주의 활약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또 의심했다. 저런 헌터가 도시를 지킬 자격이 있나? 내가 바라던 그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이 있나?
어느 악마가 속삭이기를, 너의 의심이 타당하구나.
의심하고 시험하여 확인하거라. 너의 온당한 권리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
내가 지혜랑 한솥밥 하루 이틀 먹은 게 아니라서 아는 건데, 얜 원래 가끔 이런다.
평소에는 진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다가, 가끔 이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숨길 때가 있다.
보통은 뭘 먹이면 기분이 좀 풀리는데 곧이곧대로 듣지도 않는다.
그럴 때 답은 언제나 하나, 정공법이다.
먹인다. 더 많이. 더 맛있게.
정면에서 '왜 화났어?', '무슨 일이야?'하고 물어본다? 그건 정공법이 아니라 자살 방법이다. EX급 자살헌터가 될 바에 FFF급 좌천헌터로 평생 사는 게 낫지.
나는 불닭과 공화춘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청양고추 맛 핫바를 30도 각도, 8mm간격으로 썰어 놓았다. 식감을 살리기 위해 완벽히 조율된 각도와 두께이다. 직접 뜯어먹는 것도 괜찮지만 적당한 크기로 썰린 핫바를 면과 함께 말아서 먹는 그것은 단순히 함께 먹는 것 이상의 만족감을 가져다준다.
적당히 면이 익었을 때 물을 버리고 흡수율을 생각하여 먼저 불닭 소스를, 그 후 짜장 소스를 뿌려 뒤섞는다.
마지막으로 김 후레이크를 사뿐히 뿌려준 뒤 썰린 핫바를 얹어주면 완성.
지혜는 여전히 화가 난 눈빛으로 째려봤지만 향긋이 올라오는 냄새에 홀린 듯이 젓가락을 집었다.
나는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마지막 보험으로 탄산레몬포션을 준비해두었다.
"너무 많아. 같이 먹어."
이 말이 나왔다면 100% 성공이다. 적어도 당장 폭발할 일은 없는 것이다. 아님 말고.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아까 사 온 디저트로 입가심을 하며 나른함을 즐기던 중 지혜가 입을 열었다.
"올해는 볼 건 별로 없었네."
박람회 이야기인 것 같다. 일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온 걸 보니 기분이 풀린 게 확실하다. 아님 말고.
"그렇지 뭐. 시대가 시대인데."
"누가 보면 엄청 시대의 첨단을 달리는 사람인 줄 알겠다."
"이 윤현수가 시대를 버릴지언정 시대가 나를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진짜 틀니 다 뽑아서 강둑에 버리고 싶네."
지혜는 얼굴을 찌푸리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화를 내지는 않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풀린 것 같다.
아님 말고.
여자의 마음을 안다고 확신하는 것은 언제나 하수다. 어디에 지뢰가 숨어있을지 모르니.
"장비 쪽은 전부 다 지지부진하더라고. 작년에는 죄다 총이니 대포니 하면서 살벌했는데."
"작년에 그 이족 보행 전투 로봇 좋았는데 폐기 됐다더라."
"그딴 걸 누가 쓰냐?"
멋있는데 왜 지랄이지.
건질만한 정보도 없었고, 그냥 허탕이네."
"사람들이 경각심이 부족해서 그래."
나는 투덜거리면서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시대가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평화에 익숙해져 간다.
헤임달 프로젝트, 시공 너머를 통찰하는 문지기의 은총으로.
예전에는 그랬다. 게이트란 막을 수 없는 재앙이었다.
게이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사람들로 가득한 번화가일 수도 있고, 외곽 지역의 지하 주차장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터들은 매시간 순찰을 돌며 목격 정보에만 의존하여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늦었다. 늘 폐허 속에서 싸웠다.
게이트는 열리는 것만큼이나 예고 없이 닫혔다. 일방적으로 몬스터를 쏟아내고 닫힐 때도 있었고, 괴물들이 도시를 망가뜨리고 돌아갈 때까지 닫히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력했다. 크게 패배하거나, 적게 패배하거나.
때로 복수심에 이성을 잃은 헌터들이 게이트로 들어갔지만,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위대한 천계의 문지기는 우리에게 반격의 칼날을 쥐여주었다.
헤임달 프로젝트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다.
게이트의 탐지, 그리고 제어.
게이트가 발생하면 즉각 그 전조가 실버볼에 의해 탐지되어 가드들이 출동한다. 시민들이 대피하고 임시 저지선이 설치된다.
이후 솔저들이 합류하면 압도적인 화망이 구성된다. 그들에게는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순간 그 즉시 태워버릴 수 있는 화력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헌터들이 투입되어, 게이트로 뛰어든다.
게이트 강제 활성화 장치, 통칭 '도어 스토퍼'의 발명은 헌터들의 귀환을 담보해주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넘어간 헌터들이 발견한 것은, 신천지였다.
던전, 몬스터들이 생존하고, 번식하여 성장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이 갖춰져있는 이차원의 공간.
무력하게 빼앗기기만 하던 우리들은, 처음으로 착취하는 자들의 자리에 섰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안정적인 던전 공략 메뉴얼이 만들어졌다. 헌터들은 모든 몬스터를 몰살하고 코어를 장악하여 던전 내의 자원들을 탈취해왔다.
던전의 공략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최초의 대격변 이후 늘 자원난에 허덕이던 인류에게 던전의 자원들은 감로수와 같았다.
끝없이 소모전을 치르는 최전선에 여유롭게 물자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헌터들이 남아있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게이트 너머에 던전이 없었다면, 도시를 지키는 것은 가드와 솔저들로 충분했을 테니까.
"그래도 광부니 뭐니 떠드는 게 말이 되냐? 누구는 목숨 걸고 일하는구만."
조금 전 있었던 언쟁을 곱씹어보니 새삼스럽게 화가 난다. 뭐 욕심? 과욕?
그라데이션 분노로 치를 떨고 있는데, 지혜가 돌연 비죽 웃으며 말했다.
"니 얼굴이 광부같이 생겨먹어서 그런가 보지. 누가 그런 얼굴로 헌터하래?"
갑자기 이렇게 욕한다고? 방금 전에는 대신 화내주고 변호해주고, 그랬으면서?
여심은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다. 하물며 반쯤은 남정네나 다름없는 선머슴도 이럴진데, 다른 여자들은 대체…?
괘씸하기도 하니 원래 지혜에게 줄 생각이었던 탄산레몬포션을 따서 마셨다.
톡 쏘는 맛과 향이 몸 안을 가득 채운다.
오후의 햇살이 따스했다.
나른한 하루였다.
익숙한 호출음이 울렸다.
호출기에 빨간 불이 점멸하며, 평화에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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