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용기의 증명2
* * *
아 진짜.
지가 잘난 줄 아는 놈들하고 말을 섞는 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들 중 하나다.
빨아주고 올려치고 굽실거리고… 그렇다고 뭐 하나 과하면 안된다. 적당히 센스가 있다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그러면서 여유롭고 친절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또, 또, 지겹다. 진짜.
왜 이런 대화가 교양의 상징이 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줄다리기 하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솔직히 말합시다. 댁한테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소."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쉬운 게 인맥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어른이 된 것이다.
"네. 물론 불러주시면 무척 기쁠 겁니다. 하하. 일행이 기다리겠군요. 반가웠습니다. 하하."
이렇게 가식과 허세로 쌓아올린 위태롭고 역겨운 대화에 교양 있게 응대하다가 빠져나오니 어느새 옆자리에 있던 지혜가 사라져 있었다.
아니, 피곤하다고 지만 쏙 빠져나가는 거 좀 양심 없지 않나?
나는 잠시 지친 몸과 정신을 추스린 후 박람회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진짜, 별별 물건들이 다 있다.
처음 시장에 들어선 촌놈 같은 감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휴대용 발광 소독기에서 초소형 로켓 런처나 사냥 작살까지, 일상 잡화에서 최첨단 무기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전시품들이 많았다.
특히 대(?)괴수 병기 쪽에서는 다소 과격하고 실험적인 물건이 많았다. 사람이 만든 건물, 장갑을 파괴하는 것과 괴물의 가죽, 각질, 뼈, 뿔, 외골격을 뚫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형태의 무기를 요구한다. 그중에는 어느 특정 괴물 만을 죽이기 위한 무기도 있었고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표방하는 무기도 있었고, 여하튼 종류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화학 병기들은 조금 낯설었다. 예전에는 취급이 까다로워서 터부시되던 무기들인데 지금은 좀 바뀌었나? 나도 모르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떼었다.
"사실을 인정해야죠. 헌터는 더이상 도시의 파수꾼이 아닙니다. 새로운 위협이자 하나의, 적페죠."
회장을 걷던 와중 또렷하지만 거슬리는 목소리에 주의를 빼앗겼다. 무슨 개소리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가보니 한 남자가 단상 위에 올라 주변의 청중들에게 의견을 설파하고 있었다. 맞춤 양복에 은테 안경에. 저거 분명 재수 없는 타입이다.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도시 곳곳에 터져 나오는 게이트로 시민들의 생존이 위협 받고, 전선에 있어야 할 병력이 어쩔 수 없이 차출 되던 일이 불과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죠. 그때 헌터들은 도시 곳곳에 숨어든 괴물을 사냥하는 진짜 사냥꾼들이었습니다. 수호자라고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죠."
단호하고 명쾌하게 과거를 설명하던 목소리에 문득 흥분이 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헤임달 프로젝트가 완성되고 게이트는 더이상 인류의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게이트가 영영 열리지 않게 할 수 있고, 닫히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강제로 닫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제 도시를 지키는 것은 실버볼과 헤비박스, 가드들과 솔저들의 헌신적인 활약이지, 헌터들이 아니죠. 저희는 더이상 속아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 헌터들이 활약한 사건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거 내 이야기 아니야? 나는 우쭐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망스럽게도,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그 일이야 말로 왜 헌터들이 위험한지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왜 솔저들의 저지선이 뚫렸습니까? 위협적인 몬스터가 나올 때까지 게이트를 열어둔 채 방치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왜 게이트를 열어뒀습니까? 길드에서 헌터들이 찾아와 던전을 공략해야 하니 일부로 내버려둔 것 아닙니까?"
척, 손가락을 세우며 남자는 웃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애초에 헌터들의 존재가 그 위협을 불러왔다는 것을요. 이제 우리는 헌터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게이트 사태를 막아내고 저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헌터들을 위해 일부러 위험을 방치하고 있지요. 저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위험한 줄타기라는 것을."
남자는 이번에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목소리를 호소하듯이 낮추었다.
"저희는 시민들의 안전을 희생양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던전이라는 기름진 광산에서 자원을 캐내기 위해 거기서 나오는 유독 가스들을 외면하고 있지요. 이 모든 것이 헌터라는 위협적인 인부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헌터들이 저희를 지키고 있다는 허상을 벗어던지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할 때가 온 것입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동조하는 박수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거, 듣던 헌터 기분 더럽게.
그래도 지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들었으면 바로 뒤집어 엎었을텐데.
"이봐요."
와 나 돌겠네.
"지금 여기 다들 그 던전에서 나온 부산물로 먹고 사시는 분들 아닙니까? 자기 대신 목숨 걸고 싸워주는 사람들한테 고마워 하지는 못할 망정 뭐, 적폐요?"
앙칼진 목소리로 성토하는 목소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지혜의 것이었다.
"물론 그렇죠. 저희도 던전 채굴의 수혜자이니 헌터들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정해야 합니다. 편의를 위해 게이트 사태를 방치하고 키워나가는 건 저희라는 것을요."
"듣다 보니까 웃긴데, 군대는 갔다 오셨습니까?"
최지혜의 말에 남자는 잠시 말을 잊었다.
"아니, 군대 좀 안 갔다고 욕하는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그,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전선 쪽 상황이 어떤지는 아시냐, 이 말입니다. 지금 전선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아십니까? 거기서 소모되는 자원들, 탄이랑 방호벽, 와이어에서 차량 바퀴까지 대부분 다 던전에서 나옵니다. 게이트 나타나는 대로 들어가서 던전 공략하고, 부산물 싹 긁어와야 보급이 유지되고요."
"그건 그렇지만 지금의 시스템이 위험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위험해서, 그래서 뭐 어쩔건데요? 게이트 안 열리게 꽉꽉 막아두면 저 앞쪽에서는 전부 말라 죽을 텐데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위험하니까 다들 사고라도 터질까 노심초사하고 사태 터지면 바로 뛰쳐나가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세요? 한 3년간 무슨 문제가 생긴 적이 있습니까? 저번 사건도 민간인 피해 없이 마무리 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더 안전해질 방법도 없는데 욕심이니 뭐니… 지금 부끄러워 해야 하는 게 누구입니까?"
어우 속 시원해, 우리 지혜 말 잘한다!
근데 데리고 나가기 쪽팔리니까 이제 그만 해줬으면 좋겠어.
왜 앞에 선 사람이 많으면 맞는 말을 할 때도 좀 부끄러울까? 나는 인간 본연의 수줍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즉 온통 지혜에게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툭툭 치자 지혜는 죽일 듯한 눈으로 돌아보더니, 내 얼굴을 보고 더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을 했다.
"왜 이제야 왔어?"
"내가 버렸냐, 니가 나 냅두고 도망갔지. 일단 가자. 나 숨 막혀 죽어 진짜."
지혜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가겠습니다."
와, 그러고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며 군중 속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알아서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지혜가 뚫어둔 길을 잰걸음으로 따라가니 그녀가 편의점 의자에 앉아 생수를 벌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개소리하는 놈들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니고 왜 또 그래?"
"내가 안 하면 시발, 니가 더 지랄할거잖아."
"언제적 이야기야 그게."
군대 있을 때 이야기인데 아직도 그걸 들먹이냐. 아무튼 나는 적당히 음료수를 사서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좀 풀었냐?"
"내가 스트레스 풀고 싶어서 그러냐? 내가 그렇게 할게 없어보여?"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크와 과자 몇 종류를 사왔다.
"…먹고 속 풀어."
"커피도."
"…어."
나는 슬쩍 눈치를 본 뒤 가방에서 원두 봉투를 꺼냈다. 기계 의수로 원두를 한 줌 쥐자 손바닥으로 커피콩이 빨려 들어갔다. 손목의 그라인더가 돌아가고, 곱게 갈린 원두 위로 고온의 물이 높은 압력으로 투출된다.
약 30초가 지나고 손가락 하나를 펴자 검지 끝으로 진한 커피가 쪼르륵 흘러나와 종이컵에 담겼다.
"…"
"…"
"…내가 의수에 이딴 거 달지 말랬지."
"아니… 이 커피 말하는 줄 알고…"
"달지 말랬지."
"일상용 의수인데…"
"내가 같은 말 3번 시키지 말랬지."
"미안…"
"안 마셔 미친 새끼야."
좀 먹이면 화가 풀릴 줄 알았는데, 실수한 것 같다.
그냥 연구실에 남아있을걸… 예림이랑 혜은이는 뭐하려나…
아 진짜.
*
김예림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존경하고 동경해 마지 않는, 조금 특이하지만 재능이 넘치는 소녀.
서혜은, 레이디 로스트 헤게모니. 혼돈의 마녀, 멸망의 숙녀.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광기에 휘말려 몇 번을 죽었던가.
하지만, 김예림은 알 수 없었다. 정말 서혜은이 그렇게 변하는걸까?
서혜은이 망가지기 이전에 미리 죽인 적도 있었다. 아니, 기회가 될 때마다 죽였다. 그토록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에.
내가 죽여왔던 서혜은은 늘 이랬을까? 나는 이런 아이를 죽였던걸까?
멸망의 숙녀가 아닌 서혜은은 서혜은 본인이 믿는 이상으로 평범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김예림은 알 수 있었다.
서혜은이 그저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하려 애쓰는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김예림 자신과 닮은 꼴이라는 것을.
성실하고 꼼꼼하다는 것도.
서류를 정리하고 청소를 할 때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세심한 배려를.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윤현수를 싫어하는 척 하는 것도, 연기라는 것을.
처음부터 연기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관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김예림은 대련을 통해 서혜은의 힘을 시험해보았다.
기대 이하였다. 위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믿기지 않을 만큼 미숙했다. 멸망의 숙녀가 휘두르던 광기의 불꽃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예림은 안심했다. 이대로면 괜찮다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윤현수가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서혜은은 윤현수와 함께 훈련을 했다. 함께, 때로는 단둘이, 그렇게
나날이 강해진다, 가까워진다. 나는, 불안해진다. 죽여야 한다. 죽일 수 없다.
만약 지금 서혜은이 죽는다면 윤현수는 슬퍼할 것이다.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떼어놓아야 한다.
서혜은이 위험한 존재가 되기 전에.
누구에게?
무엇을 불안해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녀는 생각했다.
윤현수의 옆에, 서혜은은 없어야 한다.
김예림은 결심을 다졌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