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용기의 증명1
* * *
점심시간이 되면, 서혜은은 가방을 챙긴다.
오전 수업이 끝났으니 더이상 아카데미에 볼 일은 없었다. 애초에 서혜은은 아카데미가 그녀에게 더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배울만한 것은 전부 배웠다고 믿었기 때문에.
남은 것은 졸업 시험을 위한 복습뿐, 그마저도 서혜은에게는 의미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지망을 정했다.
"오늘 뭐 먹을까? 떡볶이?떡볶이?떡볶이?"
"어제도 먹고 그저께도 먹었는데 안 질리냐?"
"히잉"
"내가 한 번만 더 귀여운 척하면 죽여버린댔지."
시시껄렁한 대화가 오고 간다. 아카데미에 학생 식당은 있지만 급식은 없다. 전투직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식사량이 너무 많아서 일반 진학생들과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불만이 있었다. 덕분에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은 항상 학생들의 고민거리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서혜은에게는 의미 없었다.
연구실로 가는 길에 에너지바를 몇 개 사가자고, 서혜은은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음식에는 영양 보급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맛있게 먹어야 할 의미도,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점이 문제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평범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느끼는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서혜은은 조금 어긋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그런 어긋난 부분을 맞춰간다. 실제로 느끼는 것은 다를지라도 비슷한 정서를 품게 되며 보편적인 관점과 상식을 쌓아올린다.
하지만 서혜은은 그런 자신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욱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거라고, 그래서 자신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각성하고, 꿈 속에서의 계약으로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녀는 별 감흥이 없었다. 보이지 않던 특별함이 눈에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원래 특별했고, 계약은 그 증거에 불과하다.
그렇게 어린 시절 서혜은은 확신했다. 자기는 특별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느 시기 서혜은은 깨달았다.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특별한 사람은 따로 있다고.
무지막지한 능력으로 서혜은을 압도하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능력을 응용해 그녀를 제압하는, 진짜 재능의 원석들.
그런 녀석들에 비하면 자신은 그저 자의식 과잉에 애송이일 뿐이라는 것을 어느 시점에 깨닫고 말았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죽어.]
윤현수, 서혜은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몸서리 쳤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사람. 동경하던 우상을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꺼낸 것은 가장 아픈 지점을 깊숙이 찔러드는 한 마디였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그는 증명했다.
그동안 단련해온 불꽃들. 압축하며, 분쇄하고, 집속되어, 절단하는, 온갖 형태의 기술들은, 단 하나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10분이 안되는 시간 동안 4번의 다운, 13번의 제압, 2번의 기절을 당했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했어. 그런데 왜 졌을 것 같냐?]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던, 말없이 패배를 인정하는 서혜은에게 그 남자는 말했다.
[이기고 지는데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 어떻게 이긴다, 뭘 할 수 있다. 이런 건 부차적인 요소고.]
그러고는 재수없게도 히죽 웃었다.
[모르면 배워야지, 안 그래?]
그 다음날부터 매일, 윤현수는 서혜은을 훈련장으로 데려갔다. 기술을 가르치고 대련을 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잠재력이 있으면 강해질 때까지 쭉 살아야지. 괜히 깝치다가 죽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서슴없이 머리를 쓰다듬고,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칭찬했다.
뻔뻔하기는, 누가 이런 남자의 칭찬에 뿌듯함을 느끼겠는가.
언젠가 그 콧대를 꺾어놓겠노라고, 서혜은은 그렇게 다짐하며 많은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아 숨겼다.
그래도 오늘은 그 얼굴을 보지 않을 것이다. 윤현수와 최지혜는 연구실을 비운다. 오늘은 그동안 하지 못한 정리와 청소를 해놓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김예림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생각에 서혜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다. 알고 싶은 것도, 알아야 할 것도…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연구실에는 김예림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더없이 기쁜 표정으로 서혜은은 다가갔다.
한걸음, 두걸음. 가까워져갈 때마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서혜은은 멈춰섰다.
그리고 어쩐지 낯선 김에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예림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예비살인마 새끼야. 쳐 졸지 마라."
"그럼 니가 운전대 잡던가."
"나도 밤 새서 안돼."
개같은 년.
나는 감기려는 눈을 필사적으로 부릅뜨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빡센 일정이 혜은이의 훈련을 봐주느라 더더욱 가혹해졌다. 체력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그래도 뭐, 혜은이가 지난 일주일간 보여준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 내 도움이 없었더라도 실전 속에서 금방 성장해나가겠지만, 그 한걸음이 부족해 죽는 신참들을 숱하게 봐왔다.
"잠도 안자고 어린애랑 노니까 좋냐?"
지혜가 헛소리를 시작했다.
"너 진짜 그러는 거 되게 옛날 스타일인거 알지? 처음에는 갈구다가 점점 잘해주는거."
"세련된 건 다른 애들이 많이 해주겠지. 나 같은 사람 하나씩은 있어야…"
"위악 떨지마라, 윤현수. 그거 그냥 개짓거리니까. 야, 대충 알잖아. 그런 거 진짜 좋아하고 따르는 애들도 있을 건데, 지긋지긋하다는 놈들도 많어. 그냥 선배니까 뭐라고는 못하는거지."
"그건 뭐, …그렇지."
여전히 매서운 지혜의 규탄에 쓴웃음이 멎지 않았다. 안다. 이런다고 뭐 좋은 선배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웃기는 꼴이라는 거.
"됐어. 원래 그런 성격인 거 아는데…… 그냥 욕 해보고 싶어서 해봤어."
"미친년."
어쩌다 이런 년하고 친구가 다 되어서.
하기야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상황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욕부터 하는 게 최지혜 천성이었고.
"헤비박스 쪽에서는 오늘도 아무 것도 안 한대?"
"그냥 구경이나 하다가 가겠지. 개새끼들. 입장 금지 시켜야 되는데."
나와 지혜가 향하고 있는 곳은 일종의 기술 박람회였다.
각 길드, 장비 연구소, 기업, 그리고 실버볼 등 각성자들을 위한 장비를 취급하는 회사들이 참여해 기술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저들의 조직 헤비박스, 가장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그들은 철저하게 기술을 수집하고 독점할 뿐, 그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는다.
개새끼들. 역사를 생각하며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개새끼들.
"이번에 또 잘난 척 시비 거는 놈 있으면 죽여버릴거야."
"니가?"
"니가."
지혜는 사납게 웃으며 이를 갈았다.
박람회에 도착한 후, 겨우 주차를 마친 우리는 회장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종 병기, 전투복, 탐지기, 동력원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앞에 정장을 차려 입은 연구원이 전시품에 대해 설명하면 감탄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홍보하고, 기술력을 과시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철저하게 숨긴다. 노출과 은폐의 줄타기, 최대한 몸집을 부풀리려는 허세와 최대한 본 실력을 숨기려는 절제가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언뜻 훑어봐도 최첨단 장비들이 널려있었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겠지만, 만약 저런 장비들이 던전 공략에 도입된다면 사고율이 극적으로 떨어질 텐데. 하지만 그럴 날은 요원하다.
길드 부속의 공방은 대부분 헌터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수리하기 위한 곳이고, 자체적으로 장비를 개발할 기술력을 갖춘 곳은 없다.
무엇보다 헌터들 사이에서 '장비에 의존하는 것은 나약하다.'라는 인식이 뿌리 박힌 것도 컸다. 방어구와 자신의 능력을 보조하는 장비 정도를 착용할 뿐, 대부분의 헌터는 장비를 활용하는 것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게이트를 통과하며 대부분의 장비가 쓸모없게 된다는 이유도 크겠지만, 사실은 이미 어느 정도 극복한 문제다. 결국 헌터들의 인식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사냥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든 사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인데…
"아, 윤현수 헌터님 아니십니까."
전시품들을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 있던 중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낯선 남자가 난데없이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눈빛을 보면 연구원이라기 보다는 사업가에 가까운 사람인데, 무슨 접점이 있다고 인사를 하는건지.
"저번 활약은 잘 봤습니다."
아, 쓴웃음이 나왔다.
저번 사태가 불러온 반향이 생각 이상으로 컸을지도 모른다.
*
김예림의 전투가 공개된 이후, 그 영상은 이곳저곳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예림의 활약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규모의 능력 활용으로 화려한 전투에 대한 경외감과 이런 사람이 도시를 지키고 있다는 안심을 느끼며 김예림의 열성 팬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실망했다. 직업 헌터들, 그중에서도 기교를 중시하는 헌터들은 김예림의 싸움이 얼마나 미숙한 것인지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같은 길드에서 그동안 김예림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던 헌터일수록 실망이 컸다.
그들은 김예림이 능력을 지나치게 과시한 결과 서투른 움직임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혹은 그동안의 평가가 과장되었을 뿐 그것이 원래의 실력이다, 아니면 무언가 충격을 받아 기량이 떨어졌다고 비웃었다.
가장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헌터 지망생, 그리고 낙오자들이었다.
그들도 알 수 있었다. 김예림이 거의 능력에 의존하여 싸워나갔다는 것을. 서투른 움직임이나 치우진 능력 활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그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유망주라 불리던 A급 헌터가 능력 하나에 의존하여 싸웠다는 것에만 주의가 쏠렸다.
저렇게 할거면 나도 하겠네. 그냥 능력빨이네. 별 것도 없네. 근데 왜? 나는 아직도 이렇고, 김예림은 승승장구하고 있는거지?
헌터라고 하면 좀 더 뛰어난 존재여야 했다. 완벽한 존재여야 했다.
그래야 헌터가 되지 못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었으니까.
헌터의 길을 걷다가 무릎 꿇은 사람들은 인정해야했다. 자신이 너무 나약하거나, 길이 너무 험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을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김예림의 활약이 그 생각을 뒤흔들었다. 저런 사람이 헌터가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대체?
그들 중에서, 아무리 미숙해보일지라도 저토록 강력하게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A급 야수형을 단순히 운으로 잡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리낌없이 김예림에게 증오를 쏟아냈다. 처음부터 그들이 바란 것은 원망할 대상이었다.
그런 인지부조화의 희생자 중 하나가 조금 외진 골목을 걷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 흔히 있는, 그런 좁은 골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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