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프로메테우스 연구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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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판 노예라는 표현에 반대한다.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강제로 납치를 당하거나 어려서부터 사육을 당하여 결국 끝없는 노역을 강요받는다. 그런 사람들을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거부감은 들지언정 정확한 용어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굳이 '현대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법적으로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그 지배 형태가 좀 더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 노예는 여전히 존재한다. 자본, 희망, 자기 개발 등의 미끼로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착취당하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현대판 노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과 공포로 지배당하는 이들은 '전근대적 노예'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원시적인 논리에 복종하는 사람들, 현대의 윤리에서 소외되어 구원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들이다.
나는 전근대적 노예다.
오늘도 사악한 과학자의 손아귀에 붙들려 삶을 갈취 당한다.
"이거 3번 도안 한 번 뽑아봐."
"안될 거 같은데? 헤라클레스 합금 바닥났어 지금."
"그럼 이 부분만 표준 7번으로 대신하고 만들어 봐. 동작 실험만 하면 되니까."
"터지면 내일 야식은 니가 사라."
나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주문대로 시제품을 뽑아냈다.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부정형으로 뭉친 연기 덩어리에서 불티가 거세게 튀어나온다.
연기가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최지혜의 주문대로 구성된 견갑부 핵심 장치였다.
단언컨대, 내 고유 스킬은 소규모 개발팀에게는 천금을 줘도 아깝지 않을 귀중한 보물이다.
저장해둔 재료가 충분하다면 도안만으로 각종 물건, 장치, 기계를 뽑아낼 수 있는 스킬. 여러 가지 제약만 감수하면 그 자리에서 재깍재깍 시제품을 만들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몇몇 부분이 열화되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구조상의 결함이나 문제점을 찾아내는 데에는 넘치고도 남는다.
"안 되겠다. 이거 반응 속도가 너무 느리네."
최지혜는 몇 차례 실험을 마친 후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도 좀 쉬어. 조금 있으면 혜은이 오겠다."
"그래, 저것만 정리하고."
밤새 이어졌던 테스트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이제 지혜는 지금까지 나온 데이터들을 살펴보고 도안을 수정할 거고, 나는 소파에 누워 모자란 잠을 채울 것이다.
아무리 각성자여도 지나치게 가혹한 스케쥴이었다. 능력을 계속 사용하는 것도 적잖이 피곤한 일이었고, 깨알같은 글씨와 설계도 사이에서 씨름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물론 밤샘 실험을 마치고 이제부터는 다시 서류와 씨름해야 하는 지혜도 만만찮게 피곤하겠지만, 그녀도 각성자이니만큼 초인적인 체력으로 어찌어찌 버텨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런 일정으로 천년만년 계속 이어가지는 못하겠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쉬어야 한다.
아니, 일단 나는 아직 시가지사냥팀 소속이다. 파견 지원 명목으로 나와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 터지면 당장 뛰어가야 한다. 그래서 장비랑 호출기도 전부 챙겨왔고. 그러니까 내가 편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체력을 남겨놓는 게 내 의무인 셈이다.
하지만 도무지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겨우 잠에 빠져 들려는 찰나에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올 때마다 자는군… 부끄럽지는 않나?"
눈을 감고 무시하려고 하는 나를 굳이 찝어서 시비를 거는 목소리, 서혜은이었다.
"게으른 자의 1년은 성실한 자의 하루만도 못하다고 하지. 지금은 2시군. 이 시간에 잠을 자는 게 제대로 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
"난 내 할 일… 끝내고 자는 거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냅둬… 가서 돕기나 해…"
"무슨 일을 끝냈다는 건지.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다."
서혜은은 투덜거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소매를 걷는다. 그녀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지만 타이탄즈 이름으로 서류를 몇 장 보내니 어렵지 않게 조퇴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아카데미라는 게 고등학교인지 대학인지 그 분류가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일단 취업하러 나가는 학생을 굳이 붙잡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개발을 도와주는 데에는 아카데미 지식수준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혜은이 담당하는 것은 연구실의 청소나 정리, 기타 잡무에 불과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퍽 소박한 작업들이었지만 생각 외로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연구소의 일과는 이렇다. 서혜은이 없을 때는 밤을 새우며 개발을 진행하고, 오후에 서혜은이 도착하면 그때부터 서류 작업을 시작한다. 다른 요소를 차치하고 효율성만 고려했을 때 무척 합리적인 분업 시스템이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은 항상 스마트하게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정말 계속 누워만 있을 생각인가?
문제는 이렇다.
얘가 나 괴롭혀.
지금의 스케쥴은 서혜은으로 하여금 나를 게으름뱅이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나름 야물딱지게 일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사람이 잠은 좀 자야지…
"꺼져…잘 거야…"
"그냥 내버려 둬 혜은아. 도와주느라 밤 꼴딱 새워서 지금 졸릴 거야."
"지혜 언니도 밤새웠잖아요?"
저년 말투 진짜.
다른 사람이랑 말할 때는 저렇게 멀쩡한데, 나한테 말할 때만 유독 지랄이다.
"난 지금 쉬는 게 일하는 거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라. 좀."
"쉬는 게 일이면 세상에 실업자가 없어지겠군."
아니,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지금 내 왼쪽 어깨에 붙어있는 건 전투용 의수였다. 정교한 작업도 안되고 무겁고 딱딱해서 잘못 움직이면 연구실 여기저기에 흠집을 내놓는다. 어깨부터 통째로 의수라서 바꿔 끼우는 것도 일이다. 언제 출동할지 모르는데 빼놓을 수도 없다.
아무튼 이게 다 김예림 때문이다. 김예림이 연구실에 재앙을 불러왔다.
그렇게 원망을 곱씹고 있자니 마침 그 당사자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김예림 헌터님! 어서 오세요!"
서혜은은 눈빛을 반짝이며 반가운 듯 인사했다. 저렇게 반가워하면서 제대로 말을 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그냥 가까운 데에서 보는 거로 만족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부끄러운 건지.
김예림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고는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간식거리 조금 사 왔어요."
"어머, 고마워라. 잘 먹을게요."
지혜는 간식이라는 말에 반색하며 냉큼 봉투를 넘겨받았다.
김예림은 요즘 저런 시시껄렁한 핑계를 붙여서 매일 이곳을 드나들었다. 이제는 더이상 도와줄 거리도 없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지혜는 김예림이 무슨 꿍꿍이로 들락날락하는지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간식에 눈이 멀었거나.
"나도 하나만."
김예림이 사 온 건 호두과자였다. 잘 뒤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땅콩 과자가 나왔다. 두어 개를 집어 한입에 털어 넣으니 폭신하고 쫄깃해 맛있었다.
"이거 어디서 샀냐? …근데 니들 뭐해?"
서혜은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눈으로 김예림을 쳐다보고 있었고, 김예림은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전시하면 아마 '일방적인 호의, 그 불쾌함에 대하여' 이런 타이틀이 붙지 않을까.
"규태 삼촌이 예전에 저런 느낌으로 차이지 않았냐? 그, 간호장교한테."
"니가 이러고 다니니까 길드장님이 빨리 늙지."
"그 양반은 나 중학생 때도 이미 늙어 보였어,"
나와 지혜가 투닥거리는 사이 서혜은이 무언가 용기를 낸 듯 김예림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저… 김예림 헌터님.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서혜은이라고 합니다."
어지간히 격식을 차리는 인사였다. 나한테 말할 때는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도 자연스럽더니, 왜 저 짧은 문장은 어색하게 말하는지 참.
"음, 반가워요. 타이탄즈 시가지 사냥팀, 김예림이에요. 그동안 자주… 봤죠?"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헌터님 활약은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히 저번 시가지에서의 싸움은 벌써 몇십 번 돌려본 것 같아요!"
땅콩 과자를 우물거리며 구경하자니 가관이었다. 본 지 일주일은 넘었는데 인제야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웃겼고, 서혜은이 저렇게 들뜬 모습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웃겼다.
평소에는 온갖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하면서. 왜 저럴까, 쟤는.
그리고 이 호두과자는 어디에서 샀을까. 진짜 개맛잇네.
"그래서… 제가 혹시 더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 해서요."
"네?"
"저번에 헌터님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개인적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씀 같아서… 제 착각이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도울게요."
그때 김예림이 서혜은에게 뭔가 도와줄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게 설마 연구소 일을 말하는 건 아닐 거고.
김예림은 잠시 말없이 서혜은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 훈련을 한 번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제가요? 헌터님 훈련을요?"
서혜은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듣던 나도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다.
"얘가 네 훈련을 어떻게 도와줘? 차라리 내가 도와주고 말지."
"아니요. 서혜은 학생이 도와줘야 해요."
김예림은 담담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번 던전 공략에 실패하고, 제 능력을 사용하는 데 조금… 자신감이 사라졌어요."
"그럴리가요. 저번에 토벌 때에는 굉장히…"
"낭비가 많았지. 그게 네 능력에 확신이 없어서 그랬다, 이 말이지?"
"맞아요."
내 참견에 김예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혜은은 발끈하며 역정을 냈다.
"네가 뭘 안다고 김예림 헌터님을……!"
"너보다 잘 알지. 너보다 오래 알았고."
서혜은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김예림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그 짐승을 사냥할 때 김예림이 보여준 능력 활용은 서툴렀다.
"빠르고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움직임부터 봉쇄하는 건 좋은 판단이었지. 근데, 그러면 관절이나 발바닥의 접지면, 머리부터 노려야 하는데 그냥 힘을 뿌리듯이 낭비했잖아. 그게 문제지."
"또! 항상 이런 식으로 헌터님을 괴롭힌 건가? 세간에 풀린 것보다 훨씬 악질이었군…!"
"야, 그거 허위 보도야. 날조야, 날조."
또, 또, 음해.
하지만 이런 악소문이 으레 그렇듯, 내가 부정한다고 한번 박힌 인식이 꺾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전에서 그렇게 필요한 포인트만 노리는 건 쉽지 않다. 입으로만 떠드는 건 누가 못할까?"
"나한테 실전을 운운해? 네가?"
아카데미 졸업장도 못 받은 놈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다 하네.
"그리고, 김예림은 원래 그거 다 했어."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이 씁쓸했다.
자신의 능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능력을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는 것이다.
던전 공략은 때때로 밑도 끝도 없이 길어진다. 그리고 헌터의 능력은 무한정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력을 최소한으로, 항상 여력을 남기면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가끔은 과감함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절제할 줄을 모르는 놈은 대부분 일찍 죽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김예림은 원래 그런 컨트롤에 능했다.
그녀가 기프티드, 만능의 천재라고 불린 것은 단순히 다룰 수 있는 스킬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다.
김예림은 그 모든 것을 완벽한 타이밍에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순간에 과감하게 활약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삼월의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선배 말이 맞아요. 그때도 너무 불안해서 능력에 휘둘리고 말았죠. 원래 할 수 있었던 일도 못 하게 됐어요."
김예림은 쓰게 웃으며 긍정했다. 김예림 역시 그녀의 활약을 추켜세우는 반응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이제 자연스럽게 선배라고 부르네? 언제부터 선배 대접을 했다고.
"그래서 제대로 지금의 능력을 확인해야 해요. 확실하게 능력의 한계와 최대치를 확인하고 조율해야 실전에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죠."
"그래, 그래서 한 번 능력 대 능력으로 맞부딪치겠다? 마침 상성도 딱 반대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예림. 그제서야 의도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근데 그러면 내가 해줘도 되는데?"
"너랑 훈련하면 훈련장 다 박살 나잖아, 폭탄마 새끼야."
듣고 있던 지혜가 딴지를 걸었다. 아무래도 내 의수 점검을 맡아서 해주다 보니 일거리가 늘어나는 데에 민감했다. 한 번 싸우고 나면 여기저기 닦아야 하니까…
"그리고 네가 힘 조절이 되냐? 폭탄만 주구장창 던지면서."
"화염방사기도 있거든? 이거로 확인하면 되지."
"…그게 왜 있어? 그런 거 달아준 적 없는데."
"길드원! 다른 길드원들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화염 계통은 많잖아. 네가 부탁하면, 아니 내가 부탁해도 몇 명은 나올걸?"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말을 돌렸다. 걸리기 전에 다시 원래대로 해놔야겠다.
내가 아는 최고의 의수 전문가는 최지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화가 나면 무서운 사람도 최지혜다… 오늘 바로 빼놔야지.
"그게… 아무래도 다른 분들은 제가 불편한 모양이라서요."
그랬다. 던전 공략 실패 이후 길드 내의 여론은 그녀에게 가혹하게 돌아섰다. 뒤이어 다른 호출도 거부했으니 더 심해졌고.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아직 정신적으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았다. 예전의 김예림은 좀 더 차가웠지만 고고했고, 말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나도 아주 가끔 그 카리스마에 홀려 순순히 말을 따르게 될 때가 있었다.
지금의 김예림에게는 그런 게 없다. 사냥팀으로 막 떨어졌을 때보다는 침착해졌지만 어딘가 기운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예림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내 부담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데리고 가."
"저,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김예림은 무언가 안절부절못하다가 겨우 말을 마쳤다.
"혹시 따라와 주시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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