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신조차 모독하는2
* * *
그날, 시가지 사냥팀이 활약을 보인 날의 이야기다.
김예림은 자택에 돌아와 오래도록 생각에 빠졌다.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실수했다'라는 불안함, 건드려서는 안 되는 변수를 건드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이었다.
김예림의 손에 쓰러진, 악마형인지 야수형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진화종.
그녀가 기억하는 많은 미래 속에서, 대부분의 경우 괴물은 [테러 비스트]라고 불렸다.
그런 미래에서,
짐승은 도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야 뒤늦게 결성된 연합팀에 의해 토벌되고 '공포'의 이름을 수여 받는다. 괴물이 남겨 놓은 공포는 도시에 수많은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그 결과, 곧이어 다가올 위기에 더욱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김예림은 회차를 거듭하면서 판단을 끝냈다. 이건 필요한 희생이라고. 사람들이 괴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무력하게 도시 전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괴물은 지금 그녀의 손에 이름 없이 죽었다.
이 변화가 불러올 수많은 변수들에 김예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회귀에 회귀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미래를 가지치기하듯이 선별하고 관리해왔다. 하지만 무심코 잘라버린 줄기 하나가 그녀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돌이킬 수는 없다. 그녀는 생각했다. 한 번뿐인 목숨, 한 번뿐인 기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전한 장소에 있어야 했다. 순간 윤현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 꼴통 선배 곁은 사절이었다.
하지만…… 김예림은 다시 생각했다.
그녀를 붙잡아 이끌어주던 그 손.
손을 맞잡고 안심시켜주던 목소리.
김예림은 기억을 되새기며 윤현수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그의 행보, 인맥, 모든 것을.
그러던 중 떠올랐다. 최지혜.
윤현수의 오랜 친구인 그녀는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뛰어난 천재 엔지니어로 명성을 떨칠 것이다. 최지혜가 만들어내는 장비는 사용자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개화시켜 착용하는 것 만으로 전투력을 한두 단계 끌어올려 주었다.
하지만 그 천재성은 양날의 검이었다. 어떤 미래에서 최지혜는 김예림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지만, 또 어떤 미래에서는 윤현수와 함께 김예림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군이 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반드시 포섭해야 했다.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김예림은 다음날 박규태를 찾아가 시가지 사냥팀에 남기를 부탁했다. 윤현수를 통해 최지혜와 대면하고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윤현수의 방해가 있기는 했어도 나쁘지 않은 첫 만남을 가지고, 알고 있는 정보들과 연줄을 이용해 최지혜와 윤현수의 연구에 도움을 줬다.
김예림은 스스로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었다. 회귀를 잃어버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냉정함을 되찾았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사냥팀에 남을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윤현수를 거치지 않더라도 최지혜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말았다.
우연을 가장해서 윤현수와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죄어오는 느낌을 거짓말에 따르는 긴장감으로 치부했다.
아카데미에서 정말로 우연히 윤현수를 마주했을 때에는 머리가 새하얘지며 원래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가며 옆을 걸었다.
김예림은 무엇이 핑계이고 무엇이 충동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믿고 있는 이성은 그토록 위태로웠고, 감정은 더더욱 위태로웠다. 그녀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카데미에 방문했던 이유, 깜빡하고 놓쳐버린 또 다른 중요 변수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자칭하기를, 레이디 로스트 헤게모니.
수치심에 자살한 용을 먹어치운, 최악의 마녀였다.
*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왜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 그냥 우연이라니까? 그냥 가끔씩 들리는 거라고"
홉뜬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던 서혜은은 시선을 돌려 김예림을 바라보았다.
"우연? 가끔? 글쎄, 누가 김예림 헌터님을 위해 문을 열어줬는지 모르겠군. 내 기억에는 자동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서혜은의 추궁에 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워낙 자주 드나들다 보니 아예 카드키를 준 게 실수였다. 김예림은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앉아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서혜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음, 혜은 학생. 김예림 헌터가 연구실 소속이 아니라는 건 사실이에요. 김예림 헌터는 가끔 도와주는 거뿐이고, 실제 책임자는 저예요. 그리고 윤현수 헌터는…"
"일종의 후원자지."
"음…… 네, 비슷해요. 실험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애써 대화를 수습하려는 지혜의 설명을 살짝 보충했더니 도리어 매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알겠지? 도움을 받는 건 맞는데, 김예림은 엄연히 외부인이야. 그럼 거짓말은 아니지?"
"그깟 말장난으로 넘어가려는 건가?"
나는 다시 한번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이 싸가지 없는 꼬마를 당장 내쫓을지, 말지.
"도움이라. 호의가 착취로 둔갑하는 건 한순간이지. 윤현수, 네가 김예림 헌터님의 호의에 빌붙는 거라면……"
"아닙니다."
김예림이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짧은 말이었지만 효과는 컸다. 서혜은은 김예림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언뜻 감격한 듯하기도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지혜가 다시 분위기를 수습하려 시도했다.
"서혜은 학생? 김예림 헌터가 순수한 호의로 저희에게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저희는 그 사실에 충분히 감사하고 있고, 절대 이용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저는 못 믿습니다."
혜은은 지혜와 눈을 맞추며 제대로 된 존댓말로 말했다.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김예림 헌터님이 정말 이용 당하는 게 아닌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게요. 그 조건으로 이곳에 남겠습니다."
숫제 자기가 선심으로 남아주겠다는 태도였다. 아니, 물론 일손이 좀 필요한 건 맞지만 우리로서도 사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혜은아."
"이름으로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군."
싸가지 없는 대답은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지금 꼭 네가 원하기만 하면 여기서 일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아닌 거 알지?"
아무리 도움이 절실해도 아무 사람이나 들일 수는 없다. 지금까지의 인상으로는, 서헤은은 연구소에 들어와 일감을 늘렸으면 늘렸지 보탬이 될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도 필요한 사람만 들인다. 그리고 만약 충분한 능력이 있어도, 그렇게 비협조적인 태도면 우리가 받아줄 이유가 없어."
에두르기는 했지만 사실상 '넌 필요 없다'는 말을 듣자 서혜은은 당황한 듯 표정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서혜은은 억지로 입술을 밀어 올리며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우문이군. 이미 내 능력을 확인하고 나를 부른 게 아니었던가?"
"…그랬어? 어떻길래?"
지혜는 말없이 서류를 한 장 건네주었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학력 사항을 보았다.
"이딴 성적을 뽑아?"
아카데미는 단순히 각성자들의 능력을 개발해주는 곳이 아니다. 각성자들 중에도 평범하게 사회에 어울려 각종 직종에 종사하는 학생들도 많기 때문에 일반 교과목도 부족함 없이 가르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혜은은 국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이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해하는 걸 보면, 무언가 특별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
[비고] 계약자. 계약 경위는 알 수 없음. 왼손을 매개로 열류 조작 및 판명되지 않은 형태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음.
계약자. 각성자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존재.
어떤 초월적 존재와의 계약을 통하여 보다 특별한 힘을 손에 넣는다.
"대가는?"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계약에 따르는 대가를 지불해야했다.
그 대가는 때로 잔혹하다. 곁에 있기가 두려울 정도로.
서혜은의 입에서 서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가…라."
또다시 그녀의 손등에서 문양이 떠오르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보라색, 어느 소녀의 죽음같이 처연한 색이 불길하게 흔들렸다.
"내 계약의 대가는 '나다운 모습으로 남는 것'. 그것이 유일한 조건이지."
[크아악…]
"내가 나다운 모습을 고수할수록, [각인]은 반응하고 [힘]이 전신을 달린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불꽃이 요동치며 각인에서 거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척 보기에도 위협적인 능력. 심리적으로는 좀 부담스럽지만 별 실속은 없는 대가.
이곳이 던전이라면 믿음직한 공격수가 되었을 것이다.
"음, 그렇구나."
물론 던전이라면, 공략대라면 큰 전력이 될만한 능력이다. 문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에 이따금 숨이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연구실 일을 도와줄 사람이다. 그냥 청소나 커피, 정리 같은 잔심부름을 해주거나, 아니면 진짜 전문적인 지식으로 연구를 보조해줄 사람이 필요하지, 서혜은의 불꽃이 산을 녹이건 강을 끓이건 별 필요는 없다.
그냥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애면 충분한데, 얘는 너무…
'야, 이럴 거면 왜 불렀어?'
'나도 이런 애인 줄 몰랐지…'
지혜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속삭였다.
야, 이거 어쩌냐.
그냥 돌려보내면 된다. 그냥, '어쩌라고 쓸모없다 빨리 꺼져' 한 마디면 끝나는 문제다.
근데… 말하기가 좀 그렇다.
서혜은은 여전히 한 치의 흐림 없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짜증났는데… 자꾸 보다 보니까 좀 안쓰럽다 싶어서,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하겠다.
그리고 저렇게 자신 넘치는데 쫓아내면 개지랄할 것 같아…
망설임 속에 모두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좋아요."
느닷없이 침묵을 깬 것은 김예림이었다.
"제 생각에는, 혜은 씨가 도와줄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그걸 왜 니가 정해?
김예림은 터무니없는 폭거를 저지르면서 지혜를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지혜 씨, 부탁드려요. 괜찮죠?"
'야 안된다고 해."
"당연히 괜찮죠."
아니.
무어라 제지를 해보려 했지만 이미 손 쓸 수 없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단숨에 화색이 되어 김예림의 손을 부여잡는 서혜은의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김예림은 서혜은과 마주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서혜은, 레이디 로스트 헤게모니.
도시를 꺼트릴 수 없는 화마로 삼켜버린, 파괴력으로만 따지면 그녀가 겪어온 적들 중 최강에 가까운 상대였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까다로웠던 것은 그 혼란스러운 언동이었다.
스스로에게 낯부끄러운 별칭을 붙인 뒤, 그 별명으로 자신을 부르는 상대를 죽여버렸다.
평소에는 말을 거의 하지 않지만, 가끔 말을 할 때는 온갖 은유와 암시를 담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답하면, 죽였다.
종잡을 수 없었다.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김예림은 서혜은이 레이디 로스트 헤게모니로 각성하기 전에 미리 목숨을 끊어두었다. 그것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윤현수와 서혜은이 만났다. 이 만남이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만약 서혜은을 죽였을 때 윤현수가 그 사실을 알게된다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을 보류했다. 대신 서혜은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가두려고 했다.
…선배라면, 김예림은 생각했다.
선배가 곁에 있다면, 서혜은을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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