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신조차 모독하는1
* * *
사람의 감정은 몸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래의 끝, 발걸음은 신바람에 산들거리고
양옆의 끝, 손짓은 날아갈 듯이 가볍다.
그리고 가장 위쪽, 얼굴은 싱글생글 웃으면서 만연한 기쁨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가슴 속에 담겨있다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사지 말단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고 신기한 일이다.
나는 지혜의 새로운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렇게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아직 준비 단계에 있었다. 필요한 장비나 자재는 거의 정해져 있었기에 길드에서 내려온 예산과 내 인맥을 이용해 미리 마련해놓을 수 있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발족하기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기존 데이터를 검토하고 확인해보겠다면서 며칠째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잠도 안 자고 자료들을 읽어보며 신을 내는 모습에 비죽 웃음이 나왔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게 현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슈트 개발은 나와 지혜의 오랜 숙원이었다. 오랫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일이 한 차례 계기만으로 이렇게 술술 풀려나가다니.
이러한 극적인 진전에는 김예림의 조력이 한 축을 차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혜 때문에 지나치게 서둘렀던 것뿐이고, 김예림이 도와주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필요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은 도움이고, 필요한 도움이라고는 못 해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할 수 있는 그런 애매한……
아니 김예림 얘는 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지? 이거 내가 고마워 해야 돼?
나는 그동안 김예림 때문에 망신살이를 했던 원한들을 되새기면서 도어락을 열었다.
도어락! 새로운 연구실에는 무려 도어락이 있었다. 번거롭게 열쇠를 들고 다녀야 했던 장비 3팀과는 보안의 '차원'이 다르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오, 새롭고도 순결한 공간이여!
그 안에는 최지혜 대신 낯선 소녀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음속에 경종이 울렸다. 저절로 경계심을 불러오는 외양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검은 스키니진에 사이키델릭한 무늬의 블라우스, 치렁치렁한 은제 장신구와 얼룩덜룩 부분 염색을 한 머리카락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대조적으로 체격은 의자에 파묻힐 듯 조그마했다.
그러나 몸에 걸친 옷 이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 얼굴이었다.
소녀의 여리여리한 얼굴선은 과감한 화장과 기묘한 부조화를 일으켜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그 눈.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듯 허무하고, 권태롭고, 신비로운 눈빛.
내가 소녀를 관찰하는 사이에 소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히 그 입술이 미소를 그린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운명이라고 해야겠지."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서두.
"아니… 아니지. 불행은 준비되지 않은 자들의 필연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글쎄. 근데 너 누구냐?"
내 질문에 소녀는 여전히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게 아니야. 왜 내가 여기에 있고, 왜 너와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어째서 불행한 일인지 알고 싶다면… 그런 피상적인 질문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순례길을 걷는 자가 흙발을 두려워하겠느냐.' 나는 이미 각오를 다졌어."
마치 시를 읊듯이 조용히 뇌까리는 목소리는 간신히 내 귀에 가 닿았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소곤소곤 귀를 간질인다. 난해한 문장들이 뇌리를 떠돈다.
나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았고,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 몇 살이냐? 어른한테 다짜고짜 반말하는 건 무슨 예의야?"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미친년은 분명했다.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하고 허세에 찌든 말만 줄줄 늘어놓는 꼴이, 딱 사춘기 철없는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멋있는 척 나대고 싶어서 24시간 안달이 나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경우 없이 굴지는 않았고…… 뭣보다 저거 고등학생은 되어 보였다. 고등학생씩이나 돼서 저러면 안쪽팔린가?
내 질문에 소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그녀'의 곁에 있는 게 이런 추레한 남자라니…"
"누가 누구 보고 추레하대? 지는 다 찢어진 바지 입어 놓고는."
"이건…!"
내 말에 발끈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삼킨 소녀는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연기했다.
"공격성은 상대와 대등해질 수 없다는 나약함의 발로지. 생산적인 대화를 위해, 내가 여기서는 양보하는 수밖에 없겠어."
듣고 보니 맞는 말도 하는구나 싶다.
"꼬마야. 이름이 뭐야? 그리고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누가 꼬마야!"
혹시 겁먹고 허세를 부리는 건가? 싶어서 기껏 사근사근 말해봤는데, 안 통한다!
그런데 저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속이 시원하기는 하다.
"그럼 어른 대우 해줄 테니까 어른스럽게 대답해라. 누구십니까, 여기엔 어떻게 들어오셨죠?"
"지금 나랑 장난을 하고 싶은 건가…?"
정중한 말투로 말해도 화를 낸다. 솔직히 진지하지 못한 건 자기가 더 심했으면서 저렇게 지랄이다.
하지만,
"잘 생각하고 대답해라. 싸가지 없이 굴다가 처맞지 말고."
그냥 놀리려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이름은 뭐고, 어떻게 들어왔어? 빨리 말해."
다시 말하지만, 새로 바뀐 연구실에는 도어락이 있다. 그리고 그동안 반입한 자재들과, 값비싼 장비들, 초기 설계안과 각종 기초적 실험 데이터와 검증 자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자료들에는 절대 함부로 밖으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던전 내에서의 실전 데이터와 연구 기록들이 포함되어있다. 값을 매기려야 매길 수 없는 정보들.
정신이 나간 건지, 아니면 철이 없는 건지 모를 이 소녀는 연구동의 보안을 뚫고 이 보물고까지 기어들어 와 내 앞에 앉아있었다.
불청객 소녀는 뻔뻔하게도 미소 지었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무고죄는 무고함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하지. 그래서 죄는, 때때로 무지함에서 태어나는 거야."
좋아. 알겠다.
16살 때 헌터 일을 시작해서 구른지가 8년.
경험상, 말 많은 것들은 죄다 꿍꿍이속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저렇게 쓸데없이 두루뭉술 하게 말을 돌리는 동안, 그녀의 조력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던가.
"그렇게도 알고 싶다면… 대답해주는 수밖에 없겠지."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연구실 앞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발걸음이 들린다.
동시에 소녀의 손등에서 빛나는 문양이 떠오르며 보랏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심연의 약탈자이자 신음하는 꺗!"
나는 지체없이 달려들어 소녀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으며 오른팔을 비틀고, 무릎에 체중을 실어 소녀를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밑에서 울먹이는 듯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스킬을 사용했다.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조립되는 기계장치들.
오른손에는 장갑형 전기충격기, 왼손에는 권총이 쥐어진다. 이로써 그녀가 무슨 능력을 사용하건, 언제 조력자가 찾아오건 대응할 수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타이밍과 판단이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소녀의 조력자가 도착했으니.
"야! 미친 새끼야!"
최지혜였다.
*
"미안하다. 근데 네가 수상하게 굴었잖아."
"미친놈아 사과를 하라고!"
최지혜가 빼액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딱 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여자애가 초면에 반말 찍찍 뱉으면서 시간 끌려고 개수작을 부리는데 그럼 의심을 안 해?
소녀의 이름은 서혜은이라고 했다. 아카데미에 올린 공고를 보고 서포터즈 활동을 위해 방문했다고 한다. 연구실에서 지혜를 만난 후, 다른 업무로 잠시 자리를 비운 지혜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음… 그래. 혜은아. 많이 당황했지. 그래, 미… 미… "
미친년아. 니가 먼저 지랄했잖아.
아니 진짜. 그럼 그렇게 말을 하던가? 나는 상식적으로 대응한 건데 내가 사과해야 돼?
"미안하다."
그래야 했다. 김예림 때도 그랬지만 세상은 원래 비상식적인 일 투성이어서 상식적인 사람이 손해를 본다.
음침한 패션에 괴팍한 염색을 한 여자애가 기밀문서가 가득한 연구실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초면에 반말로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지껄이다가 자기소개도 없이 모욕적인 언사를 뱉어가며 시간을 끌어도.
내가 먼저 팼으니까 사과를 해야 했다.
…코에서 줄줄 흐르는 피를 휴지로 틀어막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운 것은 그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건방진 태도가 고쳐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만하고 난폭한 인간. 미안하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혜은 학생. 학생도 잘못했어요. 일단 천천히 사정을 설명해야지,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면서요?"
지혜는 표적을 바꿔 이번에는 혜은을 꾸짖었다. 늘 피곤에 찌들어있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엄하고 단호한 모습이 제법 그럴싸했다.
서혜은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제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듯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예림 씨 만나보고 싶다고 했죠? 혜은 학생이 자꾸 이러면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요."
아, 얘도 김예림 팬인가 보네.
쿨한 이미지의 연예인들은 남자 팬들만큼이나 여자 팬들도 많다던데, 김예림도 그런 경우였다.
근데 그렇게 협박한다고 얘가 말을 들을까?
"잘못했습니다…"
아니.
"아니, 왜 나한테만 반말해?"
일관성이라도 있으면 내가 덜 억울하지.
"아니면 너 나 본 적 있니?"
말을 하던 도중 덜컹 튀어나오는 기억이 있었다.
2년 전쯤인가? 던전 실습을 나가던 아카데미 학생들을 통솔한 적이 있다. 그때는 한창 잘나가면서 공략대 팀장 일을 하던 때였는데, 2박 3일간 던전을 돌며 학생들하고 꽤나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그중 몇몇은 연락처를 받아뒀다가 길드에 취직할 도움도 줬었는데, 한 명 여태 소식이 없는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처음 본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 어떤 궤변은 진리를 꿰뚫고, 어떤 소문은 진실을 담고 있는 법……"
"처음 본다는 소리 아니야? 너 그냥 미친년이지?"
"아 미친놈아 말 좀 이쁘게 하라고!"
지혜는 내 뒤통수를 빡 내리쳤다. 공평치 못하게도 지혜는 혜은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다. 조금 속상했지만 탁상 위에 어느새 피 먹은 휴지가 수북이 쌓인 모습을 보고 마음을 풀었다.
"혜은 학생도 그래요. 꼭 일부러 시비를 걸고 싶은거 같은데, 그런 태도면 여기서 받아주기가 힘들어요. 현수 씨가 여기 매일 드나들 텐데. 매번 이럴 거예요?"
되풀이된 경고에도 혜은은 굴하지 않고 꿋꿋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때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원수와 손을 맞잡아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죠. 그런 때에 제 고집만 밀어붙이는 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네, 제 잘못입니다. 그렇게 각오를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날 선 단어로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은.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어질어질하네.”
얘는 그냥 시작이랑 끝에 잘못했다고 하면 전부 사과인 줄 아나? 난 사과 못 들은 거 같은데?
"그러니까, 나는 마음에 안 드는데 예림이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가증스럽군. 그렇게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김예림 헌터님은 너 같은 것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맞아, 아니야?"
"네 말이 맞다."
무슨 광신도도 아니고 김예림만 헌터'님'이고 나는 대충 부르는 게 심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이제야 겨우 대화가 진행되는 것 같다.
"근데 어떡하냐? 예림이는 여기 연구실이랑은 관련 없는데?"
"뭐? 하지만 그때……"
"아니, 내가 예림이랑 같은 팀인 건 맞지. 내가 여기 도와주는 것도 맞고. 근데 그게 내가 개인적으로 돕는 거지, 시가지 사냥팀이랑은 별 관련이 없거든? 그러니까 여기서 서포터즈를 하건 봉사를 하건, 예림이 얼굴 볼 일은 없…"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김예림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인 인간."
나는 그때, 김예림에게 카드키를 넘기던 스스로를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