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 속 뽑기로 살아남는 법-129화 (130/144)

129화

모래 위의 뜨거운 열기에 인적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사막의 지대, C구역.

모래가 흩날리는 것 외에는 침묵만이 가득 찬 C구역에 실로 오래간만에 소음이 일어났다.

쿠웅, 쿠웅, 쿠웅.

다만 그것은 인간들이 일으키는 소음은 아니었다.

기갑 보병.

이족 보행에, 10M는 족히 넘기는 거대한 기갑 병기. 가슴팍에 거대한 포대가 튀어나온 그것은 인간 형태를 지닌 전차.

사막이다 보니 위장색이 다르기는 했으나, 이미 D구역에서 정호가 한 번 무너뜨렸던 녀석들과 다를 것이 없다.

가까이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만 같은 기갑 중대.

그 앞을 하나의 인영이 막아섰다.

“지휘관은 누구인가?”

쿠웅, 쿵-

그 하나의 인간의 등장에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갑 중대가 동시에 멈추어 섰다.

끼이익-

동시에 하나의 기갑 병기의 뚜껑이 열리며, 훤칠한 얼굴의 남성이 내려섰다.

사내는 나타난 이가 누구인지 한참이나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이거 누구십니까. 롬멜 원수님이 아니십니까.”

“경례는 그렇다 치고, 관등성명은 어디 갔는가? 헹크 대위.”

“무슨 그런 섭한 말을 하십니까. 하하, 도움을 주러 온 상대에게 이리 대해도 되겠습니까?”

롬멜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라를 판 녀석이 혀는 길군.”

헹크 펠드메이어르.

네덜란드의 정치인이자, 독일에 기밀을 누설한 배신자.

롬멜의 말은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었으나.

헹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하하. 마찬가지 아닙니까?”

헹크의 눈빛이 돌변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 그런 의미에선 오히려 원수님이 더 악질이시죠.”

분명 존대를 꼬박꼬박하고 있었으나, 잔뜩 날이 선 말.

헹크는 마치 적이라도 바라보듯이, 롬멜을 쓸어 보았다.

순식간에 당장이라도 포격 명령을 내릴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언제 죽는지 신기한 노인이, 이제와 권력을 쥐겠다는데 좋은 말을 해 줄 녀석은 없을 겁니다.”

“…….”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출해 내는 헹크.

하지만 그것에 롬멜이 항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롬멜이 높았으나, 당장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헹크였으니까.

“…물건은.”

롬멜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헹크가 가져왔을 보급품을 요구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 물론, 물론 가져왔죠. 아주 A급 녀석들로요. 어이.”

헹크는 그리 말하면서도, 대기 중인 기갑 병기를 향해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쿠웅, 쿠웅.

헹크의 말에 따라, 기갑 보병들이 보급품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양이 상당했던 탓에 모래 위에 고철로 이루어진 산이 생겨날 정도.

“자, 저는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원수님.”

장난스럽게 한 팔을 들어 올린 헹크가 곧장 뒤돌았다.

“잠깐. 이대로 가면 어떻게 하나.”

롬멜은 그런 헹크를 곧장 붙잡았다.

기갑 병기 몇 대가 달라붙어야, 옮길 수 있을 정도의 보급품.

그것을 사막 위에 올려 두었다고 하여 롬멜에게는 옮길 수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가 문젭니까. 대단하신 원수님이라면,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툿-

헹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모래 위에 침을 내뱉고는 갈 길을 재촉했다.

쿠웅-

아예 보급품을 발로 걷어차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보급품들 체크 제대로 해 뒀으니까. 복귀하실 때 하나라도 부족하면 보고 올릴 겁니다.”

“헹크 대위!”

“하하!”

다급하게 부르는 롬멜을 뒤로한 채, 웃음을 흘리며 떠나가는 헹크.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꾸웅-!

“…어?”

헹크는 웃음을 터뜨리다, 자신의 시야가 갑작스레 뒤집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타고 있는 기갑 병기는 일반 병사들이 타고 다니는 양산형이 아니다.

지휘관용의, 그것도 자신이 직접 개량까지 더해 화력에 집중한 탓에 더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 마당이다.

기우뚱-

한데, 그런 병기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갈대처럼 픽 하고 모래 위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헹크 대위 괜찮나!”

멀리서 들리는 롬멜 원수의 말에도 헹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어, 어어……?”

자신의 병기보다 배는 커 보이는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병기.

마치 피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보이는 그 병기가 자신의 기갑 중대를 향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으니까.

“스, 습격……!”

하지만 헹크 또한 숱한 전쟁을 겪은 지휘관 중 하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을 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마냥 손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포격 허가한다! 공격! 총 공격!”

중대를 향해 공격을 선언함과 동시에, 미확인 병기의 유무를 알려 주기 위해 통신 장비를 붙잡았다.

“미, 미확인…….”

덜컥-

다만, 그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자신의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그러니까, 헹크 대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익숙한 목소리가 헹크의 귀를 꿰뚫었다.

“여, 역시……!”

롬멜이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서, 자신에게 말을 내걸고 있음을 확인한 헹크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서렸다.

“지휘관이 자네라서 다행이네. 다른 녀석이었다면, 정말로 보내 주려고 했었거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롬멜.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단 수 초도 필요 없었다.

“배신하는 녀석들은 항상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한 법이거든.”

달칵-

노리쇠가 뒤로 기울어지는 소리를 들은 헹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 부하들에게 반항을 멈추고, 투항하라고 하게.”

헹크의 머리가 락 밴드의 보컬이라도 된 듯, 크게 흔들렸다.

* * *

사막의 여우라는 호칭을 괜히 받은 것이 아니라는 듯.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않고서, 순식간에 하나의 중대를 차지하게 된 롬멜.

“이 일을 그대로 두고 보실 것 같으냐? 절대 아니다. 롬멜!”

실상을 알게 된 헹크가 노발대발하기는 했으나, 정호는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롬멜에게 향했다.

“괜찮겠나?”

“보급대가 출발할 때 즈음에 이미 서신을 보내 두었네. 중대 하나를 나의 휘하로 하고 싶다고. 뭐, 이것도 결국 들키긴 하겠지만 시간 정도는 끌 수 있겠지.”

그런 수완에 놀라는 한편, 정호는 곧장 떠날 준비를 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알고 있네. 괜히 원수 노릇을 한 줄 아는가. 레지스탕스들이라면 알고 있는 이가 꽤 있으니, 곧 포섭을 할 걸세.”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탁탁 두들기는 롬멜의 모습은 듬직하기 그지없다.

가장 먼저 롬멜을 포섭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절반은 완수한 거나 다름없군.’

나치 독일은 분명 많은 전쟁 범죄가 판을 치는 장소였으나.

그에 반항한, 저항한 이들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포섭을 하는 것은 눈에 띄기도 하고,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롬멜이 네오 유토피아 던전 공략의 핵심인 것은 그의 ‘원수’라는 계급과 저항자들과의 친분 때문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자네는 이제 어디로 가나?”

“알려줄 필요가 있는가?”

“그것도 그렇군.”

정호는 롬멜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군의 수를 늘리는 것에 성공했다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적을 줄이러 가야지.”

터업-

보급품 속에 들어 있는 물병을 아무렇게나 집어든 정호는 모래 바람 속에 몸을 날렸다.

* * *

‘예상보다 더 발전됐어.’

정호는 기갑 중대를 두 번을 상대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보급품 운송에 중대급을 움직이는 것부터가.’

적어도, 정호의 기억에 있는 톨비아의 던전 시절 네오 유토피아는 그럴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기계식 제어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진짜 심장처럼 쿵쾅쿵쾅 뛰는 생체형은 어떠신가요. 옛 추억이 물씬 난답니다.”

낙후된 D지역을 넘어서, B구역에 접어든 이들이 판매하고 있는 물건들은 정호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물건들뿐이었다.

‘양도, 질도 달라.’

톨비아의 던전에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네오 유토피아의 발전 속도는 정호의 예상 범위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적의 수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안 돼.’

마냥 기습과 같은 게릴라전으로 어떻게 해볼 만한 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정호가 가장 먼저 타깃으로 삼은 이는 다름 아닌.

‘멩겔레.’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인간으로 유명한 ‘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였다.

멩겔레는 네오 유토피아에서도 요주의 네임드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골치 아픈 녀석이니까.’

갖은 고생을 하며, 적과의 전투에 승리한 공격대가 녀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패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적들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쓰러뜨린 적마저 되살리는, 그야말로 죽음의 천사라는 호칭이 어울리기 그지없는 녀석.

‘보스전 진입 전에, 녀석을 찾지 못하면 못 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와의 보스전에서도 통용되는 것이라.

녀석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예 보스전에 진입하지 말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정호가 곧장 전면전을 펼치지 않은 까닭도 이 녀석의 존재가 컸다.

“후우……”

다만, 멩겔레를 만나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B구역의 중앙.

거대하게 치솟아 오른 탑.

그 제일 꼭대기 층에 녀석의 실험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들키지 않은 채 만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원래라면…… 여기쯤 골목이 있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찾은 B구역은 정호의 기억과는 상당히 상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굽이굽이 골목길이 있어야 할 장소가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메워진 도로로 바뀌어 있었다.

‘…어렵군.’

본래대로라면 맨홀로 들어가 하수도를 통해 찾아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진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녀석이 자리를 비운 상태라면 헛고생을 할 뿐인 어려운 길이다.

‘그렇다고 직접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 정호는 죽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에 B구역에 손쉽게 진입할 수 있지 않았는가.

전면전이 이루어져서는 녀석이 도망을 치고 말 것이다.

“…….”

정호는 계획과 다른 상황에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흐흠, 흐흠. 신나는 실험 교실~.”

그런 정호의 귓가에 들리는 누군가의 흥얼거림.

“오늘은 어떤 언데드를 만들어 볼까요~.”

고개를 돌린 정호는 한 노인이 양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서 토끼 걸음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들어왔다.

“…응?”

한데, 정호는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모습이 익숙하기 짝이 없었던 탓이다.

터벅, 터벅.

정호는 마치 이끌리듯, 노인의 뒤를 쫓았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 목적지가 ‘멩겔레’가 존재하는 탑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즐거운 실험 교실~. 즐거운 실험 교실~. 심장과 허파를 뒤바꾸어 볼까요.”

“이봐.”

정호는 단단히 미친 소리를 해대는 노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찔.

“누구야? 어떤 새끼야?”

노인이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정호를 향해 뒤돌았을 때.

씨이이이익-.

정호의 입가에 거대한 미소가 걸렸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의 얼굴은 정호에게 익숙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여, 오랜만이네?”

“…아, 누, 누구세요.”

처음에 그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정호의 얼굴을 보자마자 잔뜩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노인.

“왜 그래. 알고 있잖아.”

정호는 얼굴을 손에 든 물건들로 가리는 녀석의 뺨을 붙잡았다.

“반갑다.”

반가울 수밖에 없다.

“지오바니 알디니.”

그림자 지하 성채에서 몸을 숨겼던, 히든 피스.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왔던, 놓아준 녀석들 중 하나.

미치광이 과학자, ‘지오바니 알디니’가 네오 유토피아에 있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