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정호는 현실에 나타난 던전들이 게임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퀘스트’란, 요구하는 조건만 달성한다면 어떤 경우에서든 간에 보상을 쥐어 주는.
절대 계약과도 같다.
다만 현실이 된 톨비아의 던전은 전혀 달랐다.
‘크라켄의 역습 때도 그랬지.’
왕자는 분명 정호에게 보상을 내걸고서, 퀘스트를 건네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 보상을 주는 시간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둥의 말도 안 되는 말을 꺼내며 주지 않으려 했지 않은가.
퀘스트는 더 이상 게임사에 의해 프로그램된, 보증된 계약이 아니다.
언제든지 뒤통수를 노리는 현실의 계약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이번에는 알기 쉬웠지만.’
[서브 퀘스트]
[혈육상잔]
-아돌프 히틀러를 처치하십시오.
보상도 뭣도 없이, 대뜸 내던져 오는 서브 퀘스트.
특히나 상세한 내용까지 적혀 있지 않은, 그야말로 약식이나 다름없는 퀘스트를 정호가 믿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적이었고.’
헤카테의 권능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기는 했으나, 설령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자, 이제 히틀러를 칠 계획이나 세워보자고.”
정호는 비릿한 미소를 내지으며, 파울라 히틀러를 바라보았다.
“…….”
평상시의 꼬마 같은 장난기는 어디로 갔는지.
파울라는 입술을 잔뜩 비틀고서, 정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곤란한데.”
어차피 파울라에게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이끄는 백장미단은, 아돌프가 알고 있을 ‘신병기’로 중대 하나를 박살을 낸 마당이다.
거기서 파울라가 아돌프에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한들, 믿어 줄 리가 만무했다.
‘백장미단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파울라는 정호에게 가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무런 계획이 없지는 않겠지.”
아직도 불만족스러운 듯, 차가운 눈을 보내고 있는 파울라.
그런 그녀에게 정호가 미소를 내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다르지.”
정말이지, 악의 따위는 없는.
시원한 미소였다.
* * *
D구역에 일어난 한바탕의 소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봐, 다음 달의 세금을 지금 낼 수는 없나? 다음 달이면 나도 C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일 년분이라고! 얼른, 들여보내 줘!”
절그럭- 절그럭-
길게 늘어선 줄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가득 품은 기계 부품들을 흔들며 소리를 쳐댔다.
그들의 목적은 뻔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D구역을 탈출하여, 그나마 안전한 다른 구역으로 향하기 위함이다.
“불가!”
하나, 거대한 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입에서 허락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손에 쥔 총을 당장이라도 쏘아 낼 듯이 위협을 하며,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유, 이유라도 알려 달라고!”
“맞아! 이래서야 우리 전부를 범죄자 취급하는 거잖아! D구역의 43번가 녀석들이 잘못한 거라고!”
하나, 이미 포격까지 확인한 시민들의 눈에 그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철컥.
당장이라도 총성이 울려 퍼질 것 같은 분위기.
“잠깐, 멈춰.”
어린 꼬마의 목소리가 그 위급한 상황에 끼어들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고서야, 저런 명령조의 말을 할 리가 없다.
도대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이들.
뚝-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 D구역의 빈민 꼬마와 같은 모습일 진데.
그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순식간에 멈추어 섰다.
“…지크 하일!”
정신을 차린 문지기조차도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서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꼬마의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꽤나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걸어오는 꼬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반짝-
빈민의 복장에서도 그 존재감을 빛내는, 노란 계급장의 존재.
시민들이라 할지라도, 그 계급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나치에서 노란색의 계급장은 장성급 장교를 의미했으니까.
‘두, 두 개……!’
게다가 거기 새겨진, 작대기가 무려 두 개다.
다름 아닌 중장급의 거물이 D구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를 알고 있지?”
중장의 꼬마가 천천히 다가와, 같은 작대기 수를 가지고 있는 문지기에게 말을 내걸었다.
“그, 그, 그렇 습! 허억, 허억.”
중사인 그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인 탓일까.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숨을 몰아쉬는 통에 의사소통 자체가 되지 않았다.
“파울라 님이 아니십니까.”
결국 D구역의 경비 총괄을 맡고 있는 중대장급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파울라가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상황이야?”
“보는 그대로입니다. D구역의 반동분자들이 난리를 하는 통에 보고를 올린 참입니다.”
“오빠, 아니 총통이 내린 지침은?”
“아직은… 없습니다.”
하나, 말을 이어 나가면 나갈수록 파울라의 얼굴이 찌푸려져만 갔다.
‘벌써 D구역의 소란은 귀에 들어갔을 텐데, 아직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네오 유토피아 전 지역은 그야말로 아돌프 히틀러의 손 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려고만 한다면 어느 구역의 누가 아이를 낳았는지조차 알 수 있는 정도로.
어딜 가나 아돌프의 눈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한데, 신병기의 출현.
거기에 기갑 중대의 패배라는 충격적인 소식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꿀꺽-
침을 한 차례 삼켜 낸 파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통을 만나러 갈 거야. 길 좀 비켜 줘.”
“네. 물론입니다. 지크 하일.”
“지크 하일.”
끼이이익-
굳게 잠겼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문을 바라보며, 파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를 기다리는 거야.’
아돌프 히틀러는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카운트다운이라는 말이다.
완전히 적으로 돌아선 사건이 일어났으나.
아돌프는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뢰를 아주 잃어버리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아니.’
뚜벅.
고작해야 발 한 걸음.
그것으로 뒤바뀌는 도로의 색을 바라보며 파울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신뢰 따위는, 이미 잃어버렸을 거야.’
지금의 이 한 걸음은 그 신뢰를 되찾기 위한 일이다.
뚜벅, 뚜벅.
작은 소녀의 형체가 밟아 대는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 * *
아돌프 히틀러는 친여동생을 극히도 아꼈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와 완전히 무관했을 때의 일이고.
그 권력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파울라.”
“네, 총통님.”
파울라가 ‘중장’의 직책을 얻고 난 이후, 아돌프는 특히나 그 경향이 심했다.
“이번 일은 어떻게 된 건가.”
아돌프는 오랜만에 만나는 여동생의 얼굴조차 바라보지 않은 채 사건의 내막부터 꺼내었다.
꿀꺽-
“새롭게 들어온 인간의 단독 행동입니다.”
언제나 편하게 입던 빈민의 복장이 아니었기에, 제복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태도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울라는 그것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새롭게 들어온 인간이라면… 어제 들어온 지구인이겠지.”
“아, 네.”
역시나.
그저 새롭게 들어온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침공 대상의 지구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아돌프.
네오 유토피아에서 그의 눈과 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 녀석이 들어온 직후, 나는 꿈을 꿨다. 수없이 많은 패배의 꿈이지.”
“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지금껏 나의 사전에 패배는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터야.”
난데없이 꺼내는 아돌프의 말은 파울라의 고개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기억나지 않는다면, 몰라도 되는 일이다.”
끼이이익-
의자를 돌려, 파울라를 마주하는 아돌프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선량한 오빠의 미소가 걸려 있다.
“파울라, 네가 나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아, 오빠.”
그런 심경의 변화에 파울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파울라가 굳이 아돌프를 만나러 온 것은 오해를 풀기 위함도 있었으나.
사실은 ‘정호’의 지시가 있었던 탓이다.
이미 아돌프의 신뢰를 잃어버린 자신에게 있어서 정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면 굳이 그 가증스러운 녀석의 곁에 붙지 않아도 되겠어.’
그 신뢰가 아직 살아 있다면 전혀 다른 경우다.
차라리 여기서 아돌프에게 모든 것을 토로하고, 역으로 정호를 궁지로 몬다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바로 어제까지는 말이야.”
뚝.
그런 꿈같은 일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끼익-
의자가 다시 돌아선다.
“수많은 패배의 꿈을 꾸었다고 했지.”
완전히 등을 진 아돌프가 말을 이었다.
“지금껏 궁금했다. 네가 발견했다는 새로운 신병기. 그것이 제아무리 실물이 아닌, 설계도라 하여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언제 만들어 낸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타닥, 타닥.
손에 쥔 권총을 아무렇게나 의자 걸이에 부딪치며 아돌프가 고개를 흔들어댔다.
“바로 어제, 모든 것이 기억났다. 나는 지구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고.”
찰칵-
순식간에 총알을 장전한 아돌프가 몸을 일으켰다.
“네가 가져온 그 신병기에도, 나는 세 번이나 목숨을 잃었다. 파울라.”
“오, 오……오빠!”
딸깍-
노리쇠가 공이를 치기 직전까지 당겨지는 것을 확인한 파울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해라. 파울라. 녀석이 무엇으로 널 구슬렀지? 당장 불지 않는다면. 나는 혈연인 너를 죽일 수밖에 없어.”
정말이지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슬픈 눈을 한 아돌프의 얼굴.
“그, 그러니까……!”
당장 목숨을 눈앞에 둔 파울라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 * *
“그런데, 주인. 정말로 그 꼬마가 제대로 전달할 거라고 생각해?”
헤카테는 손에 쥔 렌치를 연신 돌려 대며, 걱정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정호는 그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정호는 확신했다.
파울라 히틀러는 아마도 자신과 계획한 모든 일을 떠벌릴 것이라고.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아돌프, 그 녀석은 쥐새끼 같은 녀석이야. 죽이기 까다롭기도 하고, 속이기는 더 어려운 놈이지.”
그것을 파울라라는, 믿을 수 없는 존재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파울라를 순순히 아돌프에게 보내 주었다.
“흐응…… 혹시 계획을 속였다거나?”
“아니.”
정호는 이중으로 계획을 짜, 아돌프를 꿰어 낸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지.”
끼이이이이익-
지하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호는 미소를 내지었다.
“돼, 됐어. 오빠가 내 말을 믿어 줬다고.”
두 손을 흔들며, 파울라를 향해 정호는 마주 손을 흔들었다.
“나도 믿지 않고, 녀석도 저 꼬마를 믿지 않을 거야. 그러니.”
다만, 그 얼굴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상대가 믿게 만들어야지.”
이중 간첩이란.
결국 믿는 쪽이 패배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