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톨비아의 던전, 루시퍼의 성터.
그곳의 보스 몬스터로 군림하는 루시퍼는 타락천사라는 이명에 맞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격이 천사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었다.
그저, 루시퍼가 도사리는 던전의 분위기 자체가 ‘타락’과는 연관지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던 탓이다.
[루시퍼의 성터]
- ‘천상의 세계’를 그리워한, 타락천사 루시퍼가 세계를 복제하여 만들어 낸 던전. 그는 자신의 타락을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던전의 설명 자체도 천상의 세계가 언급되고 있는 마당이다.
모두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 그 루시퍼의 성터.
본래 그것은 현재 시점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어야만 하는 존재였으나.
‘여기가 1구역이겠네.’
아스텔의 던전, ‘천사들의 신전’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보다는 톨비아의 던전인 ‘루시퍼의 성터’에서의 경험이 더욱 도움이 되고 있는 마당이었다.
‘비슷하지만, 결국 공략법은 톨비아에 가까워.’
전혀 다른 게임의 던전을 공략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흡사함을 보인다.
‘제9계급, 앙겔루스의 공략법도 완전히 틀렸었고.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낫겠어.’
잘못된 정보라는 녀석은 방해가 될 뿐이다.
정호는 아예 ‘천사들의 신전’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기에 이르렀다.
‘여긴 루시퍼의 성터다. 루시퍼의 성터.’
하지만 그리 생각하기 시작하자-
“음…….”
순식간에 숨이 턱하고 막혀 왔다.
‘미쳤군. 세상을 한 번에 작살 낼 정도잖아.’
루시퍼의 성터는 최상위 던전에 해당하는 던전이다.
그곳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수준의 공대원이 20명이 되어야 비로소 덤벼 볼 만했다.
‘아무리 제2구역까지밖에 없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물론 ‘루시퍼의 성터’의 진면목은 루시퍼가 도사리는 제3구역이라고는 하나.
그 아래의 구역을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1구역의 최약체, 앙겔루스만 하더라도.
정호 정도의 힘을 지니고서도 도박에 가까운 수를 써서 공략하지 않았던가.
‘크라켄의 역습이랑은 난이도 차이가 너무 나잖아.’
정호는 눈을 흘겼다.
아무리 봐도 이건 현 시점의 아스텔 유저들이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레전드리 클래스인 성녀의 방어막조차 뚫어 버리는 녀석들의 공세를 일반적인 유저들이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껏 이어진 침공은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아스텔의 말에 따르면 분명 침공은 세상을 종말로 이끌기 위해 나타난 녀석이다.
한데 그런 침공이 ‘단계적인’, 그것도 유저들의 수준에 맞춰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나 다름없다.
‘아스텔의 태도도 이상하고.’
아스텔은 분명 종말을 막아 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태창’이라는 힘을 부여했다.
한데, 그 이후의 태도가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
‘갑작스러운 시련이나, 레전드리 클래스처럼.’
애초에 줄 수 있는 힘을, 굳이 상황이 터지기 직전에 던져 주는 태도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금 침공하는 종말을 대비한다기보다.
‘현 사태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면서, 키우는 느낌이지.’
게임이라도 하듯, 유저들을 키워 나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지 않은가.
그런 상황 속에서 현 시점 유저들은 도저히 클리어할 수 없어 보이는 침공.
그것은 분명 지금까지의 예상과 예측을 완전히 부숴 내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나.
단 한 명.
공략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이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쯧…….”
아스텔 내에서는 레벨 12에 불과했던, ‘과금망겜플레이어’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가 말이다.
그야말로 오직 단 한 명, ‘정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정호는 눈을 부릅뜨고서, 멀리서 보이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거대한 제단을 중심으로 보호하듯이 네 명의 천사.
분명 앙겔루스도 날개를 지니고 있었건만, 녀석들은 그보다 배는 될 법한 거대한 날개를 휘적이며 공중에 떠 있었다.
스르르릉-
정호는 검을 뽑아들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거기에는 지금껏 발목을 붙잡고 있던 죽음의 두려움 따위는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천사들의 신전.
그중에서도 제1구역은 ‘세 가지의 계급’을 가진 천사들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다.
제9계급부터 제7계급까지의 천사들이 도사리는 곳.
다만, 실질적인 던전에서의 위치는.
일반 몬스터, 네임드 몬스터, 보스 몬스터로 분류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타락] [제8계급, 아르칸젤루스]
분명 계급과 이름이 바뀌었을 뿐.
앙겔루스와 전혀 다를 것 없는 글씨가 떠오르고 있었으나.
“…….”
정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녀석들의 이름은 그것으로 끝이 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우리엘]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노란색의 이름표는, 녀석들이 지금까지 만나 온 앙겔루스와는 다른.
그들 각자가 서로 다른 개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대천사.’
녀석들은 네 개체로 이루어진, 이 제1구역의 네임드 몬스터임에 틀림이 없었다.
“인간…….”
“…너희들 때문에.”
‘타락’이라는 상태 덕분인지, 대천사들은 앙겔루스와 비슷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본래라면, 녀석들의 제단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지만.’
‘천사들의 신전’의 공략법은 제단을 파괴함으로써, 녀석들의 활동을 중지시키게 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정호는 고개를 내저어, 그 생각을 털어
내었다.
‘이래서야 의미가 없군.’
시선을 옮기자, 제단은 이미 파괴되어 있는 상태였다.
첫 단추부터 전혀 다른 구멍에 끼워져 있었다.
펄럭- 펄럭-
서서히 자신들의 거대한 날개를 휘날리며, 다가오기 시작하는 대천사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녀석들의 낌새에 불안감을 느낄 법도 했건만.
“…….”
정호는 단 한 줌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녀석들을 향해 성큼 발을 한 걸음 내딛어 다가가는 모양새에는 자신감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화아아아아악-
두 손을 모으고서, 빛무리를 모으기 시작하는 대천사의 행동.
그것은 정호에게 있어서 이미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터벅.
한참이나 발걸음을 옮기던 정호가 신형을 멈춰 세웠다.
“……?”
“무슨…….”
대천사들의 입에서 당황의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공격이 닿는 바로 직전의 위치에서 정호가 멈춰 선 탓이었다.
후우우웅-
펄럭-
녀석들은 모아지던 빛무리를 지워 내고서, 다시금 날개를 펼쳐 정호에게 다가온다.
터벅.
정호는 그럴 때마다, 발걸음을 살짝 옮기는 것으로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했다.
‘이걸 못 하면 공격대에 들지도 못하는데, 이 정도야 뭐.’
루시퍼의 성터는 상대의 사거리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던전이었다.
아무리 톨비아 유저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한들.
네임드 몬스터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모여든 녀석들을 상대할 방법 따위는 없다.
‘탱커, 근거리 딜러, 캐스터, 힐러.’
심지어 놈들은 유저들을 상대로 레이드를 하듯, 이론상 완벽한 조합을 들고 나오는 녀석들이다.
그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단 녀석들의 사정거리에 들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펄럭- 펄럭-
계속해서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는 정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대천사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찾아왔다.
똘똘 뭉쳐 있던 녀석들이 서서히 넓게 펼쳐지며, 정호를 완전히 둘러싸려는 낌새가 아닌가.
사방을 가로막으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질 테니,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뚜욱-
하지만 정호는 완전히 자신을 둘러 쌀 때까지 기다렸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나 다름없었으나.
“그래, 잘했어.”
정호는 미소를 내지으며, 녀석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본다면 녀석들이 정호의 파티를 둘러싼 형태였으나.
“쟤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야? 같은 수인데, 어떻게 포위하려는 거야?”
딱. 따악.
껌을 씹으며, 내뱉는 잔다르크의 말처럼.
고작해야 네 명밖에 되지 않으면서 에워싸는 형태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판단이다.
화신들을 이끌고 한 녀석에게 돌격한다면.
순식간에 4대 1이라는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일 수 있으니까.
“그럼…….”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할 상대.
스윽-
정호는 이미 정해 둔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이름이 떠올라 있으니, 이건 좋네.’
이론상 완벽한 조합을 가지고 있는 대천사들.
그런 녀석들에게 있어서 가장 쓰러지면 안 되는 대상.
[라파엘]
그것은 다름 아닌 아군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 4대 천사장 중 하나인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을 향해 공격.”
정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타아아앙-!
누군가 총성이라도 내뿜은 것처럼, 정호의 화신들 전체가 바닥을 박차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가장 선두에 달리는 화신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 첫 빠따는 역시 힐러지.”
힐러인 잔다르크였다.
* * *
대천사 라파엘.
다른 대천사라면 모를까.
힐러 클래스인 녀석은 제아무리 네임드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정호의 파티 전체를 막아 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지금까지 네가 손맛 좀 보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야. 잘 잡고 있어.”
“네. 누나.”
콰아아아앙-!
결국 녀석은 같은 힐러인 잔다르크의 거대한 철퇴에 머리가 완전히 으깨졌다.
실로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
하지만 꽤나 값진 실적이었다.
탱, 딜, 힐로 이루어진 조합이 이론상으로 완벽해질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힐러’의 존재 덕분이다.
그런 존재가 없어졌으니, 이제 수적 우위도 앞세우는 정호로서는 나머지 대천사들과 전면전에 들어가도 좋을 정도였으나.
“바로 미카엘을 향해 공격!”
정호는 한시가 급하다는 듯, 곧장 캐스터 계열의 미카엘을 향해 공격을 선언했다.
‘체력을 최대한 아껴야 해.’
네 명의 대천사와의 전투에서 얼마나 파티의 체력을 보존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라파엘이 쓰러졌으니, 곧 튀어나올 거야.’
제1구역에는 제9계급인 천사와 제8계급인 대천사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리엘.’
‘천사들의 신전’ 공략에도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던 녀석.
제1구역의 주인인 제7계급 권품천사, ‘이리엘’과의 전투가 곧장 이어진다.
쉐에에에에엑-!
정호는 가차 없이 미카엘을 향해 몸을 날렸다.
캐스터와 힐러.
그 둘이 사라져야만 비로소 공략이 완성되는 법이니까.
“…인간, 얄팍한 수를.”
콰아아아아앙-!
다만.
그런 정호의 공격은 라파엘이 쓰러지자마자 몸을 날린 탱커, ‘가브리엘’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쯧……!”
정호는 아쉬움에 혀를 차냈다.
본래 공격대로 이루어지는 공략이다.
단숨에 4방향의 적을 일시 격퇴하는 공략법.
그것을 화신들과 함께라고는 하나, 혼자서 공략하는 정호로서는 고작 하나 밖에 쓰러뜨리지 못했다.
“멀린! 성역!”
“아발론의 성역!”
“잔다르크! 비호!”
“알았어. 주인. 신성비호!”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정호는 최선의 수로 대응했다.
이제 막 쿨타임이 돌아온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이리엘과의 전투에서 불리함으로 작용하겠으나.
네임드 몬스터 셋을 상대하는데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만 쓰러뜨려!”
정호는 전면전을 가정하고 아예, 검을 내뻗었다.
조준하는 것은 어느새 똘똘 뭉친 대천사들.
군신의 검을 이용하여, 이 상황을 단숨에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휘이이이잉-
타락한 천사들의 신전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것이 점차 힘을 불려 가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군신의…….”
한시가 급하다는 듯, 입을 열어 스킬을 발동하려는 그 때.
“저런, 그러면 안 되지 않나.”
귓가를 파고드는, 지금까지와 다른 정확한 어투의 말소리.
“…검!”
그에 정호가 화들짝 놀라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리엘이 벌써 나타났다면, 최악의 상황이나 다름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대천사들이라도 빠르게 처리해야만, 상대할 수 있을 터.
제법 정확하고 빠른 판단이었으나.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졌던 일.”
이리엘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휘이이이이-
정호의 검에서 힘차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야.”
이런 상황은 정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당황의 목소리를 내었다.
‘무효화? 캔슬기라고?’
적어도 자신이 아는 이리엘은 이러한 ‘스킬 무효화’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천사들의 신전’에서 등장하는 이리엘이라고 할지라도 전혀 없는 정보였다.
휙-!
그에 정호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일 ‘이리엘’을 찾았으나.
“…뭐.”
정호는 그 정체를 확인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분명 이리엘이 나타나야 할 제단에 서 있는 이.
녀석이 자신이 알고 있는 존재였으니까.
“무엇이 그리도 급한가.”
“…어째서 네가 이곳에 있는 거지?”
“초면일 터인데 나를 아는가? 흠, 답은 해 주어야겠지. 내가 이리엘이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고 있는 녀석.
“말도 안 되는 소리.”
정호는 일갈을 내질렀다.
녀석은 분명 정호와 초면이다.
만나 본 기억도 없거니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다.
“어째서 네가 이리엘이라고 자처하는 거냐고.”
나타난 녀석.
분명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어, 천사임에 분명했다.
[타락] [제7계급, 프린치파투스(Principatus)]
머리 위에 떠오른 것도 분명 제7계급인 ‘이리엘’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다만, 그 아래.
녀석의 이름이 새겨진 곳이 이상했다.
“플라톤.”
[플라톤☆☆☆☆☆]
별의 표시.
그것은 분명 ‘화신’임을 상징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