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6화 >
# 106화
갑작스레 나타난 한 마리의 드래곤.
매끄러운 비늘과 함께 푸른빛을 내는 녀석은 분명 블루 드래곤의 종류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었다.
성체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헤츨링이라기엔 큰.
애매모호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기는 했으나.
‘...적인가?’
그렇다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저인족들의 도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심해.
드래곤 중에서도 물 위라면, 가장 강력한 힘을 낸다는 블루 드래곤이지 않은가.
‘아직 침공의 소식도 없는데.’
슬쩍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긴 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스텔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이후, 정호는 매번 시시각각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언제, 어느 순간에 침공이 찾아와 던전이 열릴지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한데 무려 드래곤이라는, 괴생명체가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새로운 소식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드래곤’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두 번째 레전드리 클래스, 성녀!]
[이탈리아에서 탄생한, 성녀 루치아. 새로운 랭커의 반열에 들 것인가?]
일주일이나 지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대문짝만하게 기사의 제일 위, 상단에 노출되어 있는 성녀의 소식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성녀인가?’
그런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애당초 새롭게 나타난 레전드리 클래스의 소재는 이탈리아의 유저에게 돌아간 마당이다.
그런 성녀가 이런 곳에 나타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뭐, 차라리 잘 됐어.’
드래곤의 전리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특히나 드래곤 하트라는, 특별하기 짝이 없는 재료를 지니고 있는 녀석이 아닌가.
이그나투스를 바라볼 때마다 괜히 떠오르는 충동을 막아내는 것도 힘들었던 마당이다.
그런 녀석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더 이상 참을 필요도 없다.
더군다나.
“으읍...! 읍! 읍...! 주글거야..!”
자괴감과 수치심에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이그나투스의 마음을 덜어줄 수도 있는 노릇이지 않은가.
목격자가 없으면, 수치심도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촤아아아악-.
정호는 검을 고쳐 잡고는, 물살을 가르며 날아온 드래곤을 향해 내뻗었다.
덜컥-.
다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멈춰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전 들려왔던 드래곤의 말과는 사뭇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탓이다.
물론 그것만이라면 정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러 댔을 것이다.
“...”
정호의 얼굴에는 경계의 기색이 잔뜩 서려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는 분명 지금껏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청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호감을 느끼게 하는 음색을 지니고 있었으나.
‘유저라고?’
그 목소리의 정체가 드래곤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은 큰 문제가 있었다.
침공 이후, 저인족들의 도시가 아직까지도 심해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드래곤과 함께 나타나는 유저라니.
단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맞지 않는 상황이지 않은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아스텔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녀석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정호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누구지?”
블루 드래곤과 함께 나타났으니, 그 정체가 짐작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유저를 끄집어내기 위한 질문이었다.
물론, 멍청한 녀석이 아니라면 이 따위 질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나.
“반가워요. 우연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찾고 있었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은 드래곤의 위에서 그 모습을 손쉽게 드러냈다.
타박, 타박.
저인족의 공기 방울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
태양빛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을 것만 같은 새하얀 피부와 더불어, 공포영화에서나 볼 법한 백발(白髮).
그럼에도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신성한 분위기가 감도는 여성.
그녀는 미소를 내지으며, 자신의 옷깃을 살짝 들어 올렸다.
“과분하게도, 아스텔님께 성녀의 칭호를 받은 루치아라고 해요.”
그 작은 몸짓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만약 다른 이들이 있었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길을 빼앗았을 것이 분명했다.
“오, 상당한 미인이시군요. 혹시 저와 하룻밤 어떠십니까.”
물론 정호 쪽에서도 마음을 빼앗긴 녀석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 아스텔이 보냈다는 말이군.”
철컥-.
이미 아스텔에게서 선전포고를 받은 정호에게 있어서.
나타난 성녀가 아름답던, 신성스럽건 그 따위 것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인 탓일까.
루치아가 이해를 못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기는 했으나, 상황은 그와 관계없이 더욱 급박하게 흘러갔다.
츠즈즈즉-.
검을 고쳐 세운 정호가 당장이라도 신형을 내던질 듯이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잠시만. 인간. 잠시만.
그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아챈 블루 드래곤이 크게 당황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저 인간 좀 말려봐!
레드 드래곤, 이그나투스와 안면이라도 있는 것인지 도움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어, 어... 두 명... 두 명. 본 사람이 두 명.”
이미 개 거품을 물고 기절을 해버린 이그나투스가 중재해줄 리가 만무했다.
“그럼 가지.”
비정하기 그지없는 말과 함께.
꾸우우웅-!
바닥을 박차는 정호의 발소리가 심해에 울려 퍼졌다.
* * *
촤악- 촤악- 촤악-.
정호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불과 두, 세 걸음의 발돋움을 통해 순식간에 성녀의 눈앞에 도달한 정호는 곧장 검을 휘둘렀다.
향하는 곳은 당연하다는 듯,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성녀의 새하얀 ‘목’.
“...!”
그 공세가 어찌나 재빨랐는지, 정호의 검이 코앞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성녀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카아아앙-!
하지만, 그런 정호의 검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가로막히고 말았다.
-인간!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갑작스러운 공격.
그에 블루 드래곤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는 했으나, 그것으로는 정호의 공세를 막아 세울 수는 없었다.
카앙-! 카앙-!
마치 당장이라도 막아선 드래곤의 비늘을 벗겨내고서, 성녀의 목을 끊어내겠다는 듯 쉬지 않고 휘두르는 검.
-끄응...!
그것을 온전히 받아내는 블루 드래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인간이 벌써 이 정도까지.
받아내는 공세에 실린 힘이 상당했던 탓일까.
블루 드래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황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 주인이 지금껏 누구랑 싸워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성분이 다치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주인.”
“그건 또 무슨 소리래.”
다만, 그것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화신들에게는 큰 감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애당초 정호는 3성의 화신으로써 모든 각성을 이루어, 상당한 스탯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지난 한 달간 아틸라라는 좋은 스승을 두고서 실전과도 같은 훈련을 이어오는 것은 물론,
대 드래곤 전에서도 이그나투스를 상대로 몇 번이고 훈련을 이어오던 마당.
쉐에에에에엑-! 카앙!
그런 정호가 휘두르는 검에 실린 힘이 예사로울 리가 없었다.
카앙-! 카앙-!
“...생각보다 길어지네. 저 정도의 드래곤이면 금방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데.”
다만, 아틸라의 감상처럼.
생각보다 정호는 블루 드래곤의 방어를 뚫어내고 있지는 못했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당연하게도 드래곤이 홀로 막아서고 있지는 않았던 덕분이었다.
“신성보호! 신성의 축복! 실드 강화!”
성녀, 루치아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수없이 많은 스킬.
그것은 모두 방어에 치중된 버프 형태를 띄고 있었으나.
카아아앙-!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혼신의 힘을 다한 정호의 공격을 막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함을 뽐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호가 마구잡이로 검을 내던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에 불과했다.
스르르르륵-. 카앙.
스르르륵-. 카앙.
공격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정호의 공세가 변했다.
위에서 아래로 단숨에 휘두르다, 어느새 그 방향을 틀어 사선으로 그어내는가 하면.
앞으로 내지르는 듯 달려들다, 순식간에 몸을 뒤로 물리기도 했다.
-이, 이런...! 루치아. 이러다가는 정말 당하겠어.
고작해야 공세에 허와 실이 생겼을 뿐인 단순한 공격이었으나.
스스로의 몸이 아닌, 성녀를 지켜야 하는 입장인 드래곤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스르르륵-.
결국 지독하게도 유리한 가위바위보를 펼치고 있는 정호가 먼저 승리를 쟁취해냈다.
드래곤의 날개로 나아가던 검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틈이 생긴 성녀의 방향으로 내뻗어졌다.
-이런...! 루치아!
드래곤은 그에 크게 당황하며, 성녀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
성녀는 기묘하게도,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은 채 눈을 감고서 정호를 맞이했다.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한 모습.
그 모습이 어찌나 성녀다운, 고귀한 모습인지.
덜컥-.
정호의 검이 성녀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왜 피하지 않지?”
“이해해주실 거라고 믿었어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정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목적은?”
“오해는 풀리신 건가요?”
“그런 걸로 하지.”
다짜고짜 공격을 가한 것치고는, 사뭇 평범한 질답.
하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당초 정호는 성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정말로 쓰러뜨리고자 했다면, 아틸라의 강신은 물론이고 소환한 모든 화신들을 이용했을 테니까.
‘녀석에게 적의는 없어.’
공격할 의도가 없다는 것은 이미 루치아가 나타날 무렵부터 알고 있었던 대목이었다.
‘끝까지 공세를 취하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정호가 공격한 이유는 혹시나 있을, 성녀의 속내를 알아보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소득일 뿐이다.
‘성녀라...’
스스로 또한, 레전드리 클래스인 용기사를 손에 쥐기는 했다.
다만, 정호는 어디까지나 톨비아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실질적인 레전드리 클래스의 진정한 힘은 아스텔 유저들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기회이지 않은가.
정호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사실은 용기사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그것은, 상대인 성녀라고 하여 다를 것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음?”
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야 톨비아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레전드리 클래스의 진면목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지만.
성녀인 그녀는 다르지 않은가.
굳이 다른 직업의 소유자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저는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요. 그래서 찾아왔어요.”
한데, 뒤이어지는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저의 동료가 되어, 세상을 구하자는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
활짝.
자애로운 미소를 내짓는 루치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녀의 귀감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윽. 엑! 웩!”
갑작스레 뒤편에서 터져 나오는 괴상한 소리가 정호의 귓가를 꿰뚫었다.
“아, 미안. 미안. 주인. 하도 토나오는 소리를 해대서. 윽! 엑!”
참을 수 없다는 듯, 씹고 있던 껌마저 뱉어버리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잔다르크.
“주인. 정말 미안한데, 저 녀석한테 한 마디만 할게.”
구국의 성녀, 잔다르크.
전직 성녀가 현직 성녀에게 입을 열었다.
“성녀라고 하니까 뭐라도 된 줄 알아? 가식 떨지 마.”
분명한 건, 조언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