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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뽑기로 살아남는 법-96화 (97/144)

< # 96화 >

# 96화

후우우웅- 퍼엉.

거대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의 신형이 동공의 벽에 처박힌다.

투두두두둑-.

그리 높지 않은 동굴의 천장에서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 모습에 멈출 법도 했건만.

후우우우웅- 퍼어엉.

그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내던지며 패대기를 쳐낸다.

‘이, 이게 무슨...!’

그 행태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드래곤.

레드 드래곤, 이그나투스는 자신의 용생에서 이토록 당황한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이 기괴한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인간 따위가...!’

조그마한 인간일 뿐이다.

제아무리 아스텔의 힘을 받아, 성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봐야 먹이 사슬 최하위에 해당하는 인간이다.

한데.

“역시 아깝지만 자르는 게 나은가...”

자신의 꼬리를 붙잡고 고민을 하는 저 모습은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보기가 어려웠다.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잖아!’

이그나투스는 인간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스텔의 힘에 의해, 성장하고 있는 인간들 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녀석에게 힘을 나누어주고, 녀석을 도와준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그나투스는 드래곤이다.

그 중에서도 광오하기로는 검은 용에 버금간다는 레드 드래곤.

당연히 인간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신에 의해 빚어진, 오랜 세월을 사는 생물.

무료하기 그지없던 나날에 자그마한 활기가 찾아오는 이런 유희를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조건을 만족시킨 인간이라면, 대화를 하는 것 정도야 해줄 용의가 있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한 대여섯 번 죽고서도, 전혀 무릎을 꿇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인간에게 호감을 느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가능성이라도 있는 법이다.

‘순서라는 게 있잖아. 순서라는 게!’

한데.

그 조건을 만족시키고서 찾아온 인간은 완전히 다른 형세를 취했다.

아예 처음부터 자신과의 전투를 생각하고 왔다는 듯이.

후우우웅- 퍼엉!

자신의 육중한 몸을 패대기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런 망할...!’

저 인간 녀석의 힘은 분명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

하지만 그것을 반신이라 불리는,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스텔...!’

아스텔은 조건을 만족시킨 인간을 위해, 자신에게 약체화를 내걸었다.

그것은 단 한 순간에 인간이 죽지 않도록 하는 자그마한 배려일 뿐일 터.

하나, 이 형세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 망할 년이 사기를 쳤구나!’

그렇다면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고작해야 인간 따위에게 져버릴 정도로 자신의 힘이 약해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흐름이었다.

스르르르릉-.

어느새 검을 빼어들고서, 꼬리에 가져다 대려고 하고 있는 인간.

그것을 바라본 이그나투스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

-네 년이 자초한 일이다!

듣고 있을 지도 모르는 아스텔을 향해 일갈을 내지르는 이그나투스의 눈빛이 돌변했다.

단순한 유희에서.

완전한 전투태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듯.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이그나투스의 몸을 완전히 휘감았다.

후우우우웅-!

거대하기 짝이 없던 드래곤의 형체가 점차 줄어든다.

이윽고, 불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그나투스는 드래곤의 모습 때와는 사뭇 달랐다.

또각, 또각.

“인간, 네 녀석의 그 오만함을 뜯어고쳐주지.”

그런 말을 내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아니 그녀는 인간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드래곤이 어째서 반신이라 불리며, 지상 최강의 생물체로 꼽히는가.

그것은 강인한 육체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저 육중한 몸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악몽에 가까운 파괴력.

어지간한 공격은 흠집조차 나지 않는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공방일체(攻防一體)의, 무적에 가까운 육체.

그런 드래곤이 인간의 형태를 택했다.

정호는 녀석을 바라보며 흥미로운 미소를 내지었다.

‘멍청한 도마뱀인 줄 알았더니.’

약화된 육체로는 더 이상 드래곤의 형태를 고집할 이유가 없음을 인지한 것이 분명했다.

드래곤은 강력한 육체 이외에도, 마법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터이니까.

“영광으로 알아라. 나의 이 형태를 본 것은 네가 이 천년만이니까.”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을 터인데.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입을 여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이라고는 하나, 전혀 인간답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고 하더니, 드래곤은 숨기는 모양이야.”

“...정말이지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되돌려주고 싶은데.”

하지만 정호는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저 모습을 택했다는 건, 약화된 것은 대부분 육체에 한해 있다는 말일 거고.’

마법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적용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조금 전처럼, 마구잡이로 집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닐 터다.

하지만.

정호는 오히려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빙글빙글 돌리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정호는 저 드래곤의 인간 형태를 완전히 처음보는 것이 아니었다.

‘상위 던전인 드래곤 레어, 보스전 제 1페이즈 정도로 보면 되려나.’

톨비아에서 정호는 이미 검은 용의 둥지까지 도달한 최상위권의 랭커다.

그 아래의 던전이라면 몇 번이고 공략한 기억과 경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부분의 드래곤은 오만하여, 유저들과 처음 전투를 벌일 때 저 인간의 형태를 고집했으니까.

‘상당한 마법을 쏘아보낼 수 있지만.’

그 반동이라고 할까.

녀석들은 인간의 형태에서는 형편없는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다.

톨비아에서 드래곤을 공략할 때에는 오히려 이 인간의 형태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최대한 체력을 깎을 수 있는 구간.’

보스전의 제 2 페이즈로 넘어가기 전.

그러니까, ‘드래곤의 형태’가 되기 전에 얼마나 더 많은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가.

그것이 곧 대 드래곤 전의 핵심 공략법이었으니까.

드래곤과 관련된 던전에서 조금 더 강한 공격대원을 찾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아스텔의 드래곤은 모르겠지만.’

처억-.

검을 손에 쥐고서, 녀석의 반응을 살피는 정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 톨비아와 그리 다를 바가 없다면 녀석은 하나의 준비를 할 것이 분명했다.

“나의 용언주는 ‘이그나투스’...”

아니나 다를까.

드래곤, 이그나투스가 자신의 이름을 대자마자.

쉐에에에에엑-!

‘지금!’

정호의 신형이 길게 늘어지며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우우우웅-!

“이, 이런 망할 인간이!”

자신만만하던 ‘이그나투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탈.

용언주를 이어나가지도 못한 채.

‘이탈’의 마법을 사용하여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그나투스.

콰르르릉-!

휘둘러진 클레이모어는 천둥을 일으키며, 애꿎은 허공을 때렸다.

‘용언 마법은 역시 상당히 까다롭네.’

정호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그나투스에게 아주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허억, 허억. 어떻게 인간이...!”

용언주가 끝나지 않은 채, 바로 직전에 용언 마법을 사용한 탓일까.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를 건 없는 모양이군.’

드래곤의 마법이란, 용언으로 이루어진다.

기나긴 캐스팅 따위는 필요하지 않는 상당히 사기적인 스킬.

하나, 그러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저 용언주다.

자신의 이름 아래에서, 용언을 펼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그것은 톨비아 뿐 아니라 아스텔의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용언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냐.”

이그나투스 또한 정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곧장 의문을 내비쳤다.

“드래곤은 상대해본 전적이 있어서.”

“그,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안 믿고는 너의 자유고.”

처억-.

그에 정호가 클레이모어를 어깨에 걸치며, 미소를 내지었다.

그 형태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기에 이그나투스는 당연하게도 그 검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

이윽고 터져 나오는 놀라움.

그 원인은 인간이 대수롭지 않게 들고 있는 저 검에서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졌던 탓이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분명... 그린 드래곤인가?’

그 사실을 깨달은 이그나투스의 충격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그런 녀석이 용기사가 되고자 했단 말인가?”

드래곤 슬레이어.

한 마리 이상의 드래곤을 쓰러뜨린 이에게만 주어지는 하나의 칭호.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녀석들이 영웅을 칭송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름에 불과했으나.

적어도,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에게 있어서는 의미가 전혀 달랐다.

“정말이지... 나를 얼마나 능멸하려고 드려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그도 그럴 게.

이그나투스는 그저 그런 드래곤에 해당하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애당초 용언주를 모두 펼쳐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드래곤이 평범할 리가 없다.

“로드인 나에게 그 물건을 꺼내었다는 건,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것이겠어.”

“로드?”

오히려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정호였다.

‘드래곤 로드라고?’

드래곤 로드라 하면, 모든 드래곤의 수장이 아닌가.

‘정말 로드라면.’

솔직히 말하자면.

정호는 이그나투스를 상대하며, 10만이라는 코인이 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부과된 코인의 양에 따라 약체화를 시키는 것이라 한다면.

이 정도의 상대라면 굳이 10만이 아니라, 5만, 3만 정도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싶었으니까.

‘10만은 정말 최소 조건이었군.’

하지만 로드라면 그 말이 전혀 달랐다.

정호는 이그나투스가 드래곤 로드라는 것을 전혀 모를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인간. 너를 그대로 둘 수는 없게 되었어.”

-생명 보호 파괴.

곧장 이어지는 용언.

그것은 공격을 위한 일은 아닌 모양인지, 어떤 변화도 없었으나.

“...”

정호는 저 용언이 의미하는 바를 예상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실패해도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이어지는 이그나투스의 설명으로 확신했다.

‘시련의 형태를 바꾸었군.’

아스텔에게서 받은 두 번의 시련.

그곳에서 가장 큰 이점으로 다가왔던, ‘죽지 않는다’라는 회피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업화.

화륵, 화륵.

어느새 용언을 이용하여, 두 손에 새파란 화염을 뿜어내는 이그나투스.

그녀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처어어억-!

그에 정호 또한 더할 나위 없는 진지한 얼굴로 검을 고쳐 잡았다.

단 한 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 않은가.

“두려운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그런 정호의 변화를 알아챈 이그나투스가 비아냥을 해댄다.

다만.

씨익-.

그 직후 정호의 입가에서 번지는 미소는 이그나투스의 고개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어지는 정호의 말.

“그 생명 보호 장치는, 너도 포함되는 건가?”

“하?”

그에 이그나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인간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듯한 말이 아닌가.

“너무 오만한 녀석이로군. 몇 번 공격이 닿았다고, 설마 드래곤 로드인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애당초 이곳의 생명 유지 장치는 혹여 영웅이 될지도 모르는 이를 잃지 않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드래곤 로드인 이그나투스의 패배 따위는 단 한 줌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조심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는 이그나투스에게 경고했다.

“드래곤 하트는 물론 좋은 소재지만...”

“어?”

후우우우웅-!

이그나투스는 의문을 흘렸다.

분명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정호의 신형이 단 한순간에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 코앞에서 정호의 눈과 마주한 이그나투스는 섬뜩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곳에 10만 코인이나 내고 왔어.”

번들거리는 두 눈.

그것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생물의 것보다도 광기가 서려 있었으니까.

“네가 자초한 거니까. 알아서 몸을 사리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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