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화 >
# 89화
‘이것 참...’
정호는 손에 쥔 단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내짓고 있었다.
‘녀석이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네.’
바로 조금 전, 단약을 제물로 바치며 자신의 부하가 된 ‘새뮤얼 벨라미’ 덕분이었다.
스스로를 해적왕이라며, 몇 번이고 맞부딪쳐올 것만 같았던 것과는 달리.
벨라미는 스스로 무너져, 혹시나 정호의 신상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을 내다버린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만약 벨라미를 적당히 구슬리려 했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호는 도감 때문에라도 녀석을 반드시 수하로 들여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일부러라도 표현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녀석을 몰아 붙였다.
피도 눈물도 없이.
되살아나면, 죽일 뿐.
그 반복이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깊은 악몽이었을까.
‘뭐,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지.’
정호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하나의 교훈은 얻을 수 있었다.
‘팰 때는 제대로 패야 하겠어.’
니네체르처럼 영문을 모른 채, 보스 몬스터로 지정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벨라미처럼 자신의 목적을 가진 채, 보스 몬스터로 군림하는 녀석이 있다.
전자라면 정호의 권유에 쉬이 넘어올 것이 분명했으나···, 후자라면.
상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두는 점이 중요하다는 교훈이 있지 않은가.
[새뮤얼 벨라미☆☆☆☆]
-힘 : 47 체력 : 62 민첩 : 92 지능 : 70
그 덕분에 사 성 등급의 화신이 제 발로 기어들어오지 않았는가.
‘확실히... 순수 능력치는 검은 수염과 큰 차이는 없네.’
벨라미의 능력치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적치고는 체력과 힘이 낮다는 점이 걸리기는 했으나.
민첩이 그만큼 높은 수치에 달해 있었기에, 나쁜 편의 능력치는 아니었다.
다만, 녀석의 스킬을 하나 바라본 정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수옥(水玉)]
-주변의 물을 응축시켜, 적을 향해 쏘아낸다.
‘이 녀석도 가지고 있었네.’
검은 수염과 동기 출신이라더니, 준 필사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바다에서라면 상당히 껄끄럽겠어.’
실제로 녀석은 이 수옥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격퇴한 이후에는 꺼내지도 못한 채, 쓰러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녀석의 대략적인 능력치를 확인한 정호는 단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게... 문젠데.’
벨라미조차도 알지 못하는 사내가 전해주었다는 물건.
그저 먹기만 한다면, 정호를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했던 물건이지 않은가.
그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완전한 초월의 영약 ★★★★]
-사 성 등급의 화신 한 체를 일시적으로 오 성 등급으로 상승시킨다.
-불완전한 연금술의 비약이 사용되어, 부작용이 있다.
‘...뭐?’
그 내용을 확인한 정호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강제 초월...?’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각성조차 이루어내지도 않은 화신을 강제적으로 초월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설명은 정호의 머리를 후려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초월은 이번 패치에서 처음 등장한 녀석일 텐데.’
그도 그럴 게.
톨비아에서도 ‘초월’은 ‘Ver 13.00’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한데,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내주었다는 물건이 초월과 관련된 물건이지 않은가.
‘...유저는 확실히 아니군.’
애당초 보스 몬스터를 단독으로 만났다는 점 자체가 유저임을 벗어난 일이나 다름없었으나.
초월과 관련된 물품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시 되었다.
‘이런 물건을 가질 수 있는 건, 그 위 밖에 없지.’
다름 아닌, 자신을 죽이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고 싶어 하는 녀석이 톨비아와 깊이 관여된 녀석이라는 점이다.
“너도 내가 죽길 원하나?”
괜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내거는 정호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약의 형태라면 익숙한데.’
그 형태는 ‘능력치 증가 영약’과 흡사하기도 했기에, 아스텔에 대한 의심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 됐어.”
정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영약을 가슴팍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먼저 반응이 오는 녀석이겠지.’
어떤 놈이 자신을 죽음으로 만들게 하려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벨라미는 이 영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호에게 가져다 바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전해 준 녀석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 분명한 일이다.
분명 그에 대한 반응이 올 터.
‘어찌 되었던, 비장의 수가 있다는 건 좋으니까.’
일시적.
게다가 부작용이라는 리스크를 동반하는 영약.
그렇기에 쉬이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나.
만약의 사태라는 것은 언제나 불현 듯이 찾아오기 마련.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라면, 어떤 부작용이라도 사용해야 하는 법이다.
“그럼...”
정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 몬스터인 ‘벨라미’가 수하로 들어온 이상, 침공의 조건일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잊을 뻔 했군.’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는 던전의 내부.
그 속을 빠르게 빠져나가며, 정호는 화신 도감을 열었다.
보스 몬스터 도감에 벨라미가 추가되면서 나타난 효과를 확인했어야 했으니까.
“...하!”
다만 그 내용을 확인한 정호는 허탈한 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화신 도감]
-보스 몬스터 :
그들은 화신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타락했으나, 당신에게 귀속되기를 원합니다.
-니네체르 ☆☆☆ (보유중) / 소환 개체수 1 증가
-새뮤얼 벨라미 ☆☆☆☆ (보유중) / 보유한 ‘해적’ 화신을 일시적으로 모두 소환하는 ‘파이렛 어셈블’ 스킬 습득.
‘아주 해적으로 맞추라는 의미였군.’
지난 뽑기에서 주구장창 해적이 나온 까닭이 도감에 존재했으니까.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우연의 일치였다.
* * *
정호는 지난 시간 ‘벨라미’를 쉬이 수하로 들이지 않은 것을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영약이라는, 의외의 수확이 생겼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모두 죽여라! 돌격!”
““와아아아아아!””
더 이상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꼭두각시 일 뿐인 해적왕은 상당히 과격한 자로 변모했던 탓이다.
퍼엉-! 퍼엉-!
“으으아아아!”
수천의 해적들은 정말이지 전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개죽음이나 다름없는 돌격을 선보이고 있었으나.
“돌격! 돌격! 대포알 장전!”
아군의 피해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내달리는 그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에 속했다.
“...차라리 저렇게 덤벼보는 건 어땠지?”
“아유, 그래봐야 못 이기는 걸 아는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정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화신, 벨라미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딴 게 해적왕?’
도대체 그 강한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녀석은 완전히 변모해 있었다.
“돌격! 아군의 피해는 상관없다!”
오히려 이성이 없는 저 쪽이 해적왕처럼 보일 지경이다.
“...거, 주인장. 나가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유?”
“조용히 해라. 수염. 주인의 위대함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주인님에게 주인장이 뭐냐. 똑바로 존대해라.”
아주 충실한 종이 되어버린 벨라미.
“주인님의 수하가 되고 나니 더 강해진 기분이 듭니다.”
아마도 어느 정도의 화신 도감을 완성시킨 까닭에 치솟아 오른 능력치 때문일 터다.
‘아첨이군.’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보스 몬스터로 분류된 화신은 분명 시스템 상의 보정이 들어가 있는 게 확실했다.
니네체르도 그렇고, 벨라미도 그렇고.
보스 몬스터일 때에는 그 등급과는 어울리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쉐에에엑-!
쿠르르릉-!
정호가 검을 휘둘러 적을 처리하자.
“역시 주인님입니다!”
곧장 벨라미의 아부가 들어오는 점을 보면, 확실했다.
‘뭐,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
정호는 쉴 새 없이 아첨을 해대는 벨라미의 태도를 이해했다.
녀석은 당장의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정호의 편에 붙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또 다른 적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영약을 건네준 사내가 언제고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것이 뒤늦게 찾아왔으리라.
“하아, 하아...! 주, 주인님! 제가 적장의 목을 쳐도 되겠습니까?”
“...어, 어어. 그래.”
다만 그 아첨이 조금 과한 느낌은 있었지만 말이다.
“죽여라!”
“그래 죽여주마!”
서걱-!
‘이거... 녀석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제아무리 자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보스다.
한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는 그 모습은 정호조차도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운데.’
실로 걱정마저 들 정도의 모습이나 다름없었으나.
“어, 얼른 오시죠! 주인님! 녀석들의 전리품이 어디있는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음. 좋군.”
그에 대한 판단은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한 정호였다.
* * *
아스텔의 랭커들은 크라켄의 역습 던전을 착착 공략해나가고 있었다.
‘두 번째.’
한국에서 가장 빠른 클리어 속도를 보여주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랭킹 3위의 레이나, 김세정이었다.
‘아직 모자라.’
그녀는 한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할 수 있었다.
과금망겜플레이어를 향한 오발.
다가오는 침공 속에서.
가장 힘이 되어 줄 유저 하나를 죽여 버렸다는 죄악감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기, 길드장님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다들 지쳤습니다.”
레이나는 그에 속죄라도 하듯이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알겠어요.”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의 강행군을 모두가 따라올 수는 없는 노릇.
휴식도 필요한 일이었다.
“...저, 길드장님 이런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너무 괴념치 마십시오.”
“마, 맞습니다. 요즘 들리는 소문에는 그 사람 아직 살아 있답니다.”
“던전을 열 개가 넘게 클리어 할 유저는 그 사람 밖에 없지 않습니까?”
길드원들은 그런 레이나를 걱정하여 말을 내걸었으나.
‘그럴 리가 없어.’
레이나는 그 누구보다도 과금망겜플레이어가 살아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직격했으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레이나는 그가 상급 마법을 맞는 것은 물론이고, 그 배가 침몰하는 것까지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것을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이라는 이야기로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사람 몫까지...해야 해.’
한국의 침공의 거의 절반은 과금망겜플레이어가 담당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공략하는 던전의 수도 그렇고.
직접적인 침공에서도 홀로 수십 명의 랭커 분을 해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레벨 업 한다면.’
그것을 대신하려는 레이나다.
지금 무리를 해서라도, 침공 전까지는 레벨을 올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그런 레이나의 결의는.
-‘크라켄의 역습’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거하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어? 어어? 이번에는 알림도 없어?”
“무, 무슨 일이야.”
곧장 길드원들의 혼란이 찾아왔다.
침공이 어째서 침공인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에 침공이고, 종말인 법이다.
까득-.
레이나는 이를 깨물었다.
‘하필이면... 조금이면 되는데!’
그렇게 원망을 해보지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당장 항구로 돌아갑니다! 랭커들을 소집하세요!”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레이나는 곧장 배를 돌렸다.
‘아직 바다에 나가 있는 랭커들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급박한 상황 속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레이나.
하지만 그런 레이나의 머리를 후려갈기는 사건이 하나 존재했다.
“...어?”
부우우우우웅-.
경적을 울려대는 하나의 선박.
그것이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세차게 쇄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펄럭펄럭-.
거대한 브리깃선 위로 세차게 휘날리는 해적기.
“마, 말도 안 돼.”
레이나, 세정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게.
분명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이가.
“어째서... 그 쪽에서.”
침공해오는 포탈의 방향에서 내달려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