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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뽑기로 살아남는 법-88화 (89/144)

< # 88화 >

# 88화

땅- 땅-.

끌과 망치가 맞부딪치며 내는 경쾌한 소리.

속속들이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신상을 바라보는 정호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슬슬 떠야 하는데.’

정호가 어째서 아틸라의 신상까지 만들어가며, 미신에 집착하는가.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어.’

그것은 신상 제작에 투자되는 공헌도에 대한 소모가 상당했다는 점을 아까워하는 일은 아니었다.

‘침공.’

크라켄의 역습 던전이 침공을 개시하여, 뛰쳐나올 때.

더 이상 신상 제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난번에는, 기한까지 두었으면서 말을 바꿨었지.’

본래는 한 달이라는, 꽤나 긴 텀을 주고 시작한 그림자 지하 성채의 침공.

하지만 그것은 고작 일주일 만에 완전히 말을 바꾸어, 포탈 속에서 뛰쳐나왔다.

‘조건이 있을 거야.’

정호는 그것이 단순한 돌발 상황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스텔은 그 조건을 유저들의 수준에 맞춰서 한 달이라는 기한이라 한 것일 거고.’

그 증거로 이번 크라켄의 역습에는 그 기한을 정하지 않았다.

만약에라도 그런 방식이라면.

침공을 이끌어 내고 있는 대상은 아스텔의 시스템을 부여받지 못한, 어디까지나 이레귤러인 자신으로 인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예상가는 조건이라면 몇 가지가 있다.

‘보스가 내 부하가 되거나.’

톨비아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들.

자신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보스가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나.

‘일정 이상의 포탈이 공략 완료되었을 때.’

톨비아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특성상.

앞서나가고 있는 정호가 던전을 마구잡이로 공략함으로 생겨나는 일처럼 말이다.

전자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정호는 일부러라도 부하가 되겠다는 벨라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편한 던전 공략이라는, 꽤나 불순한 목적이 들어가 있기는 했으나···.

결과론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길이 된다.

다만, 후자라면 큰 문제다.

침공으로 인한 종말을 막아서기 위해서 내달리는 일이 오히려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그것은 정호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어차피 그 조건이라면 정호가 아니더라도 이루어지는 일에 불과했으니까.

‘신상을 몇 번이고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야.’

하지만 언제고 ‘침공’이 찾아오리란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뽑기랑은 다르니까.’

코인만 있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뽑기와 달리.

신상 제작.

그것도 ‘크라켄의 역습’ 던전 내에서의 신상은 지금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나 다름없다.

제한 시간이 걸려 있는 뽑기.

‘여기서 뽑아야 해.’

이 자리에서 정호가 굿을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는 말이다.

따앙, 따앙.

정호가 고민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신상 제작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벌써 그 끝을 내달리고 있었다.

‘실패...인가?’

신상의 외형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높은 능력치를 지니고 있는 신상이 그 형태가 엉성할 리가 없다.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정호가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여신을 본 떠 만든 것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신상, 그 자체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다만.

“...”

고개를 돌려 슬쩍 아틸라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우걱, 우걱.

정호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저인족들이 가져온 물고기를 생으로 넘겨 삼키고 있는 아틸라의 모습이 보였다.

‘안 닮았군.’

최후의 훈 족이자, 그 전성기를 누린 야만의 왕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참으로 먼 모습이 아닌가.

“끝났습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뽈뽈 대며 다가오는 리앙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호는 다짐했다.

‘차라리 이 모습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

요청 사항을 조금 더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에는...”

요청 사항을 입에 담으려 하는 그 때.

[누군가가 던전, 크라켄의 역습에서 걸작! ‘행운의 여신상’을 제작하였습니다]

“...어?”

갑작스레 등장한 메시지에 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은 톨비아를 플레이하던 시절에도 단 한 번 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일.

“이, 이게 전광판이 뜬다고?”

전광판이 떴다.

* * *

흔히들 과금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게임은 철저하게 유저들의 지갑을 노리기 위해.

유저들의 과금 욕구를 조금이라도 더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을 준비해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전광판’ 시스템이다.

극악하기 짝이 없는 확률에 유저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과금을 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서버 전체에 울려 퍼지는 저 전광판이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뜨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저 주인공이 자신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착각.

결국 그 함정에 걸린 이들은 하나 같이 멸망을 향해 내달리기 마련이다.

‘...많이 속았지.’

그것은 정호도 다를 바는 없었다.

톨비아를 플레이할 시절, 정호는 이 전광판에 쉬이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애당초.

당시,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첫 과금에 포세이돈을 뽑으며 전광판을 올렸으니까.

‘최소 육 성 등급이라는 건데.’

꿀꺽.

정호는 침을 삼키며, 숨을 멈추었다.

화신 뽑기나, 장비 뽑기로 인한 전광판은 톨비아 내에서 자주 나타나는 편이었다.

제아무리 유저수가 적다고 한들.

고래라 불리는, 한 명의 과금러만 있다면 그것을 띄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상 제작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노가다 컨텐츠.

제아무리 많은 과금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되는 일이 아니다.

‘서버에도 몇 명 없었으니까...’

신상의 전광판은 그만큼이나 보기 드문 장면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은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화신 뽑기에서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정호의 뽑기 운은 분명 상당한 편에 속했으나.

이상한 곳에서만 운이 펑펑 터지고 있으니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전광판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보았을 때.

“...”

정호는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게.

[행운의 여신상]

-걸작!

-이름 모를 여신을 본 떠 만든 여신상. 어째서인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 찾아올 것만 같다.

-걸작 보너스 : 하루 한 번, 이 여신상을 바라 본 이 모두에게 모든 능력치 10증가의 효과를 준다.

-효과 :

모든 능력치 5% 증가.

모든 스킬 쿨타임 5% 감소.

3성 등급 이상의 화신 뽑기 확률 증가.

“...이게 저 등급 던전의 신상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수치의 향연이다.

걸작 보너스야, 10이라면 정호에게는 미미한 수준.

거기에 고작 5%에 불과한 능력치와 쿨타임 감소 효과였으나.

그것들은 애초에 이 크라켄의 역습에서 얻을 수 있는 신상의 최고 능력치이지 않은가.

‘모든...화신... 뽑기 확률 증가.’

그 중에서도 정호가 주목한 것은 가장 아랫단에 존재하는 ‘행운의 여신상’ 다운 효과였다.

본래 정호가 이 크라켄의 역습에서 얻으려 했던 뽑기 확률에 대한 옵션은 그저, ‘물 속성 화신 뽑기 확률 증가.’

속성이 붙은 화신들이 대다수 삼 성 이상의, 고등급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었으나.

아예 그보다 훨씬 상위 호환의 물건이 나오지 않았는가.

‘신상에 이런 효과가 있었다고?’

아니, 톨비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정호조차도.

그런 효과가 신상에 붙어 있다는 것 자체를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을 정도의 효과였다.

“...”

정호의 고개가 절로 아틸라의 방향으로 향했다.

“므슨 이린데 긍래?”

아직도 게걸스럽게 입 안에 한껏 날생선들을 물고 있는 야만인의 모습.

‘음...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것이 여신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 * *

“이제... 그만두어주면 안 되나. 너에게 우리 해적단의 수입을 바치겠어.”

“미안하군. 아직은 안 돼.”

“...그렇군.”

콰득-.

숨이 끊어지는 것이 도대체 몇 번 째일까.

새까맣게 변하는 시야를 뒤로 했으나.

다시금 찾아오는 빛은 악몽이나 다름없다.

“미치겠군...”

벨라미는 침음성을 삼켰다.

도대체 이토록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반항을 했던 것은 초반의 몇 번일 뿐이다.

그 이후로는 도망치기도 해보았으나, 던전 내의 바다가 그렇게 넓을 리가 없다.

녀석의 편으로 돌아선 저인족들이 속속들이 자신의 위치를 까발리고 있으니 도망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 불과했다.

마치 어장 안에 양식되어지는 물고기 꼴이나 다름없다.

‘해적의 왕? 형편없군.’

벨라미는 자신의 무력감을 통감했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길 수 없는 벽.

그것에 완전히 포기하고야 말았다.

‘조금만이라도 힘이 있었다면.’

녀석의 목숨은 하나.

자신은 아직까지도 많은 수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정호에게 치명상을 먹인다면, 자신의 승리나 다름없는 길이 아닌가.

“아니, 그래도 안 되겠군.”

다만 그런 치명상을 입힐 방도가 없다.

열 번이 넘는 죽음은 벨라미의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어두었다.

끼익-.

“하하, 해적왕이 꼴이 말이 아니군요.”

한데, 그런 벨라미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들어오라는 소리는 안 했을 텐데.”

방으로 들어온 이는 처음보는 얼굴.

부하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는 있지 못하기에, 곧장 인상을 쓰고서 타박을 준 벨라미였으나.

끼이이익- 터억-.

무슨 일인지, 의문의 사내는 의자를 하나 가져오더니 자신의 책상 위로 다리를 걸치는 것이 아닌가.

‘아니군.’

그것은 부하가 결코 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애당초 그렇게 되기로 ‘결정’ 되어진 일이었으니까.

“누가 보냈지?”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 곧장 물음을 내던졌으나.

“벨라미. 매우 힘들어 보이는 군요.”

돌아오는 대답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벨라미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값싼 동정은 사양하지.”

“아니요. 아니요.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의문의 사내는 갑작스레 손을 내미는가 싶더니, 활짝 펼쳤다.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단약이 존재했다.

“이건 뭐지?”

“지금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물건이지요.”

“내가 정체도 모르는 녀석의 물건을 받을 것 같나?”

“네.”

“...하?”

실로 어이없는 대답에 벨라미가 잠시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렸다.

“당신은 지금 불쌍한 사람입니다. 굴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받아들이지도 않지요. 아니, 생각해보면 고작 그 정도의 힘을 지닌 사내는 필요 없다는 뜻일까요. 하하.”

그런데.

그리 말을 덧붙인 사내는 단약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을 타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겠죠. 생각만 하고 있어도 좋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이걸 먹게 되어 있을 테니까. 곧 있으면 저승사자가 찾아오거든요. 하하.”

저승사자란,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이정호라는 사내를 말하는 것일 터다.

끼이이익-.

나타났던 것처럼 순식간에 떠나가는 사내.

벨라미는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단약을 손에 쥐었다.

“...이거면 된다는 거지.”

이것을 먹기만 한다면, 손을 쓸 수도 없었던 이정호에게 일격을 날릴 수 있다.

처얼썩-. 처얼썩-.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배에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

우당탕!

“서, 선장님! 의문의 배가 찾아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벨라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한 번 해보지.’

결연한 얼굴로.

* * *

정호는 벨라미를 몇 번이고 찾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이 도망을 다니며 자신을 피해 다닐 때 즈음엔 수하로 맞이할까도 싶었다.

찾는 것 자체는 쉬웠으나, 그보다는 빠른 공략을 하기 위해 녀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나, 그 이후부터는 편한 공략이 이어졌다.

벨라미가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다르군.”

하지만 재차 찾은 벨라미의 모습을 바라본 정호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왔나?”

녀석의 태도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지 않은가.

‘무언가 수라도 찾은 건가?’

정호는 그 태도를 경계했다.

보스 몬스터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은 어디까지나 이성을 가진 녀석.

아니, 오히려 ‘화신’에 가까운 놈이지 않은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서 저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녀석은 곧장 자신의 검지와 엄지로 하나의 단약을 정호에게 보여주었다.

“...모르겠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지. 이것만 먹으면 너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면서.”

“...”

정호는 검에 손을 가져다대며, 경계 태세를 더욱 올렸다.

도대체 저 단약이 어떤 물건인지.

누가, 무슨 이유로 건네준 것인지도 알지 못했으나.

저렇게 대놓고 알려주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딴 물건을 건네주는 녀석의 의도를 알 수가 없지만. 지난 죽음들에 절망해버린 나로써는 사용할 수밖에 없겠지.”

이어지는 말.

‘멀린과 검은 수염까지 모두 소환해야 하나?’

그에 그런 생각을 떠올릴 무렵.

벨라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정호의 상상을 아주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이것과 함께 건너가면, 나를 받아들여 줄 텐가?”

“...뭐?”

당황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쥐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

아니.

아마도 저 단약을 전해준 녀석도 당황했을 것이 분명했다.

“부탁하지. 아니, 부탁합니다. 주인!”

벨라미의 절망은 생각보다 더욱 큰 구렁텅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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