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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뽑기로 살아남는 법-87화 (88/144)

< # 87화 >

# 87화

모든 RPG 게임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바로 유저들이 항시 새로운 컨텐츠를 원한다는 점에 있다.

게임사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컨텐츠를 그들에게 보급해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새로운 컨텐츠와 함께, 조금 더 색다른, 어려운 던전을 내놓는다.

다만 계속해서 새로운 던전을 내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바로 지난 던전.

즉, 하위 던전들은 유저들에게서 버려진다는 점이다.

톨비아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새로운 던전이 등장할 때면, 유저들은 하위 던전에는 눈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야 컨텐츠가 소모만 될 뿐이다.

유저들은 지난 던전을 방문하지 않고.

새롭게 유입되는 유저들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게 이건데...’

뉴비라 불리는, 새로운 유저들과 고인물이라 불리는, 기존 유저들.

톨비아에서는 그 둘을 만족시킬 방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이 ‘신상’에 있었다.

‘버프 효과.’

신상이란, 그저 세워두는 것만으로도 유저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는.

이른 바 성유물과 같은 존재다.

던전에 존재하는 ‘반복 퀘스트’나, 특정한 업적을 달성하게 되면 세워지는 신상.

기존 유저들은 이 신상을 위해서 과거의 던전을 방문하고, 신규 유저들은 파티를 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이론적으로는 참으로 좋은 방향성이나 다름없다.

‘이것 때문에, 유저가 반 토막이 됐었지.’

단기적으로는 물론 좋았다.

하지만 톨비아가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톨비아를 즐기는 대다수의 유저층이 이러한 노가다성이 짙은 컨텐츠를 꺼려한다는 점과.

새로운 던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유입되는 유저들에게 진입 장벽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는···.

‘신상의 버프 효과가 랜덤이라는 것.’

과연 톨비아!

어딜 가나, 그 빌어먹을 확률성 도박에 대한 정체성을 잃지를 않았다.

투웅-, 투웅-.

“하아...”

심해에서 신상 제작이 한창인 저인족들.

그것을 바라보는 정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푸욱 흘러 나왔다.

‘이걸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본래 크라켄의 역습에서 이 신상을 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반복 퀘스트는 공격대 기준으로 적어도 ‘10회 이상’.

그것을 단 한 번의 클리어로 얻어낸 것은 좋았지만.

‘포탈이 무한히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곳은 어디까지나 게임이 아니라, 현실.

정호가 아무리 신상의 능력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진입할 포탈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법이다.

“신상 제작, 완료되었습니다. 정호님”

리앙이 신상 제작의 완료 소식을 전했음에도 정호는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제발.’

신상의 효과를 띄우는 것이 얼마나 극악을 달리는 지 잘 알고 있는 정호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천천히 눈을 떴다.

한 눈에 보이는 것은, 늑대 코트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역동적인 자세의 사내.

분명 정호의 모습을 본 딴 것이 분명했다.

상당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그 모습은 분명 만족스러워해야만 했으나.

“이런...젠장.”

정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욕지거리였다.

그도 그럴 게.

[저인족의 심해 신상]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낸 이를 위해 저인족들이 특별 제작한 신상.

-효과 : 화신들에게 체력 5의 효과 부여.

정호가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 * *

유령선이 찍힌 사진이 공개된 이후 약 일주일.

꽤나 기묘한 소문이 흐르기 시작했다.

-과망플 사실 살아 있는 거 아님?

해골 표식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브리깃선.

그것은 분명 과금망겜플레이어의 선박이다.

다만, 그런 사진이 공개되었다고 한들.

그가 아직 살아 있다고 확신하기에는 어려웠다.

그 유령선 사진이 언제 찍힌 것인지 알 수가 없고.

심지어 과망플의 전신이 찍힌 것도 아니지 않은가.

┖랭킹 페이지에서 사라진 것 못 봤음? 죽은 게 맞다니까.

┖차라리 던전 내에 있는 해적선 하나가 나왔다고 하는게 설득력 있겠다.

더불어 아스텔 공식 홈페이지에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어버린 마당인 존재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유령선 봤다는 사람도 많고. 이번에 공략 중이던 던전이 제멋대로 클리어 됐다니까?

┖다른 랭커겠지.

┖이미 최상위권 랭커들이 공략 완료했다는 소식 못 들었음?

유령선의 목격담과 함께.

던전이 멋대로 클리어 되었다는 소식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탓이다.

┖아니, 맞는 것 같은데. 나도 던전이 클리어 됐다니까.

┖왜 클리어 됐다는 기사는 두 어개 밖에 되지 않는데, 포탈은 벌써 여덟 개나 사라졌다고 함?

최상위의 랭커들이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반드시 기사가 나왔다.

그것은 랭킹 페이지를 통해 알려진 것이지만, 랭커들 스스로도 일부러 그 내용에 대해 떠들어 댔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이루어낸 업적을 알리고, 재능 있는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여덟 개나 되는 포탈이 사라졌음에도 그 공략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은 과거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다.

-과망플 때랑 똑같잖아.

랭킹 1위의 과금망겜플레이어.

그는 자신을 극도로 내보이지 않는, 솔로 플레이어다.

그에 대한 정보는 단 한 번 이루어진 인터뷰와 랭킹 페이지로 알려졌을 뿐이다.

하나, 그 랭킹에서 사라진 마당에 사람들이 과망플의 근황에 대해서 알 길은 없었다.

┖차라리 또 다른 랭커가 출현한 거 같은데.

┖세 번째 시련 이후에 떠오른 랭커들 많으니까. 그게 더 설득력 있을 듯.

┖포탈 수에 대한 기사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수많은 추측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포탈 여덟 개가 사라진 위치랑 시간 대를 보셈.

시련으로부터 일주일.

분명 새롭게 나타난 랭커들도 많고, 최상위권으로 급부상한 유저들도 많은 마당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라 할지라도.

-최상위권 랭커들이 깨기 전. 그것도 전부 근처에 있는 것들임. 하나를 끝내고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는 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음?

이러한 미친 듯한 공략 속도를 이루어낼 수는 없었으니까.

-진짜... 맞나 본데?

┖그럼 랭킹 페이지는?

┖귀신인가 보지.

존재할 리 없는 인간이 던전 공략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기묘한 소문은 끊이질 않았다.

* * *

“나,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부하가 될 게! 아니 되게 해주세요!”

퍼억-.

정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빌고 있는 벨라미의 목을 쳤다.

‘이제 아홉.’

분명 의도한 바대로.

벨라미는 의지를 상실한 채, 쉬이 쓰러지고 있었으나.

정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다섯 번째.’

쌓이고 쌓인 공헌도는 모두 신상 제작에 들어갔다.

그것을 코인으로 치환했을 때의 가치를 떠올리면 정말이지 피눈물이 날 정도였으나.

애초에 저인족들은 지불할 수 있는 코인이 떨어진 마당이다.

정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신상 제작밖에 없었다.

신상은 화신 도감과 함께 톨비아에서 필수적인 내실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절차였다.

‘꽤 괜찮은 녀석이 뜨긴 했는데.’

다섯 번의 신상 제작.

정호는 그에 상당히 쓸 만한 신상을 얻어내기는 했다.

[저인족들의 심해 신상]

-효과 : 모든 화신의 스킬 쿨타임 5% 감소.

‘이게 왜 여기서 떠.’

분명 모든 스킬 쿨타임 감소는 높은 등급의 화신일수록 상당한 효율을 이끌어내는 효과였다.

특히나 필사 스킬은 대부분 그 쿨타임이 ‘일’ 단위로 이루어지니까.

다만, 그것을 ‘크라켄의 역습’에서 얻어서는 안 되는 녀석이었다.

‘크라켄의 역습에서 얻을 수 있는 신상에서 나오는 옵션은 그리 좋지는 않은데...’

전투 관련의 신상은 보다 상위 던전에서 뽑는 것이 원칙이었다.

심해 신상의 경우에 5%에 불과한 스킬 쿨타임 감소가 상위 던전에서는 10%, 15%까지도 붙으니까.

‘슬슬 코인을 쓰고 싶은데.’

15만 코인.

무려 9번의 클리어.

정호가 얻은 공헌도를 모두 신상에 투자한다 하더라도.

해적들과 보스를 쓰러뜨림으로써 얻어낸 코인의 수는 상당했다.

하지만 정호는 그 코인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사용할 수가 없었다는 게 정확했다.

‘뽑기 관련이 나와야 쓰지.’

보다 낮은, 저티어 던전에서 얻어내야 할 옵션.

그것은 던전의 난이도에 상관없이 동일한 옵션을 가지는 뽑기 확률에 관련된 신상이었다.

‘심해 신상이라면, 생각보다 잘 떴던 것 같기도 한데.’

정호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저, 심해 신상의 특징인 ‘물 속성 화신 등장 확률 증가’.

속성을 가지는 화신들 대부분이 이름이 있는, 영웅 이상의 화신임을 생각해본다면.

단순히 여기고 넘어갈 것이 아니었다.

‘해적 도감은 완성시키고 싶으니까.’

물 속성 화신이라면, 정호가 지니고 있는 ‘카리브 해의 해적’ 도감을 완성시킬 확률이 증가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쯧...”

혀를 차낸 정호는 곧장 검을 회수하고는, 저인족들의 도시로 향했다.

‘제발.’

이번에는 만족할 만한 신상이 떠주기를 간절히 빌면서.

* * *

저인족들의 도시에 도착한 정호.

“어서오세요! 이번에도 신상 제작이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마쳤답니다.”

리앙은 무엇이 그리도 신이 나는지, 싱글벙글 미소를 내지으며 정호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원하는 신상을 얻으시길 바랄게요!”

그 밝은 미소가 정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이 녀석. 일부러 신상 효과를 바꾸고 있는 거 아니야?’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그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정호처럼 반가운 손님이 없을 터다.

부족한 재원에 쉬이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입장의 지도자.

한데, 무슨 일인지 혼자서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이가 코인이 아니라 노동력이 들어갈 뿐인 신상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꽤 여유가 생긴 것 같은데, 코인으로 받을 수 있나?”

괜한 반발심으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전과는 달리 꽤나 화려하게 변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 아하하. 그, 그래도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탕-, 탕-.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조각용 끌과 망치를 두들겨 댄다.

“...뭐, 부탁하지.”

제대로 된 효과만 뽑고 난 이후에는 아주 철저하게 등골을 빼먹겠다고 다짐한 정호가 답을 하자.

“그럼 감사히. 10만의 공헌도를 차감하겠습니다.”

리앙은 신이 난 듯, 뽈뽈 대며 바위를 향해 달려든다.

몇 번은 노동력을 아끼겠다고 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완전히 취미의 영역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기다려.”

다만, 정호는 그런 리앙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시죠?”

정호는 지금껏, 신상 그 자체에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신상은 효과가 중요할 뿐이지, 그 외형은 중요치 않았으니까.

다만, 그 생각을 달리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틸라 강신 해제. 소환.”

“어머, 무슨 일이야? 누님의 몸이 그리워지기라도 한 가봐? 항상 한 몸이었으면서.”

아틸라는 나타나자마자, 실없는 농담을 해대기는 했으나···.

정호는 평소와는 달리,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틸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리워졌다.”

“아, 아하하. 그건 조금 부끄러운데.”

“제작하는 건, 내 신상이 아니라 아틸라로 부탁하지.”

이어지는 말.

“이게 그 잡지에서 나왔던 프로포즈인가 뭔가 하는 그거야? 아하하, 그건 좀 곤란한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에 무언가 단단히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아틸라가 놀란 토끼 눈을 뜨고서 말을 이었으나.

“...”

정호는 그것을 듣지도 못했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받았다.

지금 아틸라의 말을 받아줄 정신 따위는 없었다.

‘이것으로 조금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그도 그럴 게.

아틸라의 신상 제작을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틸라와 연관되면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았으니까.’

자그마한 징크스에서 시작한, 기우제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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