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화 >
# 76화
저인족의 창고에는 수없이 많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
보기 드문 심해의 보석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운 장신구까지 넓게 펼쳐진 그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을 이루어내는 것이었으나.
정호는 그런 물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섯 점.’
분명 저 보석과 장신구는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
만약 되판다면, 상당한 코인과의 물물교환이 가능할 수도 있을 터였으나.
정호가 약속받은 저인족의 보물은 고작해야 다섯 점밖에 되지 않는다.
‘내용은 전부 알고 있어.’
톨비아 시절 크라켄의 역습 던전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공략했다.
크라켄의 역습은 공격대 컨텐츠 임에도 불구하고.
정호는 포세이돈이라는 강력한 화신을 토대로.
솔로로 자주 찾아왔던 장소이기도 했기에, 이 물품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가장 먼저 얻어야 하는 건.’
정호는 망설임 없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장신구에서 멀어져 구석에 처박힌 수없이 많은 병장기들로 향했다.
‘역시 검이지.’
-주인, 뭔가 좀 아는데?
아틸라가 공감한다는 듯, 곧장 말을 내걸어온다.
현재 정호가 사용하고 있는 검은, 삼 성 등급의 명품 바스타드 소드.
럭키 몬스터인 홉고블린을 쓰러뜨림으로써 얻어낸 그 검은 삼 성 등급 치고는 상당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강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오 성 등급의 아틸라가 사용하기에는 그 격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녹이 슨 단검]
[녹이 슨 대검]
[녹이 슨 활]
다만, 정호가 향한 곳에 존재하는 병장기는 어째서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이름부터 불안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다.
-그런데... 주인, 그것들을 보는 게 맞는 거야?
그에 아틸라가 우려 섞인 말을 내건 탓에, 정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복권.’
이것들은 긁는 복권의 형태와 같다.
심해에 처박혀, 잔뜩 산화된 병장기.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는 녹을 벗겨 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법이니까.
실제로 수없이 그 물건들을 보상으로 타내었던 정호조차도 단 한 가지를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 확률을 높이는 일은 가능했다.
탁, 탁, 탁.
정호는 외형이 완전히 동일한 [녹이 슨 대검]을 세 개 손에 쥐었다.
‘이 중 하나는 무조건 고 등급.’
33프로의 확률로 고 등급의 무기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정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복권들을 쓸어 등에 지었다.
‘이제 백프로군.’
무려 세 개의 보상을 한 번에 몰아 쓰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나.
정호는 그 선택에 후회 따위는 없었다.
‘이 중 하나는 무조건적인 사 성 등급일테니까.’
저인족들의 보물들은 대부분이 삼 성 등급의 물건들.
그 중에서도 사 성 등급인, 고 등급이라 할 수 있는 장비는 손에 꼽을 정도다.
심지어 남은 두 개의 장비는 이처럼 복권으로 얻어내는 형태가 아니다.
“그럼, 다음.”
창고의 안 쪽으로 들어가는 정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 * *
정호가 창고로 직행한 이후, 켈린왕은 왕이 된 이후로 가장 바쁜 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제물의 날’에 살아남은 왕족이 있다면, 그 왕족을 후계로 선택하고 그 왕위를 물려준다.
스스로도 그렇게 얻어낸 왕위였기에, 재빠르게 다음의 왕으로써 ‘레클리스’를 책봉하고는 은퇴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뭐라?”
“황태자님께서 네 개의 보물을 약속하셨습니다.”
“네, 네 개??”
레클리스의 가신인 리앙으로부터 들려온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은 켈린왕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신수당 하나? 거기에 경호의 대가로 하나.’
그것 뿐만이라면 말을 하지도 않는다.
그럴 수 있다.
인간이 어째서 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왕족의 막내, 레클리스를 도와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코, 코인이 도대체 얼마라고?”
“레기오로스에 3천, 아스피도켈론에 4천, 카프리콘에 5천, 제물의 날 경호의 조건으로 1만입니다.”
“그, 그건 우리 저인족이 가진 거의 모든 코인이 아닌가?”
자신이 보장한 1만 코인을 합친다면, 무려 3만을 넘긴다.
“이, 이 놈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더니!!”
켈린왕은 분노했다.
이래서야 크라켄이 사라졌다고 한들, 앞으로 저인족의 생활은 피폐해지기 짝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약한 세력을 가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아야 한다. 이대로는 안 돼.’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켈린왕은 자신이 손에 쥔 거대한 삼지창으로 저 인간들이 있는 창고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약속한 일입니다. 이미 왕으로 책봉된 아드님, 레클리스님이 직접. 신의를 잃어버린 왕에게 미래란 없는 법입니다.”
다만, 리앙의 말에 다시 삼지창을 되돌린다.
‘왕의 약속은 절대적.’
그것이 아직,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은 다음 세대의 왕이라 할지라도.
전대의 왕이 그 약속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코인도 보물도 잃어버린 왕에게 시민들이 따라올 리가 만무했다.
“리앙이라고 했는가?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다음 왕이 될 아들 녀석은 분명, 역대 최악의 왕으로 역사에 남기고 말 것이네. 나 또한 그럴 테지만, 아들 녀석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분노로 차올랐던 마음.
이제는 레클리스에 대한 걱정으로 바뀌었다.
“황태자님, 아니 레클리스왕은 잘 해내리라고 봅니다. 어찌되었던 간에, 레클리스왕은 켈린왕 님께서 이름조차 모르는 왕족의 막내에서 왕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에 얼마나 많은 재화를 투자했던 간에 말입니다.”
켈린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앙의 말은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너의 말에 따르면... 녀석, 아니 레클리스왕은 이 모든 상황을 인지한 채 계획했다는 게 되는군.”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 보아도, 켈린왕님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음...”
확실히...
켈린왕은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에서,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투자한 그 배포는 놀라울 정도였건만.
‘그것이 왕이 보장할 수 있는 보물조차도 내걸었다는 거지.’
그렇다면.
녀석은 고작해야 ‘왕’이 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레클리스왕은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 따위 재화나 보물 따위는 인간들에게 주어도 상관이 없을 만큼 말입니다.”
“자네와 같은 인재가 어째서 레클리스에게 붙어 있는지 잘 알 것 같군.”
“알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타박, 타박.
어느새 물건들을 모두 고른 것인지, 정호의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들려진 물건들을 바라본 켈린왕은 솔직히 놀랐다.
‘낡은 검들은 어째서 골랐는지 모르겠지만.’
총 다섯 개의 보물들 중 세 개는 의미도 모를 낡은 검이 차지하기는 했으나.
나머지 두 개는 분명, 창고 내에서도 가장 값진 물건이었다.
인간들이 가져간다면, 저인족들의 힘이 크게 감소할 정도로 강력한 무구.
하지만 켈린왕은 더 이상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레클리스는 무언가 큰 뜻을 품고 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기대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코인은 어떻게 되었지?”
“물론 준비했네. 가져가게. 총 32,000코인이네.”
자신이 왕으로써 모은 거의 모든 재산을 내놓으면서도 켈린왕은 그 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만.
“...무슨 소리야?”
인간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5만 2천 코인 일텐데? 리앙, 제대로 설명한 것이 맞나?”
“리앙?”
켈린왕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따지듯이 리앙을 불렀으나.
리앙은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클리스왕은 하나의 보상을 더 약속했습니다.”
“그, 그런데 무슨 2만 코인이나 들어가는 가?”
“크라켄의 말살로 레클리스왕이 보장한 약속입니다.”
“뭐, 뭣이?”
그러면서도, 리앙은 켈린왕에게 다가와 고개를 한 차례 숙이더니 속삭였다.
“이것도 모두 레클리스왕이 계획한 일에 불과합니다. 받아들이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 그런 것이냐?”
“그런 겁니다.”
그러면서도, 켈린왕의 삼지창에 손을 내뻗는다.
삼지창의 중심에 꽂혀 있는 하나의 진주.
그것을 꺼내는 리앙의 손놀림은 그야말로 숙련된 소매치기와 다를 바가 없어, 얼토당토 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이냐? 아, 안 된다. 그건...!”
“예. 알고 있습니다. 저인족들의 왕을 상징하는 진주. 바다의 비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지요.”
“한데...어째서?”
“코인과 함께 약속한 물건입니다.”
켈린왕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정말 이게 레클리스. 정녕 네가 바라보고 있는 미래란 말이냐?’
최초의 진주, 바다의 비보는 권위의 상징.
다만, 그 상징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소유자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아티팩트.
절대 왕권 체재를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우우우웅-!
실제로 진주를 빼앗기자마자, 켈린왕의 몸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0m를 넘기는 거대한 형체는 바로 저 ‘최초의 진주’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태생부터 거대했던 켈린왕이었던 탓일까.
그 크기는 줄어든 이후에도 4m 정도는 되었다.
“허, 허허... 허허.”
다만 그 상실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허탈한 웃음만을 흘리는 켈린왕.
그와는 관계없이 정호와 리앙의 대화가 지속되었다.
“리앙, 남은 코인은 어떻게 되었지?”
“여기 있습니다.”
“저 녀석은 모르는 눈치인데, 어떻게 구했지?”
“이번 년도 세금입니다.”
“꽤 하는군.”
“감사합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지으며 떠나가는 악마를 켈린왕은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켈린왕,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것입니다.”
“레클리스...아니, 리앙.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냐?”
켈린왕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런 계획을 세울 녀석은 레클리스가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리앙이라는 녀석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더 이상 옛 것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왕도, 사회도.”
결연한 표정의 리앙의 얼굴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 * *
촤아아아악-, 촤아아악-.
포탈의 밖으로 나온 정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갸하하하! 이 만한 약탈은 처음인 것 같은디. 주인장!”
티치가 터뜨리는 웃음처럼.
선박 내에는 수북하게 쌓인 코인들이 가득했다.
‘10만이라니.’
정확하게는 10만 코인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으나, 고작해야 몇 천 코인이 모자랄 뿐이다.
‘약탈이 쏠쏠하긴 하군.’
해적들을 최대한 피하면서 사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트 효과 약탈로만 얻어낸 코인이 무려 ‘1만 코인’을 훌쩍 넘기는 수준이다.
그 뿐이랴.
‘전리품도 상당하고.’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각종 각성 재료는 부가적인 수입에 불과할 정도로.
오 성 등급의 장비인 오라클과 함께 저인족의 보물들까지.
“밸라미 녀석 이런 총을 숨겨두고 말이여. 해적왕이라니. 그건 내 이명이여.”
최단 시간 클리어의 보상으로 얻은 ‘해적왕의 장총☆☆☆☆’은 티치의 전용 무구에 해당하는 녀석이지 않은가.
얻어낸 것이 너무 많아 확인하는 것에도 곤란함을 겪는 마당이다.
다만, 정호는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참아내었다.
마냥 기쁘기만 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공헌도 보상이 빠졌어.’
알아차린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 클리어 업적으로 인해, 모든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공헌도 보상의 내용이 쏙 빠져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공헌도 보상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긴 했다.
정호가 제아무리 많은 공헌도를 집어 삼킨다 할지라도.
그림자 지하 성채에서 그랬듯.
고작해야 4천 코인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있던 것을 빼앗긴 느낌이 강렬하게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전부 다 사라진 건가?’
정호가 최초 클리어 업적을 얻은 만큼.
또 다른 클리어 자가 나오지 않는 한은 이 공헌도 보상의 여부가 사라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나만 빠진 거라면.’
공헌도 보상은 톨비아에는 없었던 방식의 보상이다.
톨비아의 시스템은 아스텔을 완전히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스텔이라하여 그런 톨비아 시스템을 적대시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괜한 불안감이 드는 그 때.
부르르르르-.
점차 육지가 가까워졌던 것인지, 정호의 스마트폰이 진동을 울려댔다.
‘동하로군.’
이번 공략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휴가도 내지 않았던 마당이니, 필시 찾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흐어어어어엉.
한데.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갑작스런 울음 소리.
“...무슨 일이야.”
그 사태가 꽤나 심각한 것임을 깨달은 정호가 곧장 동하에게 물음을 내던졌다.
-선배님... 선배님. 소식 못 들었어요? 으아아아.
“모르니까, 묻잖아. 뭔데?”
남정네가 우는 소리를 내는 것만큼 듣기 싫은 소리가 없다.
살짝 짜증을 담아서, 녀석에게 되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실로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과금망겜플레이어가 죽었다고 하잖아요. 흐어어어엉. 팬이었는데...!
“...어?”
자신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