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6화 >
# 66화
저인족들은 다산의 종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수의 자식을 데리고 있다.
적게는 수 명의 자식을. 많게는 수십에 달하는 자식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알을 낳는 그들의 종족 특성 탓이다.
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켈린왕의 자식은 그 수가 수백에 달해,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왕족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게 무슨 왕족이야.’
아마도 그것은 켈린왕의 모든 자식들이 가지는 불만이었을 터다.
켈린왕 직계의 자손이 무려 수백에 달하니, 그 자식들을 하나하나를 왕족 취급해주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저 도시를 지나가면, 몇몇이 ‘어, 왕자님이다.’라며 알아보는 것 정도에 불과한.
왕족으로써의 재물도, 권력도 가지지 못하는.
이름뿐인 왕족.
‘나는 왕의 자식이라고.’
‘레클리스 더 켈린’은 그 사실이 매우 불만이었다.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후계가 결정되어지는, 이 왕족의 사회는 잘못되어졌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런 불만을 가진다 한들.
그에게는 자그마한 힘조차 없었다.
켈린왕의 거대한 체구를 이어받지도 못했고.
자신을 따르는 가신이라고 해봐야 도시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변두리 마을의 경비병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지켈 경과의 안면은 텄지만.’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노력의 성과도 충분히 있었다.
심해경비대 대장인 지켈을 포함해, 아틀레타의 도시 주민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켈린왕의 수하들은 결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
그런 그들이 후계자가 확정된 마당에, 다른 왕족의 뒤를 봐주는 일은 없다.
‘다른 녀석. 나에게 힘이 되어줄 녀석.’
레클리스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바다 위를 지배하고 있는 해적들에게로의 제의.
하지만 그들은 그런 레클리스의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듯, 오히려 죽이려 달려드는 통에 전혀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아...! 이 녀석들이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것이 바로 정호 일행이었다.
다섯 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인간들.
하지만 수백에 달하는 해적들을 몰살시키고, 농락하는 모습은 도저히 앞길이 보이지 않았던 레클리스에게 전율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납치를 당하긴 했지만.
상황이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제물의 날! 그걸 왜 이제 알았을까!’
켈린왕의 앞에서 왕위찬탈에 대해 내뱉은 것은 다분히 즉흥적인 일이었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버지’라 부를 때까지 자식임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왕족의 위치.
거기에 ‘제물의 날’이라는, 왕으로의 지름길까지 주어졌다.
마치 지금이 아니고서야 기회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너희 왕이 제시한 보상은 너무 적다는 생각은 안 드나? 네가 말한 것처럼 수백 년은 괴롭히던 녀석을 쓰러뜨리는 일인데?”
“그, 그렇지.”
다만 그 상대를 제법 잘못 고른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단순한 착각은 아닐 터였다.
“심지어 그 왕은 자신의 대에서 ‘제물의 날’을 끝냈다는 위대한 성과마저 독차지하는데 말이야. 괘씸한 일이지. 아주, 비열한 녀석이고.”
“마, 맞아. 하지만 그 조건은···.”
“아니, 아니. 잘 생각해보라고. 켈린왕은 그것으로 은퇴 이후에도 저인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지내겠지. 죽어서라고 다를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저인족들의 왕’이라며 역사책에도 기록될 거야.”
“그러면... 좋은 것이 아닌가?”
“아니지. 너는 그런 위대한 왕의 ‘후계’가 되는 거라고. 항시 너에게는 그 왕의 후광이 뒤따르겠지. 하지만 만약, 만약에라도 네가 자그마한 실수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 위대한 왕은 저런 실수를 하지 않았는데.’ 라며 비교하겠지. 그것으로 끝이냐? 평생을 그 위대한 왕과 비교 당하다, 결국은 민중봉기라도 일어날 수 있는 대단히 큰일인 일이라고. 너는 비참하게 주검이 되어 다음 대에 왕좌를 물려줄 수밖에 없을 거고.”
“그, 그렇게 돼서는 안 돼!”
“맞아. 나는 너의 그런 미래까지 보장해주려고 하는 거라고. 미연에 방지해야지. 녀석을 쓰러뜨리는 녀석은 켈린왕이 아니야. ‘레클리스왕’이어야만 해.”
정호는 마치 정말 걱정이라도 하는 듯,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인가?’
레클리스는 그런 정호의 말에 홀딱 넘어갔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잖아. 너는 지금부터 ‘신화’를 써내려가야 한다고. 크라켄을 쓰러뜨리는 이는 하루 아침 만에 등장한 막내 왕자가 되어서는 안 돼. 사람들이 의심하거든. 저런 왕자가 어떻게? 라고.”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레기오로스’, ‘아스피토켈론’, ‘카프리콘’.”
“전부 신수들이잖아!”
“맞지. 하지만 그런 신수들을 쓰러뜨린 장본인이 크라켄을 쓰러뜨렸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
“믿을... 수밖에 없어.”
“자 여기 사인하시고, 퀘스트도 받아야지. 자, 레클리스의 신화를 써내려가 보자고. 위대한 왕으로의 첫 걸음이야.”
레클리스는 홀린 듯이, 정호가 내미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 *
촤아아아악-!
정호는 항해를 재개했다.
다만 질주의 장소는 바다 위가 아닌 그 아래.
앤 여왕의 복수는 지켈의 공기 방울에 의지 한 채.
바람이 아닌 해류를 통해 심해를 내달리고 있었다.
“주인, 진짜로 해적질 해 볼 생각은 없어?”
“전혀 없군.”
정호는 앤 보니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설마 받아들일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정호도 이토록 쉽게 퀘스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정호의 말은 실로 말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었으니까.
“애초에 레클리스라는 왕자가 제물의 날에 참가하는 건 확정이 된 마당이잖아. 그런데 왜 받아들인 거지?”
앤 보니의 의문처럼.
정호의 말에는 어페가 있었다.
애당초 전제조건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레클리스가 ‘제물의 날’에 참가하는 것이 확정된 이상.
보스 몬스터인 크라켄이 쓰러진다하더라도.
그 공헌은 참가한 레클리스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지 켈린왕에게 가지는 않는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적당한 안도감과 많은 양의 정보지.”
그리 말하면서도, 피식하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설마 아스텔을 홍보하던 때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회사 내에서 정호가 하던 일은 고작해야 아스텔의 요청에 따라, 홍보용의 광고를 내세우는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아스텔이 제 2의 세상이라 부르는 것에 손색이 없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부정하던 정호로써는 거짓을 일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호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일.
‘사기꾼이나 다름없지.’
이와 같은 일은 일상에서도 존재한다.
판매가 700원의 물건을 500원에 판다고 하는 것보다.
두 개를 사면 하나에 500원이고, 이것은 1400원보다 싸다! 라고 하는 많은 양의 정보로 그 본질을 숨기는 일처럼.
약간의 심리를 이용한 상술은 비일비재하다.
정호가 한 일도 그리 다를 바가 없다.
많은 양의 정보와 함께, 주어지는 두려움.
그것을 덜어낼 수 있는 위로와 해결책을 쥐어준다면 덥석 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그런 법이니까.’
거기에 양심의 가책이 없을 수는 없었으나.
당장 종말이 다가오는 마당에, NPC에게 줄 동정 따위는 정호에게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그 무엇보다도.
그저 잠깐의 대화로 얻어낸 것들은 가치는 그 따위 양심은 개나 줘버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Q. 첫 번째 신화]
-바다의 늑대, 레기오로스를 쓰러뜨린다.
-목표 : 레기오로스의 처치.
-보상 : 3,000코인 / 저인족의 보물 택 1
[Q. 두 번째 신화]
-거대한 섬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 아스피도켈론을 쓰러뜨린다.
-목표 : 아스피도켈론의 처치.
-보상 : 4,000코인 / 저인족의 보물 택 1
[Q. 세 번째 신화]
-바다의 산양, 카프리콘을 쓰러뜨린다.
-목표 : 카프리콘의 처치.
-보상 : 5,000코인 / 저인족의 보물 택 1
저인족의 보물은 쉬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호가 레클리스가 내건 조건에 당황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고작해야 보호해주는 것 하나로 저인족의 보물을 들먹였던 탓이 아니던가.
고작해야 ‘신수(神獸)’라 불리는, 네임드 몬스터들을 쓰러뜨렸다고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켈린왕처럼, 보스 몬스터인 크라켄 정도는 되어야 하나 쯤 내줄 수 있는 물건.
‘삼 성 등급 이상의 장비.’
저인족들의 보물이란 그런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그것을 무려 3개나 얻어 낼 수 있는 기회다.
심지어는 그 내용물도 모두 알고 있는 정호로써는 그보다 상위의 장비도 손쉽게 골라낼 수 있는 위치.
게다가 크라켄의 처치 보상은 그런 보물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흐흐흐.’
절로 입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속으로나마 참아냈다.
‘아직 얻은 게 아니니까.’
저 퀘스트들은 해상 루트로 선택한다면, 당연히 만나야 할 적들에 불과했다.
정호는 애당초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하여 파티를 구성했다.
하지만 그것을 클리어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해류를 등에 업고서 힘차게 나아가는 앤 여왕의 복수 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첫 번째 목표 ‘레기오로스’.
다만.
‘있을 줄 알았어.’
퍼엉! 퍼엉-!
분명 적들이 없다면, 바다 위를 그저 헤엄치고 있을 레기오로스가 기묘하게도 전투 중에 있었다.
해상 루트를 통한 유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만에 네임드 몬스터인 바다 늑대, ‘레기오로스’에 도달한 이가 누구인지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레이나.’
녀석의 반대에는 거대한 갤리온 선.
‘여신의 눈물’의 밑 부분이 훤히 보이고 있었으니까.
* * *
정호는 해상 루트의 치명적인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망망대해 위에서 선박 하나에 의지한 채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말을 할 것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코인의 회수가 어렵다.’
코인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톨비아라는 게임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가.
해적들이라면 배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 한은 회수하는데 문제가 없기 마련이지만.
거대한 네임드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직접 몸을 바다에 던져서 회수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걱정 할 것도 없네.’
정호는 애당초, 해상 루트를 선택했을 때부터 이와 같은 상황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바다 위가 아닌, 바다의 아래.
저인족들의 능력을 이용한, 심해 속 전투.
그것은 비단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더할 나위 없는 메리트를 가지고 있었다.
촤아아악-!
레기오로스는 한창 전투를 하며 바다의 위 아래로 떠올랐다, 내려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퍼엉! 퍼엉!
녀석이 바다 속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 위로 터져 나가는 불덩어리들.
레기오로스에게는 큰 피해도 가지 않았다.
레이나, 김세정은 정호가 우려했던 상황 그대로에 놓여있었다.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그 불덩어리의 수가 심상치 않았다.
과연 레이나가 선정한 마법사 랭커들이 모인 공격대인 탓일까.
하나 같이 압도적인 파괴력을 내고 있는 마법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니, 레기오로스라 하더라도 열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것도 방법인데.’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공략에는 문제가 없는 상황.
그저 레이나가 쓰러뜨린 레기오로스의 코인만 회수해가는 방법.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실로 간단한 방법이 있었지만.
정호는 그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촤아아아악-!
레기오로스가 파도에 몸을 맡겨, 뛰쳐나가는 것을 확인한 정호는 입을 열었다.
“티치! 녀석의 아래까지 전속력으로!”
제물의 날은 당장 내일. 그것도 몇 시간 남지도 않았다.
그 시간까지 모든 퀘스트를 완료해야 하는 정호의 입장으로써는 그들을 기다려줄 도리 따위는 없었다.
퍼엉-! 퍼엉-!
바다 위에서는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거대한 불덩이와 얼음 덩이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호는 그것을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바다 아래가 안전하다는 생각을 뜯어 고쳐주지.’
이윽고.
레기오로스가 그 마법들을 피해, 다시금 바다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을 때.
쉐에에에엑-!
정호가 손에 쥔 검을 녀석의 아가리에 들이밀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일제히 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