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화 >
# 64화
정호가 톨비아 시절, 저인족의 퀘스트를 경험했다.
녀석들의 부탁은 상당히 긴 연계 퀘스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간단한 해적들을 잡아 달라는 간단한 부탁부터 시작하여.
저인족의 배신자, 세이렌을 잡아 와 달라.
식료품이 모자라니 충당해 달라.
등딱지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대 거북, 아스피도켈론의 발톱을 다듬어 달라고 하기까지.
꽤나 그럴 듯한 명목으로 계속해서 요구해댔다.
다만 그 보상이 변변찮은 탓에 꽤나 인내심을 요구했다.
‘무언가 있겠지.’
당시의 정호는 녀석들의 요구와 부탁을 하나, 하나씩 들어주었다.
연계 퀘스트란 결국 마지막 퀘스트를 위한 과정에 불과하니까.
이토록 긴 연계 퀘스트라면.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얼마나 좋은 보상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서 버텼다.
하지만, 그런 정호를 맞이하는 것은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나?’
저인족의 왕, 저인왕(氐人王)은 오히려 정호를 향해 역정을 냈다.
‘쓸데없는 심부름을 하고 있었군.’
정호가 해왔던 모든 연계 퀘스트들이 정말이지 시답잖은, 심부름에 불과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통찰력이 충분하게 만들어 주지.’
저인족의 아이가 요구한, 해적을 쓰러뜨리는 것 정도야 지금의 정호에게 있어서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와, 왕님에게요? 그건 무리에요. 인간은 바다에서 숨을 쉴 수 없잖아요!”
“쯧.”
정호는 혀를 찼다.
녀석은 정말로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 있었으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끝까지 오리발이라니, 어이가 없어.’
아이의 모습을 하고서, 자신을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가증스러운 일이나 다름없었으나.
“뭐, 됐어.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
정호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었다.
애당초 녀석이 곧장 저인족들의 왕에게 안내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어도, 의심했을 마당이었다.
‘퀘스트가 온 것만으로 충분해.’
녀석이 퀘스트를 내걸었다는 것은, 결국 저인족에게 있어서 정호가 ‘적’으로 판단되지 않았다는 의미.
그것이면 충분했다.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녀석들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톨비아에서 검증이 끝난 일이다.
“노, 놓아주세요. 부탁은 취소할 테니까.”
버둥거리는 녀석을 어떻게 대하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는 말이다.
“앤 보니.”
“왜 주인? 이 녀석 놓아 줘?”
녀석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다.
“묶어. 녀석은 인질이야.”
“...와. 주인, 정말 해적질 해본 적 없어?”
그에 앤 보니가 감탄을 해댔으나, 그것은 정호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앤 여왕의 복수 호에는 기묘한 장식품이 하나 붙었다.
배의 최선두.
거기에는 위태롭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건어물이 하나 존재했다.
“사, 살려줘! 켈리! 말리! 리앙!”
그리 외치면서도 버둥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이익. 왜, 왜 안 풀리는 거야.”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그게 목적이라는 듯, 밧줄을 풀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어림도 없지.’
정호는 느긋하게 그 모습을 관망했다.
녀석에게 있어서 바다란, 일종의 탈출구다.
이미 잡은 물고기를 놓아 줄 만큼 정호는 어리석지 않았다.
‘스킬, 속박의 채찍.’
앤 보니의 스킬, 속박의 채찍으로 녀석을 감싸놓은 마당이다.
-스킬 : 속박의 채찍
-적 일 체에게 상태 이상, ‘속박’을 부여한다. 시전한 화신의 힘보다 낮은 적은 이 속박을 풀어낼 수 없다.
앤 보니의 힘은 각성을 통해 이미 ‘150’을 훌쩍 넘긴 마당이다.
그런 이의 속박을 풀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아! 살려줘!”
녀석은 계속해서 소리치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이...! 저 천인공노 할 녀석이!”
“당장이라도 구해야 해!”
그 구경을 온 저인족들이 앤 여왕의 복수 호를 계속해서 따라왔다.
‘좋군.’
그것은 정호가 바라는 바였다.
하나, 둘 씩 늘어만 가던 저인족들은 벌써 백에 달해 있었으나 쉬이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했다.
“어어? 가깝다 너! 백 보 유지 해.”
“이런 비겁한...!”
“최고의 칭찬이네!”
앤 보니는 커틀라스를 어깨에 올리며 비릿하게 웃어댔다.
‘놈들은 형제이기도 하니까.’
종족 그 자체를 가족으로 보는 저인족들의 습성 상, 아이가 다칠 수 있는 위험을 감내할 리가 없었다.
“이런! 앞에 해적들이 있다!”
“젠장! 얼른 처리 해!”
앞서 나간 저인족들의 고함소리가 귓가에 들어오자, 정호는 미소를 내지었다.
‘좋군.’
해상 루트는 위험도가 높은 루트이니 만큼, 숱한 전투를 겪게 된다.
하지만 저인족들이 그런 정호의 길을 대신 뚫어주고 있지 않은가.
녀석들은 의도치 않게 앤 여왕의 복수 호를 호위하고 있었다.
‘약탈을 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빠른 진행 속도는 마음에 쏙 드는 것이다.
‘이 쯤이겠지.’
저편에 보이는 섬을 한 채 발견한 정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섬의 아래에는 저인족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있다.
그 말인 즉.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저인족들의 도시를 지켜내는, 수뇌부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아니,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알 것 같군.”
일반적인 저인족보다도 두 배는 큰 체구에 거대한 삼지창을 든 녀석은 확실한 간부 클래스의 저인임에 틀림이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지?”
과연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당장 풀어주라며 일갈하지도 않는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녀석이 왔네.”
정호는 곧장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원하는 건 두 가지. 하나는 저인왕을 만나게 하는 것이고···.”
“불가! 네 녀석 같은 야만족을 왕과 만나게 할 수는 없다.”
곧장 거절의 말이 떠올랐으나, 정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제물의 날’에 나를 포함시킬 것. 그게 내 조건이야.”
“...뭐라?”
두 번째 조건이 상당히 의외였던 것인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절대 안 된다던 녀석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제물의 날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알고 있으니까, 요구하는 것 아니야.”
“...”
녀석은 고민이라도 하듯이, 턱에 손을 가져다대고 있었으나.
정호는 녀석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았다. 왕에게 안내하지.”
* * *
저인족들에게는 특이하기 짝이 없는 능력이 하나 존재한다.
두둥실-.
바다 속으로 들어오는 이에게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거대한 공기방울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정호는 앤 여왕의 복수 호를 탄 채, 심해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언제 풀어줄 건가.”
“왕에게 도착한다면, 언제든지. 털끝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안심해.”
“...알았다.”
저인족의 간부라고 생각했던 녀석은 자신을 지켈이라고 소개했다.
정호는 그 이름을 듣고 놀랐다.
‘설마하니, 수뇌부일 줄은 몰랐는데.’
지켈이라고 하면, 심해경비대의 대장으로 왕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단순히 하나의 아이를 위해 이토록 헌신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이 아이가 꽤 높은 위치인가?’
슬쩍 토라져 있는 아이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본 기억은 없는데...’
제아무리 톨비아에서 숱하게 ‘크라켄의 역습’을 클리어한 정호라 할지라도, 이름도 모르는 저인족의 아이를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의외로군.”
“왜?”
그런 정호에게 지켈이 먼저 말을 내걸었다.
“제물의 날을 알고 있는 것도 의외인 터인데, 참가하고 싶다니... 자네는 자살희망자라도 되는 가?”
“뭐, 그런 걸로 해두지.”
정호는 녀석에게 가타부타 설명을 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퀘스트로 줄 내용이면서.’
퀘스트를 이어가다보면, 결국 마지막에 튀어나오는 것이 ‘제물의 날’ 퀘스트다.
기한 안에 받아내지 못하면, 허사가 되고 마는 퀘스트였지만.
지금은 그럴 걱정은 없었다.
저인왕을 곧바로 만나게 되었으니까.
“도착했네.”
지켈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저인족들의 도시.
일직선으로 뚫려진 길의 끝에는 거대한 성이 하나 존재했다.
심해에 있는 구조물치고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
“따라오게.”
앤 여왕의 복수 호에서 내린 정호의 일행은 지켈을 따라, 그 일직선의 길을 걸었다.
“인간... 인간이야.”
“뒤에 있는 저 분은...!”
“아아, 불쌍해!”
“지켈님은 저런 녀석들을 왜 데리고 온 거야?”
건물의 틈새 사이로 저인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정호는 손에 쥔 밧줄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이건 목숨줄이야.’
이 망망대해의 심해 속에서 공기 방울이 사라지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니 녀석들의 왕을 만나고서 직접 퀘스트를 받아, ‘확답’을 받아야만 했다.
토옹, 토옹, 토옹.
공기 방울이 몇 번이고 튀어나가며 도착하는 곳은 일직선의 길 끝에 존재하는 거대한 성.
아니, 거대한 왕좌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지켈.”
그러한 왕좌에 앉아 있는 이는 십 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몸체를 지닌 반인반어의 존재.
저인왕이 턱을 괴고서 정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왕이시여. 이 인간들이 ‘제물의 날’에 참가하고 싶다고 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제물의 날? 이 인간들이?”
“예.”
사뭇 놀랐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린 저인왕은 정호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인간이여. 제물의 날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나?”
“문어 한 마리 잡지 못해서, 녀석이 배가 부를 때까지 자기 동포를 산 제물로 삼는 일이라면 알고 있지.”
“...음.”
정호는 한껏 비아냥댔다.
실제로는 선발 된 전사들이 도시를 침공하는 것을 막아내려 애쓰는 것이었으나.
그들 스스로도 ‘제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암담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였다.
‘그걸 원하기도 하고 말이지.’
목표 중 하나인 크라켄.
녀석을 하루라도 빨리 만날 수 있는 기회.
거기에 저인족들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녀석의 약점도 그대로 노출 되어있지.’
선상 위의 싸움이라면, 녀석을 처리하는 데에는 꽤나 고생을 할 것이 뻔했다.
해저 루트가 선호되는 이유가 바로 이 보스, 크라켄의 약점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니 말이다.
“좋네. 그럼 부탁하지. 만약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막아내어 주기만 한다면 큰 보상을 약속하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정호의 눈앞에 떠올랐다.
[Q. 제물의 날]
-크라켄은 시시때때로 저인족의 도시를 침공합니다. 저인왕은 그런 크라켄으로부터 저인족들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목표 : 크라켄의 사살
-보상 : 10,000코인 / 저인족의 보물 택 1
‘일이 아주 잘 풀리는데.’
정호는 비릿한 미소를 내지었다.
겨우 한 명의 아이를 인질로 삼은 것 뿐 일진데.
가장 중요한 퀘스트는 물론이거니와 보스 몬스터도 곧장 만나게 되지 않았던가.
“...인간, 이제.”
“알겠다.”
지켈의 말에 정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았다.
이미 얻어낼 것은 모두 얻어내었다.
곧장 저인족의 아이 입을 막아 두었던, 헝겊과 함께 밧줄을 풀어내었다.
예기치 못했던 것은 그 직후였다.
“아버지!”
입을 막고 있던 헝겊을 풀어내자마자, 소리 지르는 아이의 외침.
그에 정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자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얼굴을 붉게 물들고 있는 저인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시발.’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곧장, 앤 여왕의 복수 호에서 대기 중인 화신들을 부르려던 그 때.
“이번 제물의 날에 저도 참가하겠어요.”
“음?”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