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4화 >
# 44화
“어, 어어...”
세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상황.
분명 이곳에는 자신과 이정호라는 악마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데.
목에 걸린 나이프는 뭐고, 이 목소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 살려...!”
세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숨 구걸 밖에 없었다.
“글쎄요. 분명 살의를 품으셨지 않습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했다.
“남을 죽이려면, 스스로의 목숨은 걸고 하는 법입니다. 깔끔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아찔했다.
목에 가져다 댄 나이프가 살을 파고들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구원해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멈춰, 코르데. 언제 내가 암살 명령을 내렸지?”
“어머, 죄송해요. 장난친 거뿐이었는데.”
정호의 한 마디에 나이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으니, ‘그림자 암살자’인 세오의 등 뒤를 완벽하게 잡은 이가 나이프를 품 안에 갈무리하고 있었다.
중세시대에서라도 튀어나온 듯, 새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은발의 여성이 있었다.
‘어.’
한데, 그 ‘코르데’라는 여성을 보자마자 시선을 빼앗겼다.
분명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끊어내려 했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크게 뛰어댔다.
한참이나 넋이 빠져라 보고 있으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정호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김세오 씨.”
이 악마는 정말 우연이라는 듯,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그림자 지하 성채 2층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존재가 랭커 임을 깨달았을 때.
정호는 지난 합성에서 새롭게 합류한, 화신을 불렀다.
“코르데.”
-샤를로트 코르데☆☆☆
-힘 : 40 체력 : 42 민첩 : 95 지능 : 92
프랑스 혁명 시대, 공포 정치를 추진한 장 폴 마라를 암살한 여성.
그 미모 덕에 ‘암살 천사’라 불린 샤를로트 코르데다.
“어머, 저를 부르실 줄은 몰랐는걸요.”
코르데는 가녀린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나이프를 들고서 나타났다.
-이봐, 주인. 벌써 바람이라도 피우는 거야? 이 누님은 섭섭한데.
아틸라가 평소처럼 장난기어린 어투로 말을 내걸기는 했으나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정호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벌써 지하 2층의 사냥이라니.’
그 난이도는 이미 실감하지 않았던가.
꽤나 과격한 방법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키드와 서서, 유능한 용병까지.
그 능력치는 하나, 하나가 랭커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전투 소리는 단 하나 뿐이다.
그 의미는 남다르다.
‘솔로 플레이.’
그런 자를 경계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과하기는 하지만, 조심을 기울이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
아틸라의 말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아틸라의 무력을 넘보는 자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있을.
만약의 사태를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만이며, 오만이다.
“코르데. 몸을 숨기고서, 주변을 경계하도록.”
“죽여도 되나요?”
“아니, 그건 보류야. 어디까지나 경계에 초점을 둬.”
“예, 그건 뭐...”
스르륵-.
코르데가 뒷걸음질을 몇 번 하는가 싶더니, 단 한 순간에 사라졌다.
“조금 아쉽네요.”
바로 옆에서 들려옴에도, 그 형체를 찾을 수가 없다.
놀라운 신위나 다름없는 모양새.
그것은 삼 성급의 화신인 코르데가 가진 스킬, ‘암살 천사’.
주변과 동화하여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적을 제압했을 시, 상태이상 ‘매료’를 시전하는 쓸 만한 스킬- 이라고 판단했으나...
생각보다 그 효과는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예? 아, 예.”
그림자 지하 성채 2층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이는 정호와 일면식이 있는 자였다.
김세오.
스스로 유니크 직업을 손에 넣었다고 하는, 암살자 계열의 클래스.
“위험하실 텐데, 어떻게 이곳에 있으십니까?”
“사냥을 하러 왔습니다.”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을 하면서도 코르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확실한 ‘매료’ 상태에 걸린 것이 분명해보였다.
“동료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솔로로...”
“유니크 직업인 그림자 암살자의 스킬로 말입니까?”
끄덕.
“대단하시군요!”
정호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레벨부터 상세 스탯, 스킬의 정보, 그리고 어디까지 진행했는지까지 물었다.
놀랍게도 세오는 지하 3층의 아피스를 만나기도 했다고 전했다.
“으음... 아. 이, 정호씨. 제가 어떻게...”
이내 세오가 상태이상, ‘매료’가 풀리고 완전히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두통을 호소하는 듯, 연신 머리를 붙잡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오 씨 괜찮으십니까? 피곤하신 것 같군요.”
“아무래도 던전에 오래 있었던 탓인 것 같습니다.”
“돌아가셔서 조금 쉬셔야 하겠습니다. 제가 안내 해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세오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혹시, 제가...”
“저는 눈이 없습니다.”
“예?”
“정호 씨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말씀 아닙니까?”
“...예? 아, 예...”
정호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세오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당초 정호는 이곳에 검문까지 받고서, 당당히 들어온 마당이다.
톨비아의 시스템을 들키는 것은 피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그렇다고 세오가 그것을 눈치 챈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럼!”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세오가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음...’
정호는 그런 세오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코르데의 스킬인 암살 천사는 본디 게임에서도 ‘적’에게만 발동하는 스킬이다.
그런데도 세오는 그 매료에 걸렸다.
‘1층에서도 그랬지.’
그저 스쳐지나갔을 뿐이었으나.
적어도 정호는 그들이 자신에게 품은 감정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미묘한 공포감.’
아틸라의 힘은 분명 공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그것이 단순한 무력에서 찾아온 녀석은 아니었다.
- 2세트 : 두 명의 살인마를 보유 중일 때, 살인마는 주변의 적에게 미약한 공포를 준다.
세계 6대 살인마 세트 중 2 세트의 효과.
미약한 공포를 주변의 ‘적’에게 준다는 점.
그 효과가 아스텔의 유저들에게 적용된 것이리라.
“허? 이거 참.”
정호는 혀를 차냈다.
톨비아의 시스템이 아스텔의 유저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 아닌가.
아스텔은 그야말로 구원의 빛이라 불리는 녀석이다. 다가오는 종말 속에서 사람들에게 힘을 나누어준 이.
그런 축복을 받은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톨비아의 시스템은 꽤나 이질적인 존재다.
종말의 정체일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 자체까지 묘하기 그지없다.
‘알 수가 없다.’
정호로써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정호가 바삐 그림자 지하 성채로 온 주된 목적은 물론 뽑기를 위한 코인이었지만.
이 의문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는 녀석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한데.
끼이이이익-!
그림자 지하 성채 3층, 아피스가 있는 장소에 도달한 정호가 마주한 것은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캬하아아악”
“캬아아악!”
3층 콜로세움의 환호 소리는 변함이 없다.
거대한 황소, 아피스가 새빨간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것 또한 같았다.
그런데 다른 점이 하나, 존재했다.
“왔는가?”
황소에 위에 한 명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네.”
“니네체르?”
그림자 지하 성채의 왕, 니네체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자네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네.”
본래부터 정호는 니네체르를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다.
자신의 의문에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은, 의외의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었던 니네체르 뿐이었으니까.
후루룩-.
하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구를 침공한, 그림자 지하 성채의 왕을 직접 마주하고서 차를 마시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묘한 상황이었다.
“자네가 찾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네. 직접 찾아가진 못해서 미안하게 되었어.”
후루룩-.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설탕을 넣지 않은 것인지, 쓴 맛이 혀끝을 달구었다.
그럼에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보니, 상당히 좋은 차임에는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분명 자네의 손에 죽었을 터인 내가 다시 눈을 떴으니 말일세. 적어도 3층을 기웃거리던 사내가 찾아왔을 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네. 아피스님께서 이야기 해주셨지.”
기웃거리던 사내라고 한다면, 필시 세오일 것이다.
정호는 시선을 돌려, 아피스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니네체르가 이렇듯 자유의사를 가지는 것은 필시 자신의 톨비아 시스템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묻지.”
후루룩-.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정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나도 그렇네. 한데, 자네가 찾아오면서 다시 눈을 뜨니 같은 똑같은 장소더군.”
“네 목적은 뭐지? 그저 침공이 전부인가?”
“클클. 침공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네.”
“한 달 뒤에 이곳을 나온다고 알고 있다.”
“허, 그런가? 전혀 몰랐네.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라,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거절하겠네. 늙은이에게는 힘든 세상이야.”
한데, 이상했다.
대화 내용이 전혀 맞물리지를 않는다.
후루룩-.
이번에는 니네체르가 가지런한 두 손을 들어올려,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나는 정말이지... 전혀 모르는 일이네.”
탁.
자신의 지팡이를 아예 바닥에 내려놓기까지 하니, 저항할 기색 따위는 없어 보였다.
“...그럼, 질문을 달리 하지.”
잔뜩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의문이 이어졌다.
침공한 대상인 니네체르조차도, 자신이 지구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톨비아 시스템’에 의해 제정신을 차린 니네체르는 그럴 의지가 없다.
“이번에는 어째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다른 문제는 이것이다.
니네체르는 분명 자신을 이전에도 차를 권하기는 했다.
그것을 거절한 것은 분명 자신이었지만, 니네체르는 고민도 없이 공격을 강행했다.
설사 그 권유를 승낙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음...”
니네체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의 턱을 두들겼다.
“파라오라는 위치에 있는 나로써는 입에 담기가 껄그럽네만...”
그렇게 뜸을 들이고서, 말을 꺼낸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다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과 그조차를 자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공포로 다가오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어째서 공격했느냐고...당연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네. 죽음을 받아들이면, 이 고통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줄만 알았으니.”
하지만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육체에 깃들 뿐.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 말하고 있었다.
“자네를 기다린 이유라고 했나?”
니네체르가 난데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를 이곳에서 구해주게.”
“아니, 그런 말을 해도.”
정호가 니네체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녀석의 머리를 그대로 검을 베어버리는 일 밖에 없다.
구원이라는, 그런 선택지 따위는 자신에게 없었다.
한데.
그 직후 떠오르는 하나의 메시지에 정호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니네체르☆☆☆가 당신의 수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