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5화
쿠우우웅-!
거대한 황소, 아피스의 육중한 몸체가 바닥에 눕혀지며 콜로세움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숭배 대상 - 아피스가 쓰러졌습니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녀석이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푸후...!”
정호는 그제야 한껏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분명 공략법 자체는 간단했고,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문제도 없었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이었으나.
정호는 녀석이 쓰러질 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림자 지하 성채의 왕, 니네체르가 깨어납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케에에에에!”
“케에에!”
“키야아...”
관중으로 자리 잡았던 구울들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피스가 사라지는 자리를 확인했다.
거대한 황소, 아피스가 떨어뜨린 코인은 무려 천 개.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 코인을 바라본 정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야 했다.
“이런...!”
하지만 정호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꽝이잖아.’
아피스는 저급 네임드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준보스급에 해당하는 녀석이다.
네임드 몬스터부터 떨어뜨리는 전리품.
떨어뜨리는 전리품이 아무리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좋지 않은가.
하지만 떨어뜨리지 않았다.
“끝난 것 맞죠?”
“괜찮으십니까?”
정호가 혀를 차며, 코인을 회수하자.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원하던 서서와 키드가 정호를 향해 다가왔다.
“그래.”
정호는 짧게 답하고는, 서서와 키드의 상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상태는?”
“물론 괜찮습니다.”
“앞으로 그런 거 하기 전엔 먼저 말해달라고요.”
아피스가 이리저리 나다니는 바람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긴 했으나, 체력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좋아. 가지.”
“예? 벌써?”
정호는 되물어오는 키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진행이 빨라.’
그림자 지하 성채에 들어 온 지 약 반나절이 흘렀다.
본래 정호가 계획했던 공략 시간이 꼬박 하루라는 것을 상기해보면, 무려 반절이나 빠른 속도였다.
‘지하 2층의 풀링 덕분이었겠지만...’
꽤나 위험을 동반했던 그 방법으로 공략 시간이 대폭 단축되어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 때 버렸던 하나의 목표를 다시금 되살리는 것도 가능할 터다.
‘최초 클리어 업적.’
히든 피스를 확인하느라 시간을 버린 탓에 포기했던 업적이다.
물론 전리품은 그것을 감안하고도 놀라운 보상이었으나.
이토록 빠른 공략 시간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정호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데, 놓아줄 바보는 아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주군께서는 너무 몸을 혹사시키시고 계십니다.”
진심 어린 걱정을 하는 서서를 향해 정호가 괜찮다는 의미로 어깨를 두들기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니네체르라...’
사실 기억 속에서 확 떠오르는 녀석은 아니었다.
아피스처럼 황소의 몸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크게 어려운 패턴의 공격을 가하는 녀석도 아니다.
‘네크로맨서에 가깝지.’
그림자 지하 성채.
존재하는 몬스터는 모두 언데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니네체르는 그런 녀석들을 일으켜 세우고 왕으로써 군림하는 왕.
하지만 게임에서는 아피스가 훨씬 어려운 녀석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니네체르의 난이도는 최하에 해당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
아니, 오히려 서서와 키드의 조합이라면 수적인 우위를 앞세우는 네크로맨서의 특성상 역으로 카운터펀치를 맞는 격이었다.
“그럼, 이대로...”
정호는 콜로세움의 반대편.
니네체르가 도사리는 지하 4층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 앞에 선 채, 키드와 서서를 향해 손짓했다.
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주군...!”
“위! 위...!”
서서와 키드가 난데없이 위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그 반응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정호는 고개를 서서히 올렸다.
따앙-
따앙-
정교하게 조각된 새 모양의 나무 지팡이를 두들기며,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
“...꽤 좋은 유흥거리였네. 그 정도라면 ‘아피스’님도 편히 눈을 감았겠지.”
정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 어떻게...!”
지하 3층에서는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녀석.
자신의 방에서 줄곧 유저들을 기다려야 할 녀석.
“음? 나의 땅에서 내가 못 갈 곳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림자 지하 성채의 왕.
니네체르가 그 모습을 직접 드러냈다.
* * *
니네체르(Nynetjer).
‘신과 같다’라는 꽤나 오만한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진 그는 기원전 28세기, 이집트 제 2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다.
재위 중, 아피스 황소 달리기의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톨비아에서는 타락한 ‘화신’으로써, 그림자 지하 성채의 왕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
정호는 난데없이 나타난 니네체르의 모습에 잔뜩 긴장하며 서서히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좋다네. 이런 몸으로 달려들어 봐야 나만 손해이지 않은가?”
확실히 니네체르는 살아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깡마른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피부가 바짝 말라 생긴 자글자글한 주름들은 오히려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
하지만 정호는 경계를 결코 늦추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적어도 이런 흐름은 톨비아에서 있지 않았다.
보스방에서 기다리지 않는 보스라니, 웃기지도 않을 일이다.
“꽤나 여유롭군.”
“오래 살다보면 삶의 여유 정도는 생기는 법이 아니겠나?”
게다가 저 여유로운 태도는 무엇인가?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났더니, 이런 유쾌한 일도 생기는 구먼. 어떤가. 차라도 한 잔 마시겠는가? 독은 타지 않겠네. 설마 그러겠는가. 하나의 나라를 통치하는 파라오로써 그것은 용납하면 안 되는 일이지.”
“...사양하지.”
“안타까운 일이네.”
적을 향해 차를 마시겠냐니.
녀석의 태도는 정호의 생각을 완전히 넘어서 있었다.
“그럼, 이곳에서 바로 싸우겠는가?”
하지만 니네체르의 말마따나 그림자 지하 성채는 한 달 내로 클리어 하지 않으면 침공을 가하는 명실상부한 적이었다.
녀석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잊지는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네 방으로 안내 받고 싶은데.”
“그건 곤란하네. 아직 방을 청소하지 않아서 말이네. 시녀들이 아직 자고 있으니 원.”
“기다릴 수 있다만?”
“흘흘, 자네 같으면 순순히 따라줄 것 같은가?”
끄응.
다만 그 적이 자유의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굉장히 까다로운 적으로 변모했다.
녀석은 보스방, 즉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불리하니까.’
니네체르가 어째서 준보스인 아피스보다도 더욱 약한, 보스로 불렸는가.
파라오의 방답게 그 크기가 넓기는 했으나, 그렇다한들 ‘방’으로 분류될 정도의 수준이다.
제아무리 강력한 네크로맨서라 하더라도 언데드들을 세워 놓을 장소가 없다면 의미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이라면 말이 다르다.
이곳이라면 원없이 언데드들을 뽑아내도 문제가 없다.
“오지 않는다면 먼저 가겠네.”
먼저 손을 쓴 것은 니네체르였다.
따앙-!
새의 조각을 한 지팡이, 호루스 지팡이가 바닥을 한 차례 두들기자 녀석의 발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없이 많은 그림자들.
그것들이 콜로세움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캬하학!”
“그르르륵...!”
그러자 사라진 줄만 알았던 콜로세움의 관중들, 구울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까득-!
최악의 상황.
이를 거칠게 갈아 낸 정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서서!”
“예! 주군! 구원대!”
정호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곧장 스킬, 구원대를 펼치는 서서.
““주인님의 뜻대로...!””
동시에 다섯의 일 성급 화신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됐어!’
방패병이 둘, 검병이 셋.
지금의 상황에는 최적의 화신들이 나타난 것을 확인한 정호는 자신의 검을 부여잡았다.
“우리를 보호해라! 서서와 키드는 최대한 녀석들을 저격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구울이 족히 수 천.
그것을 정중앙에서 맞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말을 하는 것조차 아껴야할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네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니네체르는 언제 자리를 옮긴 것인지 콜로세움의 최정상에서 그 모습을 관망하고 있었다.
무방비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이런 젠장...!”
적어도 정호가 서 있는 콜로세움의 정중앙에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위치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타아아아아앙-!
기어코 구울이 사정거리에 들어온 것일까.
키드가 쏘아올린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캬하아아아악!”
“키에에에에-!”
시체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정호의 파티를 덮쳤다.
* * *
타아아앙! 타앙!
“캬아아아악!”
촤르르르륵!
“케에엑!”
파아아아악!
콜로세움의 중앙은 그야말로 지옥도나 다름이 없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구울들의 공세를 막아내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음이 꺾이기 마련이지만.
아예 처음 맞이했다면 모를까.
정호의 파티는 이미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기억이 있었다.
‘이래서야 지하 2층과 다를 바가 없네...!’
이른 바 예방주사.
“이, 이젠...!”
“야! 약한 소리 그만하고 뒤에서 좀 쉬어!”
타앙! 타앙!
그 효과는 겁이 많았던 키드에게도 적절하게 먹힌 모양이었다.
잔뜩 겁을 지려먹은 방패병의 앞에 선 키드는 구울들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총알을 쏴대는 기행마저 선보였다.
후우우웅- 퍽!
“움직인다!”
정호는 바스타드 소드의 검면으로 구울들을 후려치며 천천히 앞으로 전진 했다.
타격 시마다 체력을 회복하는 '멈추지 않는 체력'의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함이었다.
원형으로 자리를 사수하는 정호 일행은 점차 콜로세움의 벽으로 향했다.
그것은 지하 2층에서처럼 벽을 등지고 구울들을 상대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전장이 달라진 것뿐이지, 공략에는 변함이 없다.’
네크로맨서를 상대하는 공략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녀석이 일으킨 언데드를 모조리 격멸시키거나.
술자 본인을 쓰러뜨리던가.
“다시 움직인다!”
정호가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타아앙-! 타앙!
촤르르르륵-!
도대체 몇 분이나 흘렀을까.
체감 상으로는 몇 시간이나 되는 시간을 걸쳐 정호의 파티는 기어코 녀석이 앉아 있는 의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음! 왔는가?”
니네체르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정호를 마주했다.
“이런 젠장...!”
정호는 그 태도를 보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음에도 욕지거리를 내뱉는 까닭.
“미안하네만. 파라오라는 위치는 안전을 도모하는 게 우선이여서 말이네.”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까맣게 된 니네체르의 신형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빨려간다.
“캬하하하학!”
그림자가 사라진 의자.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지겹도록 본 구울의 얼굴이다.
쉐에에에엑-!
뎅겅-.
입에서부터 독을 뿜어내려던 구울의 목을 단숨에 끊어낸 정호는 곧장 시선을 옮겨, 다음 타깃을 찾았다.
‘이게 이렇게 악독한 패턴이었나?’
드넓은 콜로세움의 3시, 6시, 9시.
그곳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니네체르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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