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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뽑기로 살아남는 법-26화 (27/144)

# 26화

# 26화

열 흘.

세상에 몬스터라는 괴생명체가 나타난 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상점 주인인 노인에게서부터 건네받은 정보와는 달리, 큰 변화 없이 현 상황을 유지했다.

세상을 발칵 뒤집었던 ‘작은 뿔 고블린’들도 대부분이 정리되었다.

‘아무것도 변한 건...아닌가.’

출근길에 오르는 정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저곳에 군인들이 살벌한 총을 들고서, 경계를 서고 있다.

“에휴, 고블린을 찾으러 다니는 것도 힘든 일이라니까.”

“적당히 처리했어야지. 이래선 우리는 어떻게 레벨 업 하라는 거야?”

“별 수 있겠어? 저기 군인 아저씨들이 다 처리했는데.”

친구들로 보이는 삼인조들은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장비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데 그 장비들이 검과 창, 활. 가죽과 철로 이루어진 갑옷.

중세시대라도 온 것처럼, 21세기에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다.

비단 그런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이거 나도 적당한 무기를 들고 다녀야 하나?’

오히려 정장차림의 정호가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온 세상 사람들이 코스프레 행사 속에 있는 듯 했다.

“이번에 S47 샀다니까. 이거 엄청 편해. 공격대에서도 이거 필수로 확인한다니까 사는 게 좋아.”

“사고 싶어도, 매물이 없다니까.”

이어지는 사내들의 자랑.

그에 정호는 시선을 옮겨, 건물에 걸린 광고판을 바라보았다.

[랭커들에게 인기!]

[새로운 세상에서의 필수 아이템! S47]

-삼정전자

늘상 있던 새로운 제품의 홍보.

하지만 그 만큼이나 세상이 격변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일도 없었다.

정호는 자신의 손목을 쓰다듬었다.

-이정호 / 29

-레벨 : [email protected]

-직업 : @#

-힘 : 8 민첩 : 7 체력 : 12 지능 : 10 운 : 3

광고하는 물건과 같은 스마트 워치에서 정호의 스텟이 떠오른다.

레이나.

김세정이 선물해주고 떠난 이 물건은 이제는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의 물건이 되고 말았다.

‘괜히 재벌가인 건 아닌 모양이야.’

정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언제고 다시 취재를 하겠다고는 했지만,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다.

지금에서는 랭커 레이나로써 사람들에게 인기인이 된 덕분에 만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뭐, 딱히 취재할 이유도 없지만.’

지난 시간, 많은 정보가 풀렸다.

지금에서야 코인의 가치는 급부상하고 있었지만, 막대한 돈을 지니고 있는 세정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다.

“오늘은 얼마나 잡을까?”

“세 마리면 충분하지 않아?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 살겠는데.”

“그 만큼 있으려나.”

예나 지금이나.

돈이 모이는 곳에는 사람이 꼬인다.

코인의 가치가 올라감에 따라, 스스로 사냥을 나서는 유저들은 많아지고 있었다.

아예 코인을 사들여서, 사재기를 하는 이들도 있으니 말을 다했다.

“키킥. 일 왜 함? 코인이 벌어다 주는데.”

“그러게. 하하.”

회사의 정문을 열고 들어서는 정호를 바라보는 사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돈이 복사가 된다니까!”

마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내들.

그에 정호는 피식 웃음을 흘릴 뿐, 반응하지 않았다.

‘이것 참...’

반응해줄 이유가 없다.

‘천 코인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등에 짊어진 가방 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있었으니까.

* * *

끼익-.

정호는 오래된 경첩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사무실 내부로 들어섰다.

출근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지만, 사무실은 조용했다. 휑하다고 느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아, 오셨어요?”

호들갑스럽게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을 본 정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안 그만뒀냐?”

“어떻게 그만둡니까. 선배님이라는 동아줄이 있는데. 아니, 이젠 부장님인가요? 키킥.”

동하의 장난기가 다분한 말에 정호는 손사레를 쳤다.

“부장이 무슨 소용이야.”

“그건, 그렇네요.”

지난 일주일의 시간은 길었다.

시련에서부터 하나, 둘 떠나가던 사원들이다.

현실에 몬스터가 나타난 마당에 사직서를 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사원이 없으니 강제로 승진해버린 정호의 입장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일거리는?”

“저녁에 랭커와의 취재가 하나 있어요.”

동하의 대답에 정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자그마한 회사에 굳이 붙어 있는 까닭이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아스텔’에서 직접적으로 연결해주는 랭커와의 면담.

이 만큼 정보수집이 쉬운 장소를 찾기 어려운 법이다.

‘상위 유저들은 콧대가 높으니까.’

만나기조차 어려운 그들이 푸는 정보들은 하나, 하나가 값진 일이다.

히든 클래스에 대한 정보라던가, 스텟을 증가시키는 방법이라던가 하는 내용.

혹은 주목해야 할 파티처럼 가십거리로 떠도는 이야기만 하더라도, 하나하나가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정보들이다.

‘원하는 건 다른 거지만.’

하지만 그 대부분 내용은 정호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들이 푸는 정보들은 ‘아스텔’에 관한 것이 상당수 차지했으니까.

정호가 원하는 정보는 다른 쪽이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지?”

“또 등산하게 생겼어요. 차타고 3시간이나 달려야 있는 곳이에요.”

정호는 입을 삐죽 내밀며 한탄하는 동하의 말에 정확한 주소를 받아 적었다.

“좋아. 다녀와.”

“예. 예. 이번에도 저 뿐이죠. 저는 언제 승진시켜준답니까?”

투덜대면서도 장비를 챙겨 떠나는 동하를 바라보는 정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작은 뿔 고블린’은 이제 멸종위기종이나 다름없었다.

녀석들이 떨어뜨리는 코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주 씨가 말랐다.

그런 와중에 랭커라 불리는 상위 유저들이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밤에는 여길 가야겠어.’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작은 뿔 고블린’이 있는 장소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였다.

* * *

뜨거웠던 태양이 그 모습을 감추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어둠의 시간.

모두가 꿈자리에 들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고요한 밤.

사삭-. 사삭-.

정호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었다.

풀숲을 헤치고 나가는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키륵, 키륵.”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이나 걸어가서야 발견되는 작은 뿔 고블린이 하나.

정호는 녀석을 확인하자마자 지체할 것 없이 신형을 날렸다.

파삭. 파삭- 쉐엑!

단 몇 걸음의 발돋움으로 순식간에 날아오른 정호가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켁-!”

단말마의 비명처럼,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지는 작은 뿔 고블린.

정호는 검에 묻은 피를 한 차례 털어내고는 코인을 수거했다.

코인을 거머쥔 정호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이걸로 879코인.’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것이 정확했다.

유능한 용병을 강신시킨 정호는 지난 시간과 비교하여 큰 스펙 업을 한 적 따위는 없다.

다만 녀석들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는 작은 뿔 고블린과 ‘전투’를 한다는 표현은 올바르지 않았다.

정호는 어디까지나 사냥꾼.

포식자의 입장에서 허기를 채우기 위해 피식자를 찾아다니는 형태였다.

‘사냥하기에는, 생각보다 적은 수인데.’

정호는 코인을 거머쥐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전투 시간 그 자체는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사냥 시간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찾으러 다니는 게 일이니 원...’

처음에야 반나절에 300코인을 벌어들였지만.

지금은 일주일 내내 사냥을 나서도 천 코인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서서와 키드.

둘을 독단적으로 사냥에 나서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이 수준이었다.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반증이나 다름없었으나.

“쯧...”

정호는 혀를 차낼 수밖에 없었다.

곧 침공이 일어날 것이라는 노인의 말은 정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타앙-! 탕!

그런 정호의 귓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에서 들리는 총성.

키드의 콜트M1877이 불을 뿜어낸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인데.’

정호의 사냥은 언제나 밤중에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키드가 아무리 명사수라 할지라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적을 처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름달이었군.’

고개를 들어, 달을 확인한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샛노란 달이 어두운 산 중을 비추고 있었다.

이 정도의 빛이라면, 키드가 활약하기엔 충분했다.

그런 정호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일까.

타앙! 타앙!

키드의 리볼버는 쉴 새 없이 불을 내뿜고 있었다.

민첩이 세 자리 수로 넘어간 키드의 활약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타앙! 타앙! 타앙!

연이어 터져 나오는 발포음.

정호는 미소를 내지었다.

항상 장난이 지나쳐, 속을 뒤집어 대는 통에 타박만 해주었던 녀석이다.

오늘만은 칭찬해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한데.

타앙! 타앙!

“...음?”

타앙!

“...뭐?”

키드의 총성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됨을 깨닫기란 어렵지 않았다.

타앙!

그것도 총성은 못이 박힌 것처럼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키드의 질 나쁜 장난기가 도졌을 확률은 없다.

정호는 키드에게 ‘적’일 경우에만 발포하도록 명했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단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키드가 있는 자리에 작은 뿔 고블린들이 잔뜩 모여 있거나...’

그럴 가능성은 너무도 낮다.

이제는 한참을 찾아야 얼굴을 볼까 말까한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하필이면 ‘키드’가 있는 곳에 모여 있을 리가 없다.

‘...키드의 총알을 받고도 버티는 녀석이 나타났거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탕탕탕탕!

연이어진 발포음.

키드의 스킬, ‘속사’가 발동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정호의 귀를 때렸다.

“키드, 서서 소환 해제.”

곧장 화신들을 불러 온 정호가 다시금 키드를 소환하자.

“허억, 허억, 허억.”

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키드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허억, 허억.”

키드는 자신의 리볼버에 탄알을 집어넣으면서, 숨을 골랐다.

“푸후...!”

“무슨 일이지?”

키드가 진정이 됨을 확인한 정호는 상황을 되물었다.

단순한 ‘작은 뿔 고블린’이라면, 키드가 이토록 고생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난쟁이들이랑 비슷했는데, 아무리 쏴도 죽질 않아요.”

예상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작은 뿔 고블린이랑은 다르다는 말인가?”

“작은 뿔? 아뇨. 이마 위에 커다란 뿔 하나 달고 있었는데요.”

“몸집은?”

“난쟁이들보다 훨씬 컸어요. 제 몸보다 크던데요?”

‘큰 뿔 고블린인가?’

단숨에 떠올리는 것은 큰 뿔 고블린이었다.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라면 키드의 총알을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터.

하지만 정호는 그 생각을 지웠다.

고작 큰 뿔 고블린에 키드가 고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몸 색깔은?”

“...나무 그림자 때문에 잘 안보이긴 했지만... 음, 아마도 빨간색이었을 거에요. 머리 위에 보석 같은 게 박혀있기도 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키드의 이어진 말에 확신했다.

“홉고블린.”

고블린의 완전한 상위종.

고블린이라 부르기는 하지만, 정작 그 힘은 차원이 다른.

톨비아에서는 초보자들이 마주치면 도망쳐야하는 1순위에 선정되어 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녀석의 정체를 확인한 정호의 얼굴에는 일체의 곤란함 따위는 없었다.

“잘했다.”

반대로 떠오르는 것은 기대감에 찬 미소.

“얼른 사냥하러 가지.”

희귀 몬스터, 홉고블린.

톨비아에서 녀석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럭키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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