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24화
시야가 뒤바뀌며 나타난 상점.
그곳에서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내지은 노인이 두 손을 펼치고 정호를 맞이했다.
“찾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있네. 무엇이든 말만 해보게.”
처음 만났던 행동과 말을 반복해서 하는 노인.
마치 NPC처럼 느껴지는 행위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노인을 향해 인사했다.
비단 그것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정호가 예의범절이 우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리 NPC처럼 행동하려고 하려 해도, 정호는 앞에 선 이 노인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불청객이 왔구만.”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기억 하고말고.”
어느새 심드렁하게 표정이 변한 노인이 투덜댔다.
첫 번째 시련이 끝난 이후, 정호는 상점을 방문했었다.
무려 삼 천 코인이라는 거금을 들고서, 잔뜩 장비 구경만 하다 떠난 정호를 잊는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스스로 물었으나 그리 큰 기대를 갖지 않은 듯, 담담히 묻는 노인.
“물건을 좀 사려고 왔습니다.”
하지만 정호의 대답에 대번에 눈을 부릅뜨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아무리 자네가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라도 장비 없이 진행하기란 어려운 법이지.”
고개를 주억거린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만연했다.
곧장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점 주인.
터엉! 텅! 텅!
가판 위로 수많이 많은 장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었다.
“다 범상치 않은 물건들일세. 이건 드미트리의 세계수 가지. 캐스팅 계열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물건이지. 능력치의 상승은 물론이고 모든 캐스팅 마법 시전 속도 15% 감소! 지금이라면 고작해야 5천 코인 밖에 하지 않네. 다음으로는 고대 어쌔신의 핏빛 대거. 히든 클래스 전용의 무기라 가격이 4천 코인에 불과하지만 ...”
마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신이 나서 설명하는 노인의 목울대에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정호가 보기에도 대단한 물건들이었다.
지난 번 보았던 물건들이 고작해야 ‘이 성급 장비’ 수준에 그친 것에 비해 지금은 삼 성급에 넘보는 장비들을 꺼내고 있었다.
다만, 그 성능만큼 가격이 비쌌다.
‘...내가 코인을 잔뜩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노인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하나, 정호는 딱히 그 오해를 풀어내려 하진 않았다.
제아무리 값이 비싸다고 한들, 언제고 구매할 수도 있는 물건이지 않은가.
지난번처럼 이 성급 장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의 물건은 정호도 뽑기로 얻을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주는 노인을 멈출 이유는 없었다.
“솔직히 이건 자네도 얻기 어려운 물건이라고 보내만, 혹시 모르니 설명해주겠네. ‘몰락한 왕의 검’. 황제가 되지 못한 불사의 왕이 지니고 있던 물건일세. 모든 능력치 50. 특수 능력으로는 ‘광기’효과, 생명력 흡수율 5%가 부여된 대단한 검일세. 가격은 2만 코인이지만, 그 값은 톡톡히 하는 녀석이지.”
그런 정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노인이 비장의 카드로 꺼낸 몰락한 왕의 검은 눈을 부릅뜨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물론 죽은 왕의 저주가 걸려 있어,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감소하는 디버프가 걸리긴 하지만 말일세.”
“그건 조금 실망이네요.”
노인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정호는 금세 몰락한 왕의 검에 대해서 시선을 거두었다.
노인 또한 정호의 관심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다른 물건을 꺼내들었다.
“이 검은...”
“이 도는...”
“이 갑옷은...”
“이 장갑은...”
한참이나 열변을 토해내는 노인.
그에 정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물건들을 하나하나 비교, 확인했다.
모두 괜찮음을 넘어서, 상당한 수준의 장비들이었다.
“허억, 허억. 그래, 어떤가?”
그야말로 속사포처럼 설명을 이어간 노인이 숨을 몰아쉬며 정호에게 물어왔다.
어떤 물건을 구매할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정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사고 싶습니다.”
“허억?”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쁨을 숨기긴 어려운지, 입고리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하지만 정호는 그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코인이 없네요.”
얼음장과 같은 차가운 물이 화악- 끼얹어졌다.
“자, 자네..그건 무슨...!”
노인의 화색을 띄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물들었다.
도대체 지난번에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코인들을 어디다 사용했냐는 듯, 의구심을 잔뜩 품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쳐다보셔도 정말 없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아이쇼핑이나 하려고 찾아온 겐가?”
이크.
정호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노인의 모습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혹시, 능력치을 올려주는 영약에 대해서는 다루십니까?”
본론을 꺼내어야 할 시간이었다.
* * *
“진작에 말해주면 좋지 않았나...”
“다른 물건들도 궁금해서 말이죠.”
노인은 정호의 말에 완전히 화를 가라앉히지는 못한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무엇이든지 있다고 말은 했던가? 물론 있지.”
처억.
노인이 가판 위에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 뚜껑을 열자, 마치 진주와도 같은 모양새.
파란색을 띈 영약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에서부터 힘 증가 영약. 하급, 중급, 상급일세.”
“능력치 증가량은 어떻게 됩니까?”
“하급은 1, 중급은 2, 상급은 3이 올라가는 효과를 가지고 있네. 이건 체력 증가 영약에 해당하는 물건이네.”
“...놀랍네요. 중급 영약이 다섯이면, 레벨이 두 개나 껑충 뛰는 셈이니.”
“...음?”
한데, 정호의 대답에 노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영약은 하급, 중급, 상급에서 각각 하나 씩 밖에 적용되지 않지 않은가.”
하급을 한 번, 중급을 한 번, 상급을 한 번 먹으면 더 이상 섭취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영약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치는 합하여 '6'뿐이엇다.
“...예?”
그에 정호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짓자, 노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설마 몰랐는가? 도대체 어떻게 시련에서 그만한 코인을 얻었는지 모르겠구만.”
“그, 그렇습니까?”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긴 하네만...”
가늘게 뜬 눈이 정호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의심이 가득 담긴 눈빛.
정호는 곧장 그 대화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하급이 오 백, 중급이 천, 상급이 이 천일세.”
“...”
정호는 그 가격을 듣고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 키드가 먹은 영약이 무려 천 코인짜리라고?’
천 코인이라면 화신이나 장비 뽑기를 무려 11번이나 할 수 있는 가격이다.
그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덥석 쥐어주었으니, 아깝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곤란해...’
키드에게 필요한 민첩 수치는 이제 ‘3’이다.
그렇다면 상급 영약, 그러니까 ‘2천 코인’이라는 거금을 소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코인을 보유하고 있어도 고민해야 할 판이다.
한데, 300코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인이 없는 겐가?”
“아쉽게도, 그렇네요.”
“자네...도대체 어디다 그 많은 코인을 사용한 건가. 설마 사람들에게 코인을 팔기라도 한 건가?”
노인의 얼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정호는 가타부타 설명을 하지 않았다.
노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마당에, 톨비아에 대해서 꺼내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짓이었다.
침묵을 지키는 정호.
그에 노인이 탄식했다.
“맙소사. 자네 같은 인재가 그런 멍청한 판단을 할 줄이야...안타깝네. 정말 안타까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뽑기로 더욱 큰 이득을 보았으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노로 가득했던 노인의 표정이 연민으로 가득했다.
“지금쯤이면 전조가 나타났을 터인데...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네.”
“...”
정호는 갑작스레 종말에 대해 입을 여는 노인의 말에 숨을 죽였다.
“전조가 시작되었다면 곧 침공이 온다는 말일세. 아마 지구의 시간이라면 수일 내...아니, 균열과의 시차를 생각하면 바로 다음 날 나타날 수도 있겠지.”
“...”
“위험하네. 정말 위험해. 자네의 그 장비로는 도저히 버텨낼 수 없을 걸세.”
종말.
그 정체가 ‘침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게다가 그것이 며칠 남지도 않았다.
설마하니 이런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나이가 드니, 헛소리를 조금 하게 되는군. 자네는 들은 적이 없는 걸로 하세. 혼잣말을 한 것뿐이니까.”
자신이 알려주지 않았던 것으로 하라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정호는 고개를 숙여, 값진 정보를 준 노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노친네의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네만... 그저 안타까워하는 말일세.”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스윽-.
노인이 품속에서 하나의 알약을 꺼내어 내밀었다.
정호는 영문도 모른 채, 그것을 받아들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 내밀었던 영약들 중 가장 오른쪽에 있었던, 제일 빛나고 있는 영약.
한데, 그 색깔은 조금 전과는 달랐다.
힘 증가 영약은 파란색.
지금은 하얀색이었다.
“이건...?”
“자네 지금 얼마나 코인을 가지고 있나?”
“300코인입니다.”
“그거면 되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내밀어 영약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2천 코인’이나 하던 물건이 순식간에 가격이 훅 내려갔다.
“...”
정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독한 의구심이 떠오른다.
제아무리 자신에게 좋은 정보를 넘겨주었다고는 하지만, 가격에서만큼은 절대로 타협을 보지 않는 노인이다.
그런 상점 주인이 단순한 호의로 깎아 주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자가 있는 모양이네요.”
“...아쉽게도 그렇네. 능력치 ‘3’을 올려주는 상급 영약인 건 확실하네. 단지 그 능력이 랜덤으로 붙는 것이 문제지.”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정호를 고민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급, 중급, 상급.
각각 하나 씩 밖에 적용되지 않는 영약이다.
한데, 그런 귀중한 상급 영약을 랜덤에 맡기기에는 그 위험부담이 컸다.
특히나 정호는 키드의 ‘민첩’을 올려야하지 않은가.
“...”
“미안하네. 역시 이건 실패작이네. 영약이 랜덤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말이 없는 정호.
그에 노인은 사과까지 하며, 다시금 영약을 품속으로 넣었다.
“아니, 그걸 왜 다시 넣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정호가 황급히 저지했다.
“응?”
고개를 기울이는 노인.
“아스텔의 상태창. 그러니까... 스탯 중에서 랜덤으로 3이 오른다는 거죠?”
“그렇네.”
미소를 내지은 정호가 입을 열었다.
“20프로라면, 할 만하지 않습니까.”
2000코인의 확정과 300코인의 랜덤.
그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주십쇼.”
정호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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