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8화
세오는 두 번째 시련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다.
새빨간 피를 얼굴에 잔뜩 묻힌 채, 도움이 필요하냐며 미소를 짓던 사내의 얼굴.
분명 아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와도 같은 모습은 자신이 느꼈던 그 어떤 공포보다도 더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위에는 위가 있다.’
시련이 끝나고, 과한 관심으로 인해 곤란해하는 사내를 도왔다.
남자를 향해 윙크마저 날리는 만행까지 저지르면서 말이다.
그것은 세오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사를 다녀본 적도 없는 그가, 상사를 보필하는 사원의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다시는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아.'
충격적인 만남 이후, 세오는 단련을 시작했다.
돈을 받고 취재에 응하기는 했지만, 수련을 게을리할 생각은 없었다.
‘...어?’
한데, 불이 켜진 뒤.
이정호라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등 뒤를 스쳐 지나가는 한기가 있었다.
피로 얼룩진 기억이었지만, 저 모습은 분명 시련에서 보았던 악마였다.
“잘못 보신 겁니다.”
하지만 정호는 담담히 답했다.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순간이었다.
‘잘못 봤을 리가 없어.’
게임에서라고는 하나, 암살 의뢰를 받으며 생활했던 세오다.
그런 자신이 인상착의를 착각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오는 그 의문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서, 설마...’
시련에서 만났던 사내는 분명 사람들을 도와주기는 했다.
하지만 끝끝내 자신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미.
그 말인 즉, ‘그런 것으로 해라’라고 하는...
일종의 협박이 아닐까.
꿀꺽.
절로 침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섣불리 입을 놀리지 않은 자신을 칭찬했다.
“잘못 본 게 맞을 겁니다. 사실 정호 선배님은...”
스스로를 김동하라 소개한 이가 정호에 대해 대변하고 나섰다.
하지만 세오는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을 만류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네?”
“제 착각인 것 같습니다. 제가 잘못 본 게 맞아요. 정호님...정호 씨는 오늘 저하고 처음 만난 겁니다.”
“아, 네.”
불과 하루 전 있었던 시련이다.
시련에서 보았던 그 실력이라면, 자신 정도는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이가 분명했다.
‘분명 이것도 취재가 아니라, 강요인건가?’
거금과 함께 들어온 취재에 드디어 자신의 인생이 꽃길이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만약에라도 이 취재를 거절했다면?
이미 집 주소를 알고 있는 그가 자신을 찾기란 쉬운 일이다.
“그,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네. 고생하셨습니다.”
동하와 정호를 마중하는 세오의 얼굴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탁. 철컥.
“허억, 허억, 허억...!”
문을 닫자마자 바로 걸어 잠근 세오는 숨을 몰아쉬었다.
“종말이고 뭐고 할 문제가 아니야.”
세오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내가 사는 장소를 들켰어.’
분명 세오는 잘못한 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게임에서 암살 의뢰를 받아 왔던 기억.
그리고 뇌리에 새겨진 그 피로 얼룩진 학살자는 세오에게 초조함을 선사했다.
달칵.
곧장 불을 끈 세오가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스킬 : 그림자 은신]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남은 시간 : 36시간]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한 세오의 수련.
그 스킬 수련이 꽤나 한 쪽으로 치우게 되었다는 사실은 본인 스스로도 몰랐다.
* * *
“좀 특이한 사람이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정호는 세오에 대해 떠올렸다.
무언가 대단한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눈치를 살피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유니크 클래스라...’
암살 계열의 히든 직업.
시련에서 보았을 때, 시선을 끌 정도로 노련한 모습을 보여 준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124위. 두 번째 시련에선 340위.’
등수가 오히려 낮아졌지만 남들과 다른, 특별한 성장을 할 게 분명한 녀석이었다.
스킬을 수련하고 있는 모습까지 확인했으니, 그 등수는 크게 중요치 않으리라.
‘유저들의 성장이 빨라.’
정호의 얼굴에 초조함이 서렸다.
궤도에만 오르면, 금방 강해진다.
MMORPG게임의 특성이나 다름없다.
이번에야 알맞게 삼 성급 화신, ‘키드’가 나와 주었지만 다음에도 이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심지어 종말의 전조가 찾아온다니까.’
두 번째 시련 직전에 알려 온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전조라고 하면, 분명 현실에서 일어난다는 의미다.
시련과도 같이, 죽어도 죽지 않는.
그 따위 터무니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진짜로 ‘목숨’을 거는 사투.
다른 이들은 착실히 그에 준비해 나가는데, 자신은 코인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불안함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마지막 취재 대상이 제일 문제긴 해요.”
잔뜩 심란함에 취해 있는 정호의 귓가에 동호의 말이 들려왔다.
“마지막 대상자?”
정호는 그에 되물으며, 종이를 넘겨 그 인물을 찬찬히 확인했다.
24세, 김세정.
닉네임 레이나.
“레이나? 레이나...레이나라면.”
“네. 두 번째 시련에서 3위에 위치한 랭커요.”
정호가 눈을 크게 떴다.
두 번째 시련의 랭킹 3등의 랭커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레이나가 왜 이 취재를 받아들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어째서?”
곧장 의문을 토했다.
아스텔에서 제공하는 금액이 상당했던 모양인지, 랭커들이 흔쾌히 자신의 노하우마저 공개했지 않은가.
“김세정이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 본 적 있지 않아요?”
“...음?”
한참을 ‘김세정’이라는 이름을 곱씹다, 화들짝 놀랐다.
“그 김세정?”
“네.”
“삼정 기업 손녀?”
“네.”
칼같이 날아오는 단답에 정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삼정 기업이라면, 전자 제품 계열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 대기업 중에서도 대기업.
한마디로 재벌가의 손녀라는 의미였다.
“그렇군.”
어째서 동호가 의문을 품었는지 깨달았다.
종말이니 뭐니 떠들어 대도, 아직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하루아침 만에 재벌가가 무너질 리가 없다.
재벌가의 손녀가 돈이 궁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조건이 하나 붙어 있긴 하거든요.”
“조건?”
“네. 이번 취재에 선배가 채택된 것도 그 조건 때문이래요.”
“...날? 왜?”
“저야 모르죠.”
정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많고 많은 사원 중에 어째서 자신이 취재하기로 결정 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설마 김세정의 요청이었다니.
“골치 아프네...”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하늘에 맹세코 자신은 재벌 쪽에 연관된 일이 단 하나도 없다.
김세정, 본인과의 개인적인 연결 고리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정호는 매스컴에 가끔 등장해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끼이이익-.
“뭐, 가 보면 알겠죠.”
“그래. 그런데...”
차가 멈추자, 정호는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여기가 맞냐?”
도착한 곳은 삼정 기업 본사가 아니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 * *
“선배님,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왜? 같이 들어가지 않고.”
“그런 조건이라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아무튼 택시비는 따로 입금 해준다니까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부르르릉-.
손을 들어 떠나는 동호를 배웅하고 나서야, 정호는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딸랑-.
카페 내부는 제법 한산했다.
아니, 한산한 정도가 아니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직원의 환영 인사도 없었으니 말이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편에 자리 잡은 여성 한 명.
그 뒤를 지키듯 서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둘.
“쯧.”
혀를 찼다.
대번에 무언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랭커들과의 취재라고 하여 덥석 문 것이 화근이었다.
정호는 마음을 다잡고서, 담담히 여성을 향해 걸어갔다.
“이정호 씨 맞으십니까?”
“네.”
사내 중 하나가 다가와 정호의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야 물러섰다.
정호는 김세정으로 추정되는 여성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갑습니다.”
“...”
여성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손을 들어 올려, 보디가드 둘을 물렸다.
‘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카페에서 나서자.
“반갑습니다. 이정호 씨. 아스텔에서는 레이나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김세정이라고 합니다.”
“이정호입니다.”
정호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세정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터라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대번에 미인이라고 알아볼 정도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취재를 와서 이런 소리하는 것도 조금 웃기지만, 무슨 일입니까?”
조금 예의가 아니더라도.
정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의문을 토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을 콕 집어서 찾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새어 나가면 안 되는 내용 중 하나라서요.”
“아닙니다. 그 정도 사과면 충분합니다.”
대뜸 던져오는 사과에 정호는 의외라는 눈빛을 떴다.
이래서 선입견이라는 게 꽤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내용이기에 그렇습니까?”
“이번 삼정 기업에서 낼 제품 중 하나 때문이거든요.”
스윽-.
그녀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패를 먼저 선보였다.
내밀어지는 물건은 자그마한 전자 시계처럼 보였다.
“이건...스마트워치입니까?”
“비슷한 부류죠. 잠시 이쪽을 봐주시겠어요?”
찰칵.
시계를 채운 세정은 몇 가지 조작을 하는가 싶더니 손목을 내밀었다.
화면 속에 떠오르는 내용.
-김세정/24
-직업 : 백마법사
-레벨 : 12
-힘 : 12 민첩 : 17 체력 : 24 지능 : 76 운 : 77
정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김세정의 스탯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일견 사 성급의 화신과 비견되기에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이건?”
“흔히들 말하는 상태창이죠.”
자신에게는 떠오르지 않았기에 확인할 길이 없었던 아스텔의 상태창이었다.
세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상태창이야 혼자만 알고 있으면 충분하지만, 이에 대해 속이는 이들도 분명 있겠죠. 그걸 위한 제품입니다. 사실상 새로운 신분증...과 같은 부류가 되겠네요.”
“과연. 왜 사람들을 물렸는지 알겠네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사업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정호로서도 이와 같은 제품의 가치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과연 대기업이라고 할까.
돈에 관해서는 정말이지 발 빠른 수완이 아닐 수 없었다.
‘제작 관련 직업을 가진 녀석이 있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스텔이 직접 전해주었을 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의문에 슬쩍 세정을 바라보니, 시선을 피한다.
대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푸후...”
정호는 의문을 덮었다.
애초에 궁금한 것은 그런 세세한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이것이 저와는 무슨 상관입니까?”
경호원들마저 물리며 기업 비밀을 자신에게 보여주는 까닭.
짚이는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인 차 물어보았다.
“상태창이 없다는 소식을 접해서요.”
아니나 다를까.
세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정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누가 그럽니까?”
“신원 불명에 존재하지 않는 전화번호로 연락한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법이죠.”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섭외자는 아스텔일 것이다.
그런 존재를 제아무리 대기업이라 할지라도 알아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럼 저를 부른 이유는...”
“네. 확인을 위해서죠.”
이를 테면, 이 제품에 대해 오류를 확인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이해할 만했다.
모두가 상태창을 얻은 마당에 자신처럼 이례적인 경우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으니 말이다.
‘아스텔이 내가 상태창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꽤나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스텔의 힘을 자신에게 주지 않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튀어나왔으나, 정호는 상념을 털어내고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만 착용하면 되는 겁니까?”
“네. 그게 조건이었으니까요. 취재에는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고작 시계를 한 차례 착용하는 것으로 무려 70대 스텟이 존재하는 김세정에게 취재를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좋은 거래 조건이었다.
“이름과 나이만 입력하시면 될 거에요.”
달칵.
세정의 지시에 따라 이름과 나이를 입력하자, 곧장 스마트워치의 화면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과학적으로 증명하지도 못할 상태창을 어떤 방식으로 읽어내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호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정호 / 29
-레벨 : [email protected]
-직업 : @#
-힘 : 8 민첩 : 7 체력 : 12 지능 : 10 운 : 3
처참하기 짝이 없는 능력치가 떠올랐다.
와락.
정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른 능력치들이야 상관은 없다.
'운이 3?'
하지만 자신에겐 가장 무엇보다 중요한 스탯이 아주 개박살이 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그 스탯에 큰 의미는 없다.
아스텔에서 운이란 치명타가 얼마나 발생하는 가와 그 치명타 공격이 얼마나 강해지는 지에 대한 척도 일뿐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다. 3이 뭔가, 3이.
"하하..."
허탈감과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정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좀 부끄러운데요.”
“직업이나 레벨이 오류로 표기되는 걸 보면... 정말 상태창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정호의 손목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세정이 물러섰다.
“좋습니다.”
“괜찮나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정호 씨처럼 특이한 사례가 더 있다면 모를까. 확인된 바가 없으니까요.”
“그럼, 이제.”
“네. 어떤 내용이든 답해드릴게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일단은 저 정체불명의 ‘스탯’에 대해 알아보아야만 했다.
“일단 스탯에 관해서인데...”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서는 정호.
하지만.
쿵.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울림이 정호를 막아세웠다.
'뭐야?'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
“...음?”
한데,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자마자 정호와 세정이 동시에 의문을 터뜨렸다.
둥, 둥, 둥.
울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 지금 시련 중이었던가요?”
“아뇨.”
세정에 물음에 간단히 답한 정호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종말의 전조가 찾아온다고...’
두 번째 시련 직전에 알려 온 그 말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현실에서 절대 있을 리가 없는 녀석이 바깥에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했으나, 결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종류의 생명체.
“크아아아!”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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